가림토에 대한 견해
3) 천간(天干)과 지지(地支)의 풀이
천간(天干)과 지지(地支)의 줄임말이 간지(干支)인데 “천부표”를 적용했을 때 어떻게 풀리는지 한 번 살펴볼까 한다.
이야기를 풀어가다 보면 기존의 상식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풀이가 있을 수도 있으니 진위의 판단은 각자에게 맡길까 하는데 본인의 견해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더라도 그에 반하는 다른 풀이도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 정도는 열어두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이 글을 대했으면 하는 것이 이 사람의 바램이다.
1, 천=(ㅊ)+(ㅓ)+(ㄴ)
1) (ㅊ)=씨알점(·)+(ㅡ)+(ㅅ)
씨알점(·); 시작과 끝, 열매나 씨앗을 의미하는데 자음(ㅎ)과 마찬가지 원리로 자음(ㅅ)과 관련되어 이 말에서는 시간적 의미로 쓰인다고 본다.
(ㅡ); 상하의 수직적 기준이나 중심, 더 이상 올라갈 수 없거나 내려갈 수 없는 막다른 극, 겉과 속의 경계, 보임과 숨겨짐의 경계, 멈춤, 정지, 수평적 상태 등으로 쓰이는 기호로 이 말에서는 (ㅅ)과 관련되어 공간적 의미로 쓰인다고 본다.
(ㅅ); 근원에서 갈라져 나온 무엇, 나오는 무엇, 변화, 분화, 나뉨 등을 의미하는 기호로 한자 여덟 팔(八)도 비슷한 의미
2) (ㅓ); 수용, 받아들이는, 어떤 한 지점이나 안으로 사방에서 무엇이 몰려오거나 몰려가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거나 들어가는 수평적 운동의 방향성, 미래에서 현재로 가거나 오는, 뒤로 등을 의미
3) (ㄴ); 극위에 생겨난 무엇으로 인간의 차원을 기준으로 보면 대지위에 생겨난 무엇이니 곧 만물이 만들어내는 자연계를 의미
[씨알점(·)+(ㅅ)]과 [(ㅡ)+(ㅅ)]의 의미를 결합한 기호가 자음 (ㅊ)으로 [씨알점(·)+(ㅅ)]은 시작과 끝 즉 끊임없이 나고 죽는 선대와 후대라는 시간적인 연기적 대물림을 통해 자손이 퍼지고 분화하고 있음을, [(ㅡ)+(ㅅ)]은 수평적으로 존재하는 각 개인들이 끊임없는 모임과 흩어짐, 만남과 해어짐과 같은 시작과 끝을 통해 연기적인 공간적 변화를 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기호라 본다.
따라서 (ㅊ)의 의미에 (ㅓ)가 결합되면 무언가 수용하거나 포용한다는 것으로 만물이 마음껏 생명활동의 시공간운동을 할 수 있도록ㅡ<ㅊ>ㅡ 수용하고 포용하며 보살피는 존재는 삼신하나님과 천지인의 삼계이니ㅡ<처>ㅡ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만들어내는 자연계가ㅡ<ㄴ>ㅡ 존재한다는 의미를 담은 말이라 본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 나를 받아들이고 포용하며 살뜰히 보살펴주는 존재가 이 사람이라는 의미로 인생의 동반자인 자신의 짝을 “처”라고 하지 않는가?
지금은 좀 다르나 예전에는 씨앎탁까지 잡아주며 백 년 손님으로 떠받들어주던 곳도 처갓집이라 불렀다.
그러므로 “천”이라는 우리말은 만물을 수용하고 포용하며 살뜰히 보살피는 존재는 곧 삼신하나님과 천지인의 삼계라는 의미를 담은 말이라 본다.
한자 천(天)자의 풀이는 이전에 올린 글을 다시 카피하는 것으로 대신할까 한다.
ㅡ< 천(天)자에 대한 풀이는 전에 다룬 것 같은데 천(天)자는 흔히들 알고 있는 일반적인 상식과는 달리 고대한국학에서는 천지인 삼계를 모두 의미하는 문자라는 것을 알기를 바란다.
은문천부경에 나타나는 천자의 쓰임이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데 다만 어느 천을 중심적 기준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 그 의미가 조금씩 달라진다.
은문천부경에서 각기 다른 네 가지 천자의 형태가 나타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물론 다른 문자도 마찬가지인데 한자식 기록은 이런 차이를 전혀 알아볼 수 없게 단일한 문자로 기록함으로 인해 더더욱 천부경에 대한 이해를 멀어지게 하고 있다고 본다.
이와 비슷한 문자적 쓰임이 공(工)자에 나타나는데 삼신하나님과 천지인의 삼계를 나타내는 문자로 옥편은 장인공으로 풀이하고 있으나 이는 문자적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풀이로 삼신하나님과 천지인의 삼계가 오묘하게 어우러지며 부지런히 만물을 길러내고 있음을 나타내는 문자라 본다.>ㅡ
2, 간=(ㄱ)+(ㅏ)+(ㄴ)
(ㄱ): 모음기호 (ㅡ)와 (ㅣ)가 결합된 기호로 극 아래 생겨난 수직적인 무엇을 의미하는데 인간을 기준으로 보면 대기권 아래 생겨난 수직적인 무엇으로 물, 불, 바람, 쇠 등의 기(气)의 변환적인 순환리듬을 통해 존재하는 생태계를 의미하는 기호이고 작게는 생명의 몸속에 생겨난 수직적인 무엇으로 기혈의 순환리듬을 통해 존재하는 생리적 양태를 의미하는 기호
(ㅏ); 안에서 밖으로의 운동의 방향성, 사방으로 흩어지거나 나아감, 미래로, 밖에서의 활동, 앞으로 등으로 (ㅣ)기호의 의미에 운동의 방향성을 나타내는 기호
(ㄴ); 위와 동일
가다, 간다, 가거라, 가자 등의 우리말은 어떤 한 지점에서 사방이나 앞으로 나아가는 미래형의 움직임에 대한 의미를 나타낸다고 보는데 “간”이라는 말은 생태계 속에서ㅡ<ㄱ>ㅡ 사방으로 흐르는 무엇이니 곧 대기(大氣)의 흐름이ㅡ<ㅏ>ㅡ자연계의 변화를ㅡ<ㄴ>ㅡ 만들어낸다 정도의 의미를 담은 말이라 본다.
그런데 어떤 변화가 생겨난다는 것은 그 이전의 상태를 벗어난다는 뜻이니 이전과 이후에 대한 가름 즉 기준이 있어야 한다.
요리를 하는 중간 중간에 음식의 간을 보는 것도 “간본다”라고 한다.
따라서 한자 간(干)에 쓰이는 “간”이라는 말은 순환적인 흐름의 변화와 변화의 사이 즉 중간적 과정의 어떤 기준이나 경계를 나타내는 뜻으로 만들어진 말이라 본다.
간(干)=(ㅡ)+(十)
干이라는 문자의 기호적 조합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ㅡ)+(十)]의 형태와 [(ㅡ)+(ㅡ)+(ㅣ)]의 형태가 그것으로 천간(天干)이라는 복합적 문자의 의미와 비록 문자적 의미가 매우 협소하기는 하나 干자를 “방패 간”으로 옥편은 읽는 것으로 보아 [(ㅡ)+(十)]의 기호적 조합이 맞다고 본다.
(ㅡ); 상하의 수직적 기준이나 중심, 더 이상 올라갈 수 없거나 내려갈 수 없는 막다른 극, 겉과 속의 경계, 보임과 숨겨짐의 경계, 멈춤, 정지, 수평적 상태 등이 되고 정신적으로는 현실에 개입된 우주정신 즉 천일, 지일, 인일의 삼신하나님 또는 생명각자의 영혼(靈魂)을 의미
十자 기호에 대한 의미는 전에 올린 글로 대신한다.
ㅡ<만(卍)자 기호가 영(靈)의 정신이 만들어내는 수평적 관계로 돌아가는 상대적인 법리적 세계를 나타내는 기호라면 십(十)자 기호는 혼(魂)의 정신이 만들어내는 천지인 삼계와의 수직적 관계를 통해 상보적으로 돌아가는 각자가 독립된 법리적 상태를 나타내는 기호인데 쉽게 예를 들면 나와 너가 상대적인 상태에서 의식적인 심리적 관계로 만들어진 세계를 나타내는 것이 만(卍)자기호이고 나나 너와는 상관없이 천지인 삼계의 순환리듬에 따라 각자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무의식적인 생리적 리듬을 통해 돌아가고 만들어지는 세계를 나타내는 것이 십(十)자 기호라 본다.
즉 만(卍)과 십(十)의 기호는 작용과 반작용이라는 일반기하의 세계와 예측불가라는 불확실성의 프랙탈 기하의 세계를 나타내는 고대인들의 기호라 보는데 만(卍)이 심리적인 의식적 세계의 연기적 관계를 나타내는 기호라면 십(十)은 라이프니츠의 모나드의 개념과 비슷한 생리적인 무의식적 세계의 각자 독립된 관계를 나타내는 기호라 본다.
서양문명이 뉴톤이라는 인물에 의해 만유인력을 발견하고 나서야 일반기하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었다면 프랙탈의 세계는 20세기에 들어와서야 겨우 눈을 뜨기 시작한 세계로 저 먼 고대의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것을 만(卍)과 십(十)이라는 문자기호로 남겼다는 것으로 인간은 분명하게 개별적인 생리와 집단적인 심리가 서로 복합적으로 어울려 존재하나 최첨단이라는 현대과학은 아직도 이 둘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그런 상태에서 세워진 서양식 심리학은 생리와 심리의 분명한 개념정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얼버무리고 있는 실정이라 본다.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불가에서 만(卍)자 기호를 대표적 상징으로 기독에서 십(十)자 기호를 대표적 상징으로 내세우게 된 것도 다 이유가 있다는 것으로 만(卍)자 기호 자체가 너와 내가 의식적으로 만들어내는 연기적 세계를 나타내는 기호이기에 인간사의 모든 희노애락이나 흥망성쇠의 인간역사라는 업을 만들어내는 근본은 나와 너가 된다.
즉 나와 너라는 의식이 없다면 업은 만들어질 수가 없다.
불가의 논리가 왜 그렇게 흐를 수밖에 없는지는 이 만(卍)자의 의미만 제대로 알아도 거의 이해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기독의 십(十)자 기호는 너와 내가 주 대상이 아니라 삼신하나님이 주 대상이 됨을 나타내는 기호인데 너와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돌아가고 있는 것이 천지인 삼계의 흐름이다.
따라서 이러한 삼계의 흐름에 따라 내 의지와는 별 상관없이 내 몸 안에서는 무의식적인 생성장사라는 본능적인 창조와 소멸의 시간적인 생리적 리듬은 어김없이 돌아가게 된다.
라이프니츠가 모든 것은 신의 뜻이라는 “예정조화론”의 철학을 만들어낸 바탕도 그가 속한 기독교 문화의 영향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므로 천지인의 삼계를 주관하는 삼신하나님이 곧 내 목숨 줄을 쥐고 있으니 기독교에서 강하게 나타나는 주님의 종이라는 개념이나 영생관이나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성경을 근거로 내세워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교리적 특성은 당연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둘 다 문제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것인데 인간은 생리적인 면과 심리적인 면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복합적인 존재로 생리적인 무의식적인 면만 강조하는 기독교 계열이나 의식적인 심리적 면만 강조하는 불가 계열은 인간문제를 다루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으로 아무리 경전을 통한 논리적 바탕이 치밀하다고 해도 한 면에 치중되어서는 현실적으로 인간문제를 다루기에는 반쪽의 진리밖에 될 수가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고대인들은 지금의 현대인들보다 인간문제에 있어서 훨씬 지혜로웠다고 보는데 단편적인 예만 든다 해도 너무나 과학적인 우리말과 우리글이 만들어지는 원리나 만(卍)과 십(十)이라는 문자기호의 의미나 컴퓨터의 작동원리가 만들어지는 기초가 된 이진수나 십진수의 원리를 정립한 라이프니츠가 결정적으로 그 원리에 대한 기본적인 답을 얻었던 것이 팔궤와 역으로 이것이 만들어진 것이 저 먼 고대라는 사실은 이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干이라는 문자적 의미는 어떤 경계를 극으로ㅡ<ㅡ>ㅡ 그 속에 만들어진 입체적 세계를ㅡ<十>ㅡ나타내는 문자라 본다.
예를 들면 껍질에 둘러싸인 씨앗이나 열매, 분자와 대기를 극으로 존재하는 생태계, 피부를 극으로 존재하는 생명의 몸 등등 껍질에 둘러싸여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입체적 형태에 적용이 가능한 문자라 보는데 나를 방어하는 용도인 방패를 의미하는 뜻으로도 사용이 가능한 문자라고 본다.
그러므로 천간(天干)이라는 문자적 의미는 천지의 기운이ㅡ<태양에너지와 지구와 달의 기운>ㅡ 인계인 생태계 속으로 들어와 어루러지며 인계의 변화와 분화를 만들어내는 기운의 흐름이 나타나니ㅡ<天>ㅡ 그에 따라 생명의 몸을 둘러싼 인계를 경계로ㅡ<ㅡ>ㅡ 생명의 몸속에서 생리적인 변화와 분화가 일어나는ㅡ<十>ㅡ 원리를 담은 무엇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문자라 본다.
이러한 천간(天干)의 논리를 바탕으로 나타나는 동양적 사상들이 만물의 부모는 천지라는 논리나 삼신하나님과 삼계의 흐름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만물의 변화를 의미하는 “순리”라는 사상적 배경이 나오게 된다고 본다.
ㅡ<지금 이 순간에도 느끼는 것이지만 기존의 동양학에 쓰이는 기본적인 학술적 용어들로는 고대한국학의 논리를 제대로 설명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마구 흐트러져 있거나 왜곡되어 있어 기존의 통상적 개념들로는 고대한국학의 우주론을 바탕으로 한 논리전개가 매우 어려운데 예를 들면 고대한국학에서는 천(天)자의 의미에 이미 천지인의 삼계가 다 포함되어 있으나 기존의 동양학에서는 이를 따로 분리해 천지인(天地人)으로 표현하고 있다거나 천지인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특히 천(天)에 대한 개념은 매우 모호하게 개념적 정리를 하고 있어 현실세계와 거의 연결이 되지 않는 공허한 논리들을 양산해 낸다거나 하는 것인데 고대한국학을 바탕으로 한 기본적인 학술용어들에 대한 개념정리가 되지 않으면 고대한국학에 대한 제대로 된 논리전개는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기존의 동양학은 기본적인 학술적 용어들이 매우 어지러운 혼란 상태에 처해 있음을 알기를 바란다.
참고삼아 전에 올린 “원방각의 개념적 적용”이라는 글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기를 바라는데 쉽게 예를 들어 은문천부경과 한자식 천부경의 문자적 형태를 비교해 보면 은문천부경은 다양한 문자적 형태를 가지고 있으나 한자식 기록은 거의 단일한 문자적 형태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단순하게 천부경의 우주론을 자연으로 가정하고 문자적 형태는 각기 색깔이 다른 연필로 가정해서 자연에 대한 그림을 그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둘 다 그림실력은 비슷하다고 가정한다면 당연히 색깔이 많은 연필을 가진 쪽이 자연에 대해 보다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그려낼 수 있을 것이나 색깔이 적은 연필을 가진 쪽은 조금은 모호하고 엉성하게 그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연을 직접 보지 못하고 그림을 통해 자연을 이해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는 제삼자들이라면 어느 쪽 그림을 보아야 자연에 대한 이해가 빠르고 잘 될까?
다양한 색깔로 그린 그림을 보고 세워진 학문적 체계가 고대한국학의 여러 경전들과 우리말과 한글과 한자와 같은 흔적들이라면 단순한 색깔로 그린 그림을 보고 세워진 학문적 체계가 옥편을 포함한 기존의 동양학이라고 보아도 큰 차이는 없다고 본다.>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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