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유교의 리기(理氣)론
조선조에 나타난 유교의 리기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뿌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보는데 유교의 뿌리도 알고보면 천부경의 우주론과 관련되어 고대한국학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본다.
인류문명의 뿌리가 고대한국학의 핵심인 천부경의 우주론에서 출발한다고 보아도 크게 무리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유교도 예외는 아니라고 본다.
따라서 주자의 리기(理氣)론도 이러한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본다.
은문(갑골)천부경에 나타나는 설계원리에서 문자배치도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면 이런 점은 금방 들어난다고 보는데 우주정신을 의미하는 리(理)와 물질을 의미하는 기(氣)의 구분을 명확하게 하며 설계된 것이 천부경으로 표현양식만 조금 다를 뿐 천부경의 리기론을 그대로 배낀것이 주자의 리기론이 아닌가 할 정도로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는 것이 주자의 리기론이라 보아도 무리는 없다고 본다.
물론 원론적인 기본틀을 말하는 것으로 세부적인 내용은 다를 수도 있다고 보는데 수박껍데기 할듯 보았을 뿐 아직 주자의 리기론을 제대로 살펴보지 못해 더 이상은 말하기 곤란하다는 것을 밝히며 천부경에 나타나는 문자배치도의 자세한 의미는 전에올린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ㅡ<지금도 인터넷에 뜰지는 알 수 없으나 "문자배치도로 나타나는 우주이야기"를 검색해 보기 바란다.>ㅡ
즉 우주정신인 리(理)를 나타내는 것이 은문(갑골)천부경에서 가운데 중심에 배치된 육(ㅜ)의 의미이고 물질적 변화인 기(氣)를 나타내는 것이 육(ㅜ)을 중심으로 대각선으로 배치된 무, 중, 일, 일의 의미이고 수직수평으로 배치된 삼, 구, 일, 일의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주자의 리기의 구분과 천부경의 리기의 구분은 최소한 기본적인 틀에서는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고 보아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라 본다.
이러한 원리는 바둑판의 설계원리나 장기판의 설계원리 대학, 중용, 시경 등등 고대의 동양인들이 남긴 여러 흔적들에 수없이 나타난다고 보는데 천부경의 우주론에 나타나는 리기론적 기본틀을 바탕으로 보편화되어 있던 것이 고대동양철학이라 보아도 무리는 없다고 본다.
다만 표현양식이 조금식 달라 각기 다르게 보일 뿐 그 뿌리는 천부경이라고 본다.
조선조에서 처음으로 펼쳐진 퇴계와 고봉간에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리기론적 논쟁의 핵심은 정신과 물질 즉 리와 기를 하나로 볼 것인가 리와 기를 둘로 구분해서 볼 것인가인데 원론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던 주자의 리기론을 현실정치와 연계시켜 인간개혁과 사회개혁의 발판으로 세울 이론적 체계로 보다 구체화시킨 조선조의 대표적인 인물이 퇴계와 고봉, 율곡과 우계라고 보는데 퇴계와 우계진영과 고봉과 율곡진영으로 갈라져 치열한 논쟁을 벌린 핵심은 결국 리기일원인가 리기이원인가에 대한 원론적인 논쟁으로 퇴계와 우계진영의 선비들은 리기이원을 지지하는 세력이었고 고봉과 율곡진영의 선비들은 리기일원을 지지하는 세력들로서 후에 동인의 영수로 떠받들어진 것이 퇴계이고 서인의 영수로 떠받들어진 것이 율곡이 된다고 본다.
물론 유교적 논리를 조선건국의 기초로 세운 인물은 당연히 정도전으로 그 이전에 너무나 무능하고 부패해서 더 이상 희망이 없던 고려를 새롭게 혁신하고 싶어하던 고려말의 지식인들이 유교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사실이나 유교적 논리를 기반으로해서 건국의 에너지로 활용하려한 정치적 실권자는 정도전으로 경국대전으로 대표되는 그의 사상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끊임없는 영향을 주며 조선조 오백년을 지탱하게 해준 가장 강력한 국가경영철학의 지표로 활용된다고 본다.
이야기를 앞으로 돌려 퇴계가 말한 사단칠정론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하면 정신인 리(理)에서 발하는 것이 사단인 인의예지(仁義禮智)로 사덕(四德)의 단서가 되는 기본 마음 즉 측은(惻隱)지심, 수오(羞惡)지심, 사양(辭讓)지심, 시비(是非)지심의 정감을 말하는 것이고 물질인 기(氣)에서 발하는 것이 칠정인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의 정감을 말하는 것이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는데 퇴계의 논리에서 정신인 리에서 발하는 것이 사단인 인의예지로 그것이 나오는 근본마음이 측은, 수오, 사양, 시비지심한 정감이라 하며 모두 마음심자를 붙이고 있는데 최소한 조선조의 지식인들이 쓴 마음이라는 것은 정신인 리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퇴계의 사단론에 들어나고 있다고 본다.
물론 물질인 기와 관련되어 칠정인 희노애구애오욕도 정감이라 했으니 이 또한 마음과 관련된다.
그러므로 조선조 지식인들이 쓴 마음이라는 것은 정신인 리와 물질인 기와 관련되어 쓴 것으로 엄밀하게 따지면 모두 인간의 감정과 관련된 의미라는 것이 들어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퇴계의 리기이원론에 반해 리기일원론을 내세운 것이 고봉과 그를 계승한 율곡으로 사단과 칠정은 하나로 둘로 분리할 수 없다며 사단은 칠정에 속하는 특수한 부분일 뿐이라며 퇴계의 논리를 반박하게 된다.
이 사람이 보기에 둘 다 맞으면서도 틀렸다고 보는데 부분으로 보면 둘 다 맞으나 전체로 보면 둘 다 틀렸다고 본다.
이 논리는 천부경의 우주론과 연계해 설명해야 하기에 지금은 이 정도로 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유교적 논리가 조선조에서 사대부들과 일반인들에게 큰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진 배경에는 천부경의 우주론에서 도출된 철학적 기반이 뿌리깊게 당대의 사람들에게 남아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라 보는데 이런 점은 퇴계가 남긴 말에서도 충분히 들어나고 있다고 본다.
이것을 설명하기 앞서 삼신상제사상과 충효사상에 관련되어 고대한국인들의 흔적을 더듬어 볼 필요가 있다고 보는데 천부경과 삼일신고 참전계경에는 이런 점이 잘 들어나고 있다고 본다.
천부경은 문자배치도와 문장적 설계원리를 통해 이런점을 분명하게 하고 있는데 천부경에 대한 해석과 병행해야만 설명이 가능하기에 일단은 생략하고 천부경에 대한 대략적인 해설서로 보아도 무방한 삼일신고에서 삼일신고라는 제목에서 일은 우주본체신인 유일(有一)의 하느님을 의미하고 삼은 본체에서 갈라져나온 다신(多神)의 객체신인 삼신의 하나님을 의미하게 된다.
따라서 우주정신인 리(理)도 본체와 객체 즉 체와 용으로 구분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삼일신고라는 제목에서 들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본체는 형이상적인 리(理)를 의미하게 되고 삼신하나님은 형이하적인 리(理)를 의미하게 된다.
바꾸어말해 형이상의 리는 모든 형이하의 리가 나온 근본을 의미하고 형이하의 리는 그로부터 갈라져 나와 현실에 직접적으로 개입되어 현실을 움직이는 모든 우주정신을 의미하게 된다.
ㅡ<이는 물질적인 기(氣)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으로 본체의 기와 객체의 기로 구분하고 있는 것이 천부경의 첫문장과 끝문장의 문자배치적 의미가 된다,>ㅡ
따라서 다신의 삼신하나님이 쓰임을 마치고 본체로 돌아가면 다시 유일의 하느님이 되고 유일의 하느님이 쓰임으로 다시 나타나면 다신의 삼신하나님이니 결국 모두 같은 것으로 본 것이 고대한국인들의 신관으로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다시말해 사람이 곧 삼신하나님이라고 선언한 천도교의 핵심은 삼일신고라는 제목을 그대로 옮긴 것이라 보아도 무방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삼일신고라는 제목은 "쓰임으로 나타나면 삼신의 하나님이고 쓰임을 다하고 돌아가면 유일의 하느님인 삼신상제의 신께 아룁니다'로 풀이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러므로 본체의 하느님은 우주에 나타난 모든 객체의 우주정신이 나오고 돌아가는 근본을 의미하고 객체의 하나님은 우주에 나타난 모든 객체의 우주정신을 의미하게 되는데 인간을 기준으로 했을 때 현실에 직적 개입된 삼신의 하나님은 태양이고 지구와 달의 중력이고 만물의 영혼의 정신을 포함한 인계를 움직이는 정신으로 인신이라 부르기로 하자.
따라서 조상은 나와 가장 가까이 맺어진 인신의 하나님으로 조상을 받드는 것은 곧 삼신상제의 신을 받드는 것이 되기에 이를 미신으로 치부하는 것은 누워서 침뱃기나 마찬가지이기에 오로지 본체의 하느님만 찾고 조상에 대한 제례는 미신으로 치부하는 일부종교인들은 이제라도 반성하기를 바래본다.
이러한 사상적인 흔적은 우리말에도 상당부분 남아 있다고 보는데 사람이 죽었을 때 돌아가셨다고 말한다는 것은 왔던곳이 있기에 돌아간다는 말이 가능해진다.
그럼 오고 가는 그곳을 무엇이라 해야하는가?
그 답은 이미 삼일신고라는 제목에 그대로 담겨 있다고 본다.
유교에서 강조하는 충효사상이 공자맹자로부터 나온것이라고 보는 것이 지금의 일반적인 상식이라 보는데 효사상은 이미 일만년 전부터 우리조상들의 흔적에 나타난다는 것으로 신석기시대 유물인 지석묘 즉 고인돌이 그 예라 본다.
신석기시대에 한반도에서 돌 밑에 조상의 시체를 안치하고 조상을 기리었다는 것은 천부경과 관련된 신관이 이미 그때 존재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지석묘는 중국대륙에는 거의 없고 전세계에 분포하는 지석묘의 70%가 한반도에 집중되어 있다.
ㅡ<조상숭배와 효사상의 발원지가 한반도임은 지석묘 즉 고인돌이 말없이 증명하고 있다고 본다.>ㅡ
어떤 분이 말한 동이전의 기록을 옮겨보면
고대의 기록에 한반도인들을 ‘동이(東夷)’라고 불렀는데 이들이 살던 동이문화권에만 지석묘가 있다.
중국인들이 기록한 동이전(‘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부여(扶餘), 예(濊), 진한(辰韓)의 제사문화를 알 수 있다. “‘부여’는 정월에 천신에게 제사를 드리는데 국민들이 대회를 열어 며칠씩 음식과 노래와 춤을 계속하며, 그 이름을 영고라 하였다.
‘예’는 언제나 시월절에는 천신에게 제사했는데 밤낮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술 마시며 노래하고 춤을 추니 그 이름을 무천이라 하였다.
‘진한’은 오월에 파종을 마치면 귀신에게 제사했는데 군중이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밤낮을 헤아리지 아니했다.
춤출 때엔 수십 인이 함께 일어서서 서로 따르면서 땅을 디디며 손발을 낮추었다 높였다 하며 서로 장단을 맞추는 것이 탁무와 비슷했다.”
이 당시 한반도에서는 조상의 최고신인 상제(上帝)를 믿었다고 한다.
이 제사의 모습은 특정한 인물만 제사를 시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제사에 참여한다.
그리고 그 제사의 형식은 노래와 춤임을 알 수 있다.
이 정도만 해도 충효사상의 발원이 고대한국학임이 들어나고 있다고 보는데 어떤 분이 말해준 퇴계의 말을 예로 해서 당시의 조선조 지식인들에게도 삼신상제의 사상적 실체가 그대로 남아 있었음을 확인해 보기 바란다.
퇴계는 조상신이 혼으로 존재함을 다음과 같이 비유하여 말했다.
“불이 꺼진 뒤에 화로 안에는 오히려 훈기가 남아 있어 오랜 뒤에야 바야흐로 다 없어지고, 여름날 해가 진 뒤에도 남은 열기가 오히려 남아 있다가 밤이 되어 음기(陰氣)가 왕성해진 뒤에야 바야흐로 식어버리니 모두 한 가지 이치입니다.”
ㅡ<‘퇴계전서’, 답남시보>ㅡ
죽은 영혼은 시나브로 소멸되기에 조상신이 정말 제사에 함께 계신다고 여긴 것이다.
돌아가신 부모의 신주를 모셔오는 것에 대한 태도에서도 그러한 자세를 알 수 있다.
퇴계는 상례에서 부모의 신주를 만드는 절차에 관해서 말한다.
“정침(正寢, 주무셨던 방)에 빈소를 차리는 것은 그 神으로 하여금 생존하던 곳에 편안히 있게 하려는 것이다.
산야에 장사를 마치고 평토를 끝내자마자 신주에 글자를 쓰는 제주(題主)를 끝내고 자제로 하여금 봉묘를 돌아보게 한 뒤 곧바로 반혼(返魂)하는 것은 아마도 신혼(神魂)이 흩어져서 의지할 데가 없을까 염려되므로 진작 의귀하도록 즉 평소에 거처하던 곳에 편안히 있게 하려는 것이니, 이것이 효자의 마음입니다.”
ㅡ<‘퇴계전서’, 답조기백문목>ㅡ
신혼이 평소의 거처에 머무르게 하는 배려는 조상신이 신주에 의귀하셔서 살아 계신다는 믿음을 확인할 수 있다.
퇴계는 왕에게도 ‘상제’를 대하는 자세를 강조했다.
특히 퇴계가 좋아하는 구절이 있다.
‘시경’에 “‘상제께서 그대에게 내려와 계시니 그대는 주저하지 말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주저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라. 상제께서 그대에게 내려와 계시니라.’라고 하였다.”는 구절이 있는데 이 구절의 주석이다.
“배우는 사람이 평소에 이 말씀을 읊조리면서 두려운 마음으로 마치 상제께서 실제로 그 위에 내려와 계시는 것처럼 살아간다면, 사악함을 막고 진실 됨을 보존하는 데 도움 됨이 아마도 크지 않겠는가?
또한 의를 보고도 반드시 실행할 용기가 없거나 혹은 이해득실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는 사람도 이 말을 음미하여 스스로 결단을 내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퇴계는 “매번 암송하고 음미할 때마다 가슴 깊이 감동을 주고 나약한 마음을 격동시킨다”고 말했다.
여기서 상제란 첫째 사악함을 막고 진실 됨을 보존할 수 있게 도와주는 존재이고, 둘째 의를 실행할 수 있는 용기를 내어 결단을 내리게 해주는 존재다.
퇴계가 매번 벼슬을 사양할 때마다 높은 관직이 와도 한결같이 자신을 지킬 수 있었던 결의는 아마도 이러한 영성이 있기에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퇴계에게 있어서 상제란 늘 의로움을 지켜나갈 수 있게 해주는 떨림을 주는 존재였고, 태극을 인간에게 닿게 해주는 궁극적 실체였다.
상제가 내려준 태극이라는 당위와 나의 존재가 겹치는 그 자리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긴 시간의 어떠한 결실이다.
의를 선택한 나의 결기가 혹 실행할 용기가 없거나, 이해득실로 마음이 흔들릴 때 상제께서 “주저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아라”라는 말은 일상 속에 극기(克己)의 시간을 견디게 해주는 초월적인 힘의 의지인 것이다.
퇴계에게 상제는 너와 나 사이에 따스함에 깃들어 있으며, 따스함을 위한 집중으로 극기의 시간을 견뎌내어 얻어진 방울방울들의 결실이다.
시간적인 여유가 좀 나길래 두서없이 몇자 적어봅니다.
퇴계가 말한 내용이 그대로 나타나는 구절이 삼일신고에 있는데 참고삼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自性求子 降在爾腦 자성구자하고 강재이뇌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