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야
이시영
키가 훌러덩 크고 웃을 때면 양볼에 깊이 보조개가 패이는
작은집 형수가 나는 좋았다
시집온 지 며칠도 안돼 웃냇가 밭에 나왔다가
하교길 수박서리하다 붙들린 우리 패거리 중에서 나를 찾아내
"데름, 그러믄 안 되는 것이라우" 할 때에도
수줍은 듯 불 밝힌 두 볼에 피어나던 보조개꽃 무늬
아, 웃냇가 웃냇가
방아다리 지나 쑥대풀 우거지고 미루나무숲 바람에 춤추는 곳
사래 긴 밭에 수많은 형수들이 엎드려
하루종일 밭고랑 너머로 남쪽나라 십자성 부르는 곳
저녁에 소몰이꾼 우리들이 멱감는 냇가로 호미씻으러 내려와
서는
"데름 너무 짚은 곳에는 들어가지 마씨요 이" 할 적에도
왈칵 풍기는 형수의 땀냄새가 나는 좋았다
홀시아버지 밑 형제 많은 집으로 시집와 남정네마저 전쟁터
에 보내놓고
새벽논에 물대기 식전밭에 고추따기 아침볕에 보리널기 쏘내
기 밭에서 소고삐 몰아쥐고 송아지 찾기로 여름 내내 등적삼
에 벼이슬 걷힐 날 없으면서도
저녁이면 선선한 모깃불을 피워 놓고 콩국수 말아
와상 가득 흥겨운 집안 잔치를 벌일 줄도 알았던 형수,
모깃불 매캐하게 사위어가고 하나 둘 어린 형제들 잠들어갈
무렵이면
내 손을 꼭 붙들고 말했다
"데름, 데름은 꼭 우리 집안의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쓰우."
"훌륭한 사람이 워떤 사람인디라우?"
"장군 같은 것, 그 뭣이라더라 밥풀 여럿 단 쏘위 같은 것...."
그러면 마당 한구석에서 다가온 어둠이 빤한 눈으로
우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잠이 쏟아질 것만 같은 내 눈에
갑자기 별빛 한 무더기가 쏟아져내렸다
환한 밤이었다
--------------------------------
캄캄한 세상오지를 헤매다녀도 늘 가슴에 횃불하나 비추어주는 시가 있다면 바로 이 시일 것이다. 이런 구수하고 정겨운 고향의 기억들은 어떤가. 따스하고 인정 넘치는 대화가 그대의 귓가를 오래 맴돌지 않는가. 어느덧 '데름' 하고 귓가에 자작자작 스며드는 형수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동화처럼 살아있는 곳, 바로 그리움의 기원인 우리들 마음속 고향이다. 각박한 세상의 맞장과 예기치 못할 난황의 인생살이 속에서도 변함없이 언제라도 우리에게 두팔 벌려 마음을 위무해주고 감싸안아 줄 것 같은 푸근한 고향! 이 시가 깊은 감동과 울림으로 몰아친다.
<신지혜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