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선경문학상 수상작
잘디잘아서 - 이돈형 시집
(도서출판 상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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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람하듯 맺히는 섬세한 골똘함과 대범함이 함께 갈마드는 지점에서 이돈형의 시는 코스모스처럼 여리기도 하고 우주처럼 넓은 품을 서늘히 펼쳐놓기도 한다. 범속한 세상의 통속 앞에서는 한없이 빠르게 스쳐가지만 마음 저 깊은 곳을 돌 올하게 울리는 사랑의 범주 앞에서는 한없이 늡늡하고 오래 머물러 남모르게 아 파한다. 이돈형의 시인됨이 그러하다. 여기에 실려 있는 시편들은 그런 이돈형 의 끌밋한 시심이 우주적인 사심과 인간적인 성정으로 갈마들어 있다. 섬려纖麗 하다. 세상엔 많은 시들이 있지만, 이돈형의 시에는 신서정의 바람으로 벼린 칼 날이 들어있다. 이 칼에는 아무리 베여도 오히려 낙락하고 시원하고 때로 아프게 환해지는 구석이 있다. 어디 아니 그러겠는가. 이돈형의 시니까 그러하다.
_ 유종인(시인)
시인의 말
오늘의 내가 아무리 막무가내여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돈형
시집 속의 시 한 편
잘디잘아서
잘디잘은 돌멩이처럼 쉽게 구를 수 있다면 부르르 떨며 부서질 수 있다면
아무렇게 뒹굴다 부딪치거나 터져도 웃는 돌멩이처럼 근근이 소멸에 가까워진 돌멩이처럼
닮고 싶다
그런 돌멩이 옆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보면 쓸쓸함도 따뜻하다고 돌멩이에 코를 대면 가슴을 쓸어내린 냄새가 난다고
누군가에 발길질하고 싶을 때 그 냄새를 맡으며 부서질 대로 부서져 잘디잘은 사람이 될 수 있겠다고
잘아서 울음도 쉽게 망가지고 식은땀도 넉넉하게 흐르고 어쩌다 뜨거워져도 금세 식어버리는
아주 잘디잘아서 어떤 영혼에도 쉽게 상하는
가끔은 제 돌멩이에 뒤통수를 맞고도 배시시 웃는 돌멩이처럼
아껴둔 쓸쓸함을 아는 돌멩이처럼
목차
1부
몸살
죽을 만큼
사진
의자
상여
배가 아파 돌아오는 저녁
눈
나는 모자란 사람
연락
혼자 놀아서
저녁
삽질
2부
수지침
사람 人字는 八字와 비슷하다
농막
국수
무섬
국물
가방
허가 없이 나온 삶이
도시락
一心
어죽
어디서 고요를 데려와야 하나
사람에겐 어리석음이 있어 누가 내게로 올 때 손을 비비게 된다
태풍
3부
언뜻
그러거나 말거나
늪
어깨를 맞대고
노숙
도둑놈보다는 도둑님이 낫겠지만 그래도 훔치고 싶지 않았다
믹스커피
비
지랄
적당히
욕
구걸
쓰다듬다
일
4부
봄옷
무너지는 일
막걸리를 사들고
어둠
아주 사소한 실수
돼지껍데기
노릇
아가리
우물우물
나는 어떻게든 핥는 사람
빈집
선배
당신의 기억 속에 있는 내가 이만큼 자라서
해설 _ 아껴둔 쓸쓸함을 아는 돌멩이처럼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저자 약력
2012년 계간 『애지』로 등단하여, 시집 『우리는 낄낄거리다가』 『뒤돌아보는 사람은 모두 지나온 사람』 『잘디잘아서』를 발간하였다. 2018년 김만중문학상, 2022년 제3회 선경문학상을 수상하였다.
lee3388d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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