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의 비밀
인체 해부를 엄금했던 조선시대, 허준의 스승 유의태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제자에게 인체 해부의 기회를 주고자 제자를 밀양의 얼음골로 불러들였다. 저만치 왕골자리에 반듯이 누워있는 스승과 그 곁에 한장의 유서가 촛불 아래서 빛나고 있었다.
'사람의 병을 다루는 자가 신체의 내부를 모르고서 생명을 지킬 수 없기에 병든 몸이나마 네게 주노니 네 정진의 계기로 삼으라.' 자진한 스승의 시신 앞에서 가난한 대중과 제자에 대한 스승의 한없는 사랑에 망연했던 허준은,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의사가 될 것을 맹세했다. 스승의 살을 가를 날카로운 칼날을 집어들고 가늘게 떨리는 허준의 손끝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경건함이 배어 나왔다. 이은성씨의 '소설 동의보감'이 전해준 그날 얼음골의 풍경이다.
풀리지 않는 신비
얼음골은 한여름에도 얼음이 얼 정도로 차가워 해부를 위해 시신을 보존할 수 있는 안성맞춤의 장소였다. 지금껏 학자들은 현대과학으로 얼음골의 신비를 풀어보려고 시도했지만 아직 어느 것도 완전하지 않다.
1996년 KAIST의 송태호교수는 한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이유가 자연대류 때문이라며 미밀의 열쇠는 얼음골 골짜기에 쌓여 있는 화산암이 쥐고 있다고 했다. 화산암은 용암이 분출돼 급격하게 식으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구조가 치밀하지 못하고 미세한 구멍이 송송 뚫려 있는 다공성의 돌이다. 계곡에는 이러한 돌들이 얼키설키 쌓여 있어 길다란 돌무더기(너덜)에는 공기가 큰 저항 없이 통과할 수 있다. 겨우내 차가워졌던 너덜 내부의 공기는 계절이 바뀌어 외부의 온도가 올라가면 상대적으로 밀도가 높아진다. 밀도차로 인해 너덜 내부의 차가운 공기가 너덜 밖으로 흘러나오면서 찬바람을 내고 얼음을 얼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부산대 문승의 교수는 비밀은 화산암이 아니라 지하수가 지니고 있다는 기화열설을 제시했다. 일사량이 극히 적고 단열효과가 뛰어난 얼음골의 지형특성상 겨울철에 형성된 찬 공기가 여름까지 계곡주위에 머무는 상태에서 암반 밑의 지하수가 지표 안팎의 급격한 온도차에 의해 증발되면서 주변의 열을 빼앗아 얼음이 언다는 것이다.
인공의 얼음골 석빙고
얼음골 얼음의 비밀이야 어찌됐건 유의태는 자연의 혜택으로 자신의 주검을 보존해 제자에게 해부의 기회를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그 자연을 배워 한여름에도 불편 없이 얼음을 먹고 살았다.
석빙고는 지난 겨울의 얼음을 녹지 않게 보관했다가 한여름에 쓸 수 있게 한 인공의 얼음골이었다. 얼음을 저장할 공간은 땅속에 설치해 서늘하게 하고, 지붕은 흙으로 덮고 교묘하게 환기구멍을 설치해 가을까지도 걱정 없이 얼음을 보관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지증왕 6년(505년)에 빙고전이라는 관청을 두어 얼음을 저장해 쓰게 했다는 기록이 있어 우리 민족이 일찍부터 얼음 과학에 일가견이 있었음을 입증한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설치한 얼음창고 외에도 생선보관용으로 민간에서 설치한 사설 얼음창고도 여럿 있었다.
얼음을 저장할 때는 얼음끼리 서로 붙지 않도록 쌀겨 솔잎 등을 1-2cm정도 쌓고 얼음을 층층이 쌓았다. 얼음은 섣달 겨울에 가로 70-80cm 세로 1m, 높이 60cm정도의 크기로 잘라 채빙했다.
그런데 채빙의 노동은 매우 고된 것이어서 겨울만 되면 한강변의 민가들이 채빙노역을 피해 도망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채빙부역을 피해 도망한 남편을 기다리는 어린 부인을 뜻하는 빙고청상(氷庫靑孀)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먹기에는 시원하지만 그 속에는 백성들의 땀과 고통이 배어 있었던 것이다.
비밀은 수소결합
그런데 얼음은 왜 차가운 곳에 있고 차가움을 지켜주는가. 비밀은 물의 분자구조에 있다. 고체, 액체, 기체 상태에서 각각 다른 상태로 변하는 상전이가 일어나려면 반드시 숨은열의 출입이 있어야 한다.
얼음 1g이 물 1g으로 변할 때는 약 80cal의 숨은열이 필요하다. 0℃의 물 1g을 1백℃로 만드는데 필요한 열량이 1백cal인 것을 감안하면, 얼음이 물이 되는데 필요한 열량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얼음이 녹으면서 시원해지는 것은 바로 얼음이 상전이에 필요한 숨은열을 주변 공기로부터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물이 상전이를 일으킬 때 숨은열이 필요한 이유는 원자와 분자세계에서 일어나는 화학결합 때문이다. 물(H2O)에서 산소 원자는 그보다 작은 2개의 수소 원자와 결합돼 있다.
물분자는 V자 모양으로 수소 2개가 양끝에 위치하고, V자의 꼭지점에 산소가 위치해 있다. 그런데 물분자에서는 산소가 수소의 전자를 끌어당기는 힘이 강해 부분적으로 수소 원자 쪽은 양전기를 띠고 산소 원자 쪽은 음전기를 띤다. 이웃의 다른 물분자에서도 이와 같아서 물분자 각각의 수소와 산소가 서로 끌어당기게 된다. 바로 이러한 분자간의 결합이 수소결합이다.
수소결합이 물분자들을 서로 끌어당겨 모여 있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물은 쉽게 증발해버리지 않고 액체로 남아 있을 수 있다. 만일 수소결합이 없다면 물분자 하나하나는 뿔뿔이 흩어져 기체로 날아가고 지구상에는 물이 한방울도 없을 것이다.
고체가 액체에 뜨는 유일한 물질
얼음이 물에 뜨는 것도 수소결합 때문이다. 온도가 낮아져 얼음으로 변할 때 수소결합은 분자들을 잡아 매 단단한 고체를 형성한다. V자형의 꼭지점에 있는 산소 원자는 원래 2개의 수소결합을 만들 수 있다. 때문에 다른 물분자들의 수소를 끌어당겨 산소 원자 1개에 4개의 수소가 달라붙는 형국이 된다. 이를 중앙의 산소 원자에서 보면 주변의 수소들이 마치 정사면체의 꼭지점에 하나씩 있어 그 모양이 방조제를 쌓을 때 쓰이는 발이 넷 달린 콘크리트 구조물을 연상시킨다. 물분자들이 이런 식으로 얽히고 설켜 물은 액체로 있을 때보다 얼음이 될 때 공간을 더 많이 차지하게 돼 부피가 커지고 밀도가 낮아진다.
액체보다 고체의 밀도가 낮은 것은 모든 물질 중에서 물이 거의 유일하다. 만일 얼음의 밀도가 물보다 컸다면 얼음은 호수 바닥으로 가라앉고 연이어 수면에서 얼음이 얼자마자 바닥으로 가라앉아 호수는 순식간에 전체가 꽁꽁 얼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얼음은 물에 뜨기 때문에 얼음이 물을 덮어 찬공기를 물과 차단시켜 얼음 아래의 물이 더 이상 얼지 않는다. 이 때문에 겨울에도 호수의 물고기들이 죽지 않고 생활할 수 있으며 북극과 남극의 얼음 아래 바다에서 생물들이 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얼음을 늘 쓰면서도 얼음에 깃들인 사연과 과학을 잘 모르고 사는 것 같다. 얼음으로 인해 세상을 구제하는 명의가 되고, 한조각의 얼음에 더위를 잊었던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한조각을 위해 남편을 잃은 청상과부가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역사에 늘 개입해 있었던 것은 물분자가 지닌 자연의 비밀이었다.
고려 중기의 승려 혜심(1178-1234)은 얼음을 의인화한 '빙도자전'(氷道者傳)에서 얼음이 선(禪)의 경지를 지녔다고 찬양했다. '온몸이 맑아 신령의 빛이요, 표면을 관통하는 투명함은 숨김이 없도다. 한순간에 물로 변하는 것을 의아해 하지 말라. 무상하게 보이는 속에 진리가 있으니.' 저 먼 시대의 고승이 투명한 얼음 속에서 보았던 진리는 무엇이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