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일자:2023-10-18>
[문화] 제4회 선경문학상 하기정 시인 수상
▶선경문학상 수상자 하기정 시인
제4회 선경문학상에는 하기정 시인의 「나의 아름다운 캐릭터」 외 4편이 선정되었다. 심사를 맡은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명예교수)와 박형준 (동국대 교수)시인은 하기정 시인의 작품들은 "쓸데없는 난해성으로 가독성을 떨어뜨리지 않으며, 안이한 접근으로 시를 가벼이 만들지 않되, 수려하고 유창한 문장 위에 시적인 것을 미끈하게 잘 띄우는 능력을 보여준다. 또한 그는 추상의 끝에서 늘 구체로 돌아오며 구체가 사물의 의미를 가두는 순간에 추상의 문을 연다. 게다가 전체적으로 매우 고른 수준의 작품들은 그의 시작 능력에 깊은 신뢰를 준다"고 평했다.
수상작과 수상소감 그리고 심사평은 2024년 『상상인』 봄호(제7호)에 소개될 예정이며 이번 선경문학상 수상자인 하기정 시인은 2010년 영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고 시집으로 『밤의 귀 낮의 입술』과 『고양이와 걷자』가 있으며 수상시집 『나의 아름다운 캐릭터』가 발간될 예정이다. 5·18문학상, 작가의눈 작품상, 불꽃문학상, 시인뉴스포엠 시인상, 2023년 제4회 선경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제4회 선경문학상 수상작>
자책
책망은 나의 취미가 되었다
나는 나의 말 속에서 늙었다
지난여름의 녹청색 손잡이가 닳도록
가동했던 청춘의 발전기 앞에서
소용을 다한 겨울나무들
한때는, 이라는 시간의 표창장을 달고
쓸모없어진 발명품처럼 버려졌다
한물간 참외처럼 늙은 씨앗만 주저리주저리
박물관 지하 수장고에서 인공심장을 달고 있다
버리기에 아까운 유물처럼
나는 나의 생각 속에서 굴을 팠다
말의 무덤 속에서
적군에게 베인 귀의 무덤처럼
명백하게
선풍기 앞에 놓인 빙수처럼
녹지 않을 자신이 없다
공터와 나비
폐타이어에 앉아있는
사월의 나비는
죽어서 바퀴 굴리는
사람으로 오네
죽은 꽃들의 모가지에 앉아
입다 만 셔츠의 단추를 잠그고
신다 만 신발에 발을 넣어보고
식탁의 미역국 냄새를 맡아 본다
내 눈앞에 제비꽃으로 앉은
죽은 당신은
거짓이 없네
욕심이 없네
냄새를 주머니에 불룩하게 담아가는 사람은
허공을 공터처럼 일궈놓고
가슴에 커다란 구멍으로 일군
빈터가 있다고
공증하러 날아오네
숲세권
나의 말년은 숲을 누려보려 해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나무들
내려다보면 브로콜리 숲 같은
내겐 요일이 필요 없고
생활을 받아넘겨 줄 바통이 필요 없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눈송이들은 작은 새처럼 날아와
머리에 부딪히겠지
그러면 나는 새에게 은혜 갚은
최초의 사람
담쟁이덩굴이 타고 올라가는
가구를 들이려 해
두려운 뱀이 유리벽을 타고 올라와도
놀라지 않으려 해
차가운 심장과 나비를
길러보려 해
녹빛 덩굴이 목을 타고 절정에 오르면
마지막으로 목도리를 짜야지
그때 적당히
죽을 복을 잘 타고 태어난 사람처럼
초록의 팔에 매달리려 해
청려장
지팡이가 가리키는 쪽으로
여름이 자라고 있다
명아주잎이 물컹하고 비릿하게
매미는 새보다 일찍 일어난다
가로등이 햇빛처럼 비추는 나무 아래서
좋아하는 것들 틈에서
초록의 질투는 뿔처럼
여린 죽순에 받힌 송아지가 여름을 마주 보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네가 쥐고 있다
등 뒤에서 여름이
여름을 덮고 있다
손잡고 돌아가는 사람들
풀이 자란 쪽으로 길이 생길 것 같다
손가락이 없는데 움켜쥐고 싶은 것이 있다
바닥을 짚고 일어설 때마다
푸른 지팡이가 자라났다
나의 아름다운 캐릭터
그늘을 깊게 파는 사람을 알고 있다
거푸집에 누워 왼손바닥을 찍는 중이었다
그것이 그토록 기다려왔다는 듯이
그는 도끼로 계단을 내고 나무에 오르는 일을 경멸했다
기름을 바르고 처참하게 미끄러져 내리는 일에 열광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그는 늘 미안해서
안녕이 없는 사람
그리하여 그는 돈을 받지 않고도
아름답고 처절하게 잘도 팔았다
무엇을? 이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슬픔을 덤으로 얹어주었다
그는 매일 밤 요령부득으로 짠 스웨터를 입고
터진 옆구리를 꿰맸다
요령이 방울 소리를 내며
실패꾸러미를 안고 왔다
꽃병을 응시하다 정물의 배경이 되는 조연들은
필사적으로 필사하는 일이 파국으로 치닫도록
코너로 몰고 가는 중이었다
여전히 지하에서 촉수를 기르는 사람
아직도 제 눈을 찌르고 있는 사람
화살이 일제히 머리를 향해 날아들고 있다
<수상소감>
시를 쓰는 일은, ‘시를 쓰는 사람’이 ‘시인’이 되려고 간극을 좁히며 노력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를 쓰는 사람은 많겠지만, 시인이 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점점 이것에 대해 생각해 보는 때가 많아진다. 누군가, 내게 시인이라 부르는 것이 한사코 옹색하고 어색하다. 시를 쓰고 있기는 하지만, 시인으로 사는 삶은 아니어서 부끄럽다.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을 견디기는 힘든 일이다.
지난겨울에는 아이랑 눈사람을 만들었다. 다 자란 아이와 다 큰 사람이 주먹만 한 눈뭉치를 굴리고 굴려 두 개의 큰 덩어리를 붙여 눈사람을 만들었다. 바닥에 쌓인 눈이 모자라면, 나뭇가지에 쌓인 눈을 흔들어 떨어지는 눈으로 눈덩이를 불렸다. 아이는 뭔가 허전했는지 제가 쓰고 있던 모자를 눈사람의 머리에 씌워주었다. 눈을 뭉치는 일은 시를 쓰는 사람의 일과 같았다. 흩어진 말을 모아 녹을 준비가 될 형체를 만드는 일. 눈이 된 사람은 오롯이 서 있다가 사라졌다. 한 권의 시집을 내는 일은 사람들 곁으로 녹아 스며들기를 바라면서 ‘시인’이 되기 위해 ‘시를 쓰는 사람’으로 끝까지 남겠다는 것. 올여름엔 미루고 미루었던 글렌 굴드를 읽었다. 그는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한 대의 피아노가 된 사람이었다. 그처럼 시를 쓰면서 한 권의 시집이 될 사람이면 나는 좋겠다. 그러면 시집이 나올 때마다 죽고 다시 태어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태어나고 또 죽을 것이다.
상을 받으니 운이 좋았고 운이 좋으니 기쁘다. 그 기쁨의 목록 안에는 존경하는 심사위원님을 만난 것, 그 운으로 시집이 나오게 되었다는 것, 잘 쓴 시보다는 좋은 시를 쓰겠다는 생각을 다시 해보는 것, 시를 쓰면서 새로워지겠다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 오민석 선생님과 박형준 선생님, 고맙습니다. 상을 만들어주신 선경산업과 『상상인』, 선경문학상운영위원회에 감사드립니다.
<심사평>
저 높은 말들의 향연
제4회 <선경문학상>에 투고된 시집들이 무려 250여 권이었다. 당장 출판해도 좋을 정도의 형식을 갖춘 시집들이 이렇게 많이 투고된 것은 그 자체로 경이로운 일이었다. 양이 질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성 시인들이 보여준 이 열화와 같은 관심은 <선경문학상>의 높은 수준을 가능케 하는 ‘필요조건’이 되었다. 게다가 예심부터 본심까지 모든 심사가 철저하게 무기명 블라인드 상태로 진행이 되었다. 최종심의 심사위원들조차도 마지막으로 당선작을 선정하고 나서야 해당 시인의 이름을 알 정도였으니, 심사의 공정성도 어느 정도 ‘충분조건’까지 갔다고 자부한다.
250여 권의 시집 중에서 5인의 예심을 거쳐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모두 15권이었다. 이 열다섯 권의 시집들은 시인의 이름을 생략한 채 단지 표기된 숫자(시집 1, 시집 2, 등)로만 심사위원들에게 전달되었다. 1번부터 15번에 이르기까지 한 권 한 권 읽어나가는 동안 양적 경쟁이 허사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본선에 오른 대부분의 작품은 단언컨대 태작이 거의 없었다. 모두 다 일정한 수준을 견지하고 있는 탁월한 시집들이었으며, 그리하여 당선권에 이른 작품들을 다시 선별하는 데에는 상당한 집중이 필요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최종 5편을 추리고 그중에서 최종 당선작을 결정할 때엔 심사위원들 사이에 이견이 없었다. 심사위원들은 만장일치로 하기정의 『나의 아름다운 캐릭터』를 제4회 <선경문학상>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고 이견 없이 수상의 반열에 오른 하기정 시인께 먼저 깊은 축하의 인사를 드린다. 훌륭한 시를 쓰는 그 많고 많은 시인 중에서도 최고의 자리에 오른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저 높은 말들의 향연 어딘가에서, 더 높고 그래서 더 고독하고 깊은 시를 쓴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이며, 또 얼마나 장엄한 일인가. 하기정 시인의 작품들은 쓸데없는 난해성으로 가독성을 떨어뜨리지 않으며, 안이한 접근으로 시를 가벼이 만들지 않되, 수려하고 유창한 문장 위에 시적인 것을 미끈하게 잘 띄우는 능력을 보여준다. 그의 자성自省은 깊지만 병리적이지 않다. 그는 추상의 끝에서 늘 구체로 돌아오며 구체가 사물의 의미를 가두는 순간에 추상의 문을 연다. 게다가 전체적으로 매우 고른 수준의 작품들은 그의 시작 능력에 깊은 신뢰를 준다. 어려운 고지에 올랐으니 더 힘들 고원들이 시인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후에도 잘 걷고, 보고, 들으며, 계속해서 매혹의 언어를 보여 주기 바란다. 아울러 수상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으나 저 높은 말의 고원에 이미 오른 무수한 시인들께도 위로와 응원의 말씀을 보낸다. <심사위원: 박형준 오민석>(글)
시상식은 12월 2일(토요일. 오후 3시) 선경산업 강당(인천광역시 계양구 서운산단로3길 1(서운동)에
서 있을 예정이다. 상금은 일천만 원이며 상금 등 부대비용은 선경산업에서 후원한다. 선경문학상은
『상상인』과 선경문학상 운영위원회가 주관하고 선경산업이 주최한다.
미국최대한인포털 뉴욕코리아, John Kim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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