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일자:2024-10-14>
[문화] 제2회 선경작가상 한혜영 시인 수상
▶제2회 선경작가상 수상자 한혜영 시인
선경작가상은 문장을 지키는 작가의 영역을 지키고자 제정하였다. 제2회 선경작가상 수상자 한혜영 시인의 『겨울을 잃고 나는』이 선정되었다. 심사평 중에서 “신선한 상상력과 깊이 있는 시적 시선을 보여준 작품들이라고 판단되었다. 동물들과 식물들, 사물들의 세계에 자유자재로 융합하며 시를 생성해 내는 시인의 시적 능력이 돋보였다. 또한 이를 통해 삶의 다양한 양상을 투시하여 그 깊은 곳까지 드러내며 서정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나아가 우리가 사는 당대 사회의 문제를 파헤치고 드러내려는 성실함도 응모작에 대한 신뢰감을 더해주었다. 얼마나 시 쓰기에 전념하고 있는지도 느껴진다”는 심사 배경을 올린다.
수상작과 심사평은 2024년 『상상인』 겨울호(제10호)에 특집 소개될 예정이다. 이번 선경작가상 수상자인 한혜영 시인은 1994년 『현대시학』 시 추천. 199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태평양을 다리는 세탁소』 『뱀 잡는 여자』 『올랜도 간다』 『검정사과농장』이 있다. 시조집 『뒷모습에 잠깐 빠졌을 뿐입니다』. 동시집 『치과로 간 빨래집게』 등이 있다. 미주문학상, 동주해외작가상, 해외풀꽃시인상, 제2회 선경작가상 수상시집으로 『맨드라미 붉은 마당을 맨발로』를 발간한다.
▷심사위원 _ 이성혁 문학평론가(글) 이병률 시인
상금은 오백만 원이며 상금 등 부대비용은 선경산업에서 지원한다. 선경작가상은 『상상인』과 선경작가상 운영위원회가 주관하고 선경산업이 주최한다.
■ 시상식 2024년 12월 7일(오후 3시)
■ 장 소 선경산업 강당(인천광역시 계양구 서운산단로3길 1(서운동)
수상소감
지구별의 인연들에게
피트니스센터에서 돌아올 때면 마운틴 레이니어가 보입니다. 시애틀 인근이면 어디서나 보인다는, 산봉우리에는 사철 눈이 쌓여있습니다.
새들은 붉어지기 시작한 단풍잎을 콩콩거립니다. 무수하게 나 있는 길. 한 장의 낙엽에는 어떤 운명이 손금처럼 쥐어져 있을까요.
날이 조금 더 환해지고 비둘기들이 지상으로 내려옵니다. 뒤뚱거리며 걷는 것이 재미있어 몇 걸음 흉내 내다가 숙연해집니다. 나 역시 뒤뚱거리며 한 생을 살았구나, 싶어서요. 먹이를 구하는 일이라든지 시를 구하는 일이 다 그렇듯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우체국 앞을 지날 때면 그리운 사람들에게 손편지를 쓰거나 따뜻한 털목도리를 짜서 부치고 싶습니다. 동시대에 같은 별에서 만났다는 사실 만으로도 얼마나 눈물겨운 인연인지요. 한세상 살다가는 일에 있어 사람만 한 위로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살아있기에 기쁘고 반가운 소식을 접합니다. 3년을 준비하고도 내심 마음을 접고 있었는데 수상이라니요. 심사를 맡아주신 이성혁 선생님과 이병률 선생님, 선경작가상을 위해 수고해 주신 이승예 운영위원장님과 진혜진 상상인 대표님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 또한 귀한 인연으로 품으며, 지구별에서 만난 내 아름다운 인연들과 수상의 기쁨을 나누겠습니다.
2024년 겨울 미국 워싱턴 주에서 한혜영
심사평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선경작가상’에 많은 분이 응모하셨다. ‘선경작가상’도 ‘선경문학상’과 마찬가지로 작품집 전체를 제출하여 응모한다. 본심에 올라온 작품집은 13편이었다. 이병률 시인과 본 심사자는 본심에 올라온 작품집들을 읽고 3편의 작품집을 각각 최종심에 올렸다(작품집 제목만 알 수 있고 작품집의 저자가 누구인지 모른 채 심사를 진행했다). 13편의 작품집 모두 시에 대한 열정과 뛰어난 시적 기량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에, 최종심에 올릴 작품을 고르는 데 고심해야 했다. 이병률 시인이 올린 작품집은 『당분간 사과』, 『모든 밤에 갇힌 채』, 『겨울을 잃고 나는』이고, 본 심사자가 올린 작품집은 『쓸쓸해서 분홍』, 『마를렌 뒤마』, 『겨울을 잃고 나는』이었다. 두 심사자는 각 작품집을 추천한 이유를 제시하고 토의에 들어갔다. 두 심사자가 공통으로 올린 작품인 『겨울을 잃고 나는』을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 비교적 쉽게 합의할 수 있었다.
본 심사자가 최종심에 올릴 작품집을 선정할 때 기준으로 삼은 사항은, ‘작가상’에 걸맞은 시적 개성을 보여주고 있는가였다. 최종심에 올라온 작품집들은 모두 남다른 시적 개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겨울을 잃고 나는』은 신선한 상상력과 깊이 있는 시적 시선을 보여준 작품집이라고 판단되었다. 동물들과 식물들, 사물들의 세계에 자유자재로 융합하며 시를 생성해 내는 시인의 시적 능력이 돋보였다. 또한 이를 통해 삶의 다양한 양상을 투시하여 그 깊은 곳까지 드러내며 서정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나아가 우리가 사는 당대 사회의 문제를 파헤치고 드러내려는 성실함도 이 응모작의 저자에 대한 신뢰감을 더해주었다. 저자가 얼마나 시 쓰기에 전념하고 있는지도 느껴졌다. 이에 심사위원들은 『겨울을 잃고 나는』을 ‘제2회 선경작가상’에 선정했다. 응모하였으나 낙선한 분들께는 심심한 위로를, 수상자에게는 축하의 말씀을 드린다.
심사위원 _이성혁 문학평론가(글) 이병률 시인
제2회 선경작가상 수상작품 중에서
겨울을 잃고 나는
나는 흰옷을 걸쳐본 지가 오래된 종려나무, 소금기에 푹 절여진 꼬리를 끌고 해안가를 어슬렁거려요 마음은 죽을 자리를 찾는 늙은 늑대 같기도 하고 조문을 다녀가는 시든 꽃 같기도 하고 찢어질 대로 찢어진 깃발 같기도 하고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 같기도 해요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에요 겨울을 잃은 것들은 다 그래서 혀가 포도나무 덩굴처럼 길어졌어요 살려면 닥치는 대로 생각을 잡고 올라야 해요 아니면 녹아서 줄줄 흐르니까 얼음조각처럼 잘생긴 배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얼굴이 바닥에 질펀해요 뱀은 늘어질 대로 늘어진 혈관을 끌고 서늘한 굴을 찾아가지요
저기서 시곗바늘을 휙휙 돌리는 여자! 아직도 홈쇼핑의 채널을 지키네요 세상에는 없는 계절을 파는, 소매가 긴 스웨터로 감춘다고 감췄지만 손가락을 보니 거미의 종족이에요 땀이라고는 흘릴 줄 모르는, 카펫 가게의 상인처럼 공중에 척척 펼쳐놓는 상술로 하룻밤에도 무성한 계절을 팔아치우지요
늙은 테이프처럼 늘어진 시간 속으로 예고 없는 눈보라가 휘날려요 영하라는 말은 춥디추웠던 옛 연인의 이름, 나는 그리움을 코트 깃처럼 세우고 무릎이 푹푹 빠지는 이름 속으로 들어가요 라라의 노래를 들으며 닥터 지바고처럼 눈이 빨개지면서
눈보라 속에서 만났던, 네 개의 다리 중에서 겨울이 망가진 안락의자는 누가 쓰다가 버린 기호일까요 완벽하게 균형을 상실해 버린, 어떤 감동도 휴식도 줄 수 없는,
저 그런데 말이에요 벽난로가 어떻게 생겼지요?
문득, 불러보는 혁명가
마디마디
이어 붙여야 하나의 이름을 갖는 것들이 있지
시간과 시간,
사건과 사건이 모여 역사가 되는 것들이 다 그렇지만,
철도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따라 들어와
고통스럽게 끌고 다니던 척추를 부리고 있네
세월의 검은 뼈를 세느라
밤새도록 철커덕거리는 열차,
나는 지금 내 등에 깔린
무수한 침목을 세며 가문을 달리는 중이라네
검은 입술을 가진 터널 입구에
아버지의 얼굴이 실패한 혁명군처럼 내걸리고
화통소리 한결 높이는 열차는
코끼리처럼 달려 아버지의 얼굴을 가차 없이 찢어버리네
하긴, 한낱 사소한
인생 때문에 역사가 멈출 수는 없는 법이지
시간이란 때때로 물이고 불이고 바람이고 광기니까
마디마디의 낱말,
문장과 문장으로 이어진 한 권의 책을 일으켜 세우는
아, 버거워 삐걱거리는 나의 척추여
누가 시대의 건반을 잘못 눌렀는가
한꺼번에 울음을 터트리는 내 마디마디의 뼈
지령도 밀명도 더는 오지 않는 이 시대의
외로운 혁명군인 나는 지금 어디를 달리는 중인가
반추
처음엔 본능적으로 허우적거리다가 유연한 몸을 가져서야 사방으로 돋아나는 발들을 갖게 되었소 내 걸음걸이가 활달해졌다면 그즈음이겠지만, 문득 조심스러워진 것도 그 무렵이오 왠지 슬픔을 배달하는 밀사 같았기 때문이오 뒤져보면 꼬깃꼬깃하게 접힌 밀서 한 장 나올 것 같은, 나를 따르는 이야기들이 많아질수록 나는 흐려지거나 탁해지기 일쑤였으나 눈앞의 사고事故는 순간이어서 사고思考를 못 한다는 것이 비극이었소 돌멩이 하나에도 줄기가 달라지는 것이 나의 유약함이니 어쩌겠소 폭포는 말할 것도 없지 않소? 같은 장소를 두 번 뛰어내릴 수 없다는, 다시는 같은 고도에 아슬아슬하게 서 볼 수 없다는 절망을 절망하는 것이오 어떤 완력이 뒤에서 밀었는지, 아니면 밀렸는지, 그것도 아니면 스스로 뛰어내렸는지 천 길 벼랑에서 곤두박질치고서야 폭포는 기승전결이 뚜렷한, 준비된 클라이맥스임을 알게 되었소 더는 묻지 마시오 완성까지는 아직도 가야 하오 다시 흘러야겠소
모래인간들
지하도로 쏟아져 들어가는 군중 속에서 나도 한 알의 뜨거운 모래로 휩쓸렸다
목마른 사막을 뭉쳐 모래인간으로 만든 신이 사람의 도시로 보낸,
모래 알갱이 하나하나에는 고독이라는 유전자가 각기 다른 내력으로 숨어 있다
사막에 버려진 송장을 뜯으며 서럽던 개의 영혼이 숨어 있고 죽은 새끼의 무덤을 다독거리던 늙은 낙타의 울음소리가 스며 있고
그곳을 떠돌다 몰락한 바람의 냄새가 배어 있다
이러한 주재료로 지어진 사람들은 태생적인 갈증으로 오아시스를 찾아 헤매는 거다
그러다 광장에서 모래와 모래가 재회하면
사막처럼 뜨거워져서 폭풍한테 배운 노래를 폭풍처럼 불러 젖히는 거다
사막에서 온 줄조차 모르는
승객들 틈에 나는 한 알의 모래로 골똘하게 앉아 있었다
도시의 숨통을 묶었다 끌렀다 하면서
시간놀이를 즐기던 지하철이 멈출 때마다 승객들은 멱살이라도 잡힌 것처럼 끌려오거나 떠밀려 나갔다
모이면 흩어지는 것 또한 모래의 운명이니
그들은 어디로 가서 그날의 해변이 되거나 그날의 사막이 될 터였다
부탁
나는 어디에서 온 빗방울입니까
나뭇잎 발코니
허공이 조금은 막막하여
주저앉아
울었던 기억이 나는 듯도 합니다만,
어쩌자고 아직도
마르지 않고 태양을 견딘답니까
스스로를 깨뜨릴 수 없는
물방울을 위해
당신께서는 손가락을 빌려주십시오
닿는 순간 한 채의
눈물 누옥에 갇혀 있던 날개가
폐허를 털고
날아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시간이라는 새
그 새는 언제나 친절하지 않습니다
어제와 같은 노래를 부르지도 않고 내가 원하는 나뭇가지에 앉지도 않습니다
조금은 멋대로인 새는
석류가 주렁주렁 달린 그림 대신에 가시덩굴 빽빽한 숲에 알을 낳기도 합니다
어떤 새는 굵은 철사와
녹슨 나사를 물어 나르다 교회당 십자가에 깜장 꽃 한 송이를 피우기도 하고
깃털이 필요한 새는 구름을 뜯어오다가 구름구름 날려 먹습니다 문득 날아와
유리 조각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노래를 끄집어내는 새의 부리는 엉망으로 깨져 있습니다
꽃가루처럼 훌훌 노래를 뿌리는 새는 얼마 전에 부리를 갈아 끼운 새입니다
아무 데서나 불안해지는 버릇이 있는 새들은 바람 부는 전깃줄을 골라서 앉고
죽음에 호기심이 많은 새들은
황혼이 이글거리는 강물에 날개를 홀라당 태워먹기도 합니다
날아가는 것도 제멋대로여서
어떤 새는 홈런처럼 거침이 없고 어떤 새는 커브를 잔뜩 먹고 숲속으로
뚝
떨어지기도 합니다
삶의 굴절이 각기 다르므로 각각의 방향에 만족을 얻겠지만 그럼에도
떼로 몰려다니는 새들은 자신의 존재가 보잘것없음을 농담처럼 깨달은 새들입니다
선물처럼 좋은 시력과 저주처럼 나쁜 시력 사이에서
새의 하루는 화들짝 시작했다가 더듬더듬 저뭅니다
종種이 다른, 설명 불가의 새는 거꾸로 시계를 돌리기도 한다만
동쪽 아궁이에서 날아 나와
서쪽의 굴뚝으로 날아가는 것은 모든 날개에게 주어진 당연한 숙제입니다
-미국최대한인포털 뉴욕코리아, 문화부 John Kim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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