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고구려국본기>에는 을불이 태왕으로 즉위하기 전 도망 다니던 청년시절의 이야기는 상세히
적혀있으나, 즉위하고 난 이후 무려 19년간의 기록이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적혀있을 뿐이다. 그리고는 재위 20년(319) 진나라 평주자사
최비와 선비대선우 모용외와의 전투상황과
고구리와의 관계에 대해 장황하게 적혀있다.
“원년(300) 겨울 10월, 누런 안개가 사방에 끼었다. 11월, 바람이 서북에서 불어와 6일간이나 모래를
날리고 돌을 굴렸다. 12월,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 3년(302) 가을 9월, 임금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현토군을 공격해 8천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는 기록 이후 무려 9년간 기록이 빠져있다.
그리고는 “12년(311)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을 공격해 빼앗았다. 14년 겨울 10월,
낙랑군을 침공해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15년 봄 정월, 왕자 사유를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공하였다. 16년 봄 2월, 현토성을 쳤다. 적의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가을 (8월)에, 혜성이 동북방에 나타났다”라는 짧은 기록이 있을 뿐이다.
게다가 한중일 사학계는 위 미천태왕 3년 기록에서 보는 현토군, 12년의 요동, 14년의 낙랑군, 15년의
대방군 모두가 기원전 108년 한나라 무제가 한반도에 설치한 식민지 한사군이며, 그 식민지가 이 땅에 400년간 존속하다가 미천왕 때에
이르러서야 사라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그러한지 <고구리사초략>의 기록을 통해 상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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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간 한반도에 있었다는 한나라 식민지인 허구의 한사군도 <이미지=필자제공> 미천태왕은
즉위하자마자 원년 경신(300) 가을 9월에 창조리(倉助利)와 조불, 소우, 오맥남, 자, 선방, 방부, 재생, 담하, 송거, 장막사, 휴도 등
12명의 공신에게 각자 고향 땅의 제후로 봉하고 차등을 두어 노비를 하사했다. 이듬해 창조리를 태보, 우탁을 좌보, 을태후의 오빠 을로를 우보로
삼았다.
그리고 미천태왕은 돌아가신 아버지 돌고대왕을 평맥대제(平㹮大帝)로, 어머니 을후를 단림태후(檀林太后), 할머니
고씨를 태황태후, 을태후의 아버지 을보를 국태공(國太公)으로 올렸다고 적혀있다. 칭호만 봐도 고구리는 황제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봉상왕과 미천태왕을 모신 초씨
<삼국사기>에서는 “원년(300) 겨울 10월 누런 안개가 사방에 꽉 찼다. 11월 바람이 서북에서
불어와 모래를 날리고 돌을 굴리기를 엿새나 계속하였다. 12월,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라고만 간단히 적혀있을 뿐,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다.
그러나 <고구리사초략>에는 이러한 자연현상이 무엇을 말하는지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겨울 10월, 누런 안개가 사방을 가리자 태왕이 태사 우선에게 조언을 구했더니 “조짐이 후비
(后妃)에게 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모든 사람들은 12공신의 한 명인 재생이 봉상왕의 연(椽)
후를 겁박하고는 아내로 삼았기에 생긴 ‘재생의 안개’라고 여겼다.
11월, 서북풍이 크게 불어와서 모래가 날리고 돌들이 구르기를 엿새를 계속하니, 태왕이 밥먹기를 줄이고는 뭔가
잘못된 일이 있느냐고 물으니 창조리가 나서며 “먼저 반듯한 왕후(后)를 세우시고, 재생과 담하가 공을 믿고 권력을 휘두르지 못하게 하십시오”라고
간언했음에도 태왕은 그저 “예 예”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12월, 살별(혜성)이 동방에서 밝았기에 그 까닭을 태사 우선에게 물으니 “군신이 서로 싸울 조짐입니다”라고
아뢰어 상보(尙宝) 부자와 부협(芙莢) 형제를 풀어주었다. 상보는 초(草)씨의 아비이고, 부협은 부씨의 오빠이다. 그믐날 태왕은 석방된 상보를
좌보, 우탁을 서부대사자로 삼았다.
초씨와 부씨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미천태왕이 초씨를 황후로 삼으려 하자, 창조리가 간언하며 “초씨는 절개를 지키지 못했고 교태를 부려서 지난
임금(봉상왕)을 섬겼습니다. 절개를 잃은 여인을 황후로 세워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봉상왕의 애첩이자 미천태왕의 황후까지 될
뻔했던 초씨는 태자 시절 을불과 정분이 깊은 사이였으나, 봉상왕이 후궁으로 불러들여 소후로 삼자 이에 응한 여인이다.
그녀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태사 연봉이 봉상왕에게 “객성이 달을 범하면 외적들이 후비와 내통한다는
증좌입니다”라고 아뢰자, 그러자 옆에 있던 초씨가 화를 내며 “연봉이 우리를 이간질하려고 방자하게도 이런 거짓말하는 것입니다”라고 아뢰어 연봉을
귀양가게 만든다. 귀양길에 연봉이 우린이라는 자에게 “주상이 여색에 빠져 정국이 혼란스럽고, 충신들에게 의심을 내비치고 있소이다. 관망하다가
정변이 나면 그에 내응함이 좋을 것이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로 보아
아마 초씨의 행실이 좋지 못한 것으로 본다.
이러한 초씨의 아비가 좌보 상루의 아들인 상보이고 어미가 부씨였다. 부씨는 봉상왕 때 상보의 처였다가, 딸
초씨가 입궁한 후 그녀 역시 봉상왕 사이에 아들을 낳자 봉상왕이 부씨를 소후로 삼아 초씨 다음 서열로 하려 했다가 창조리가 말리자 그만두었다고
한다. 어머니와 딸이 동시에 봉상왕의 애첩이 된 경우이다.
부씨의 아비 부포는 딸로 인해 갑자기 귀하게 되어 남부대사자를 지냈고 벼슬이 우보(우의정)에까지 이르렀다.
부포가 독버섯을 먹고 죽자, 부씨 모녀를 끔찍히 사랑했던 봉상왕은 부포를 태공(太公)의 예로 장사지내려 하자 창조리가 말렸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듯이, 창조리는 황실의 이러한 문란한 행위를 무척 못마땅하게 여겼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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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김진명 고구려 캐릭터 일러스트 공모전 출품작 <사진=필자제공> 의로운 인물 창조리의 죽음
미천태왕 2년(301) 여름 4월, 초씨와 창씨 등이 태왕의 총애를 위해 다투면서 없는 말을 만들어
밖으로 퍼뜨리는 바람에 그 하녀들을 해빈(海濱=황하변)으로 유배 보냈다. 창(倉)씨는 창조리의 딸로 원래
12공신의 한 명인 오맥남의 처였는데, 오맥남의 집을 방문한 태왕의 사랑을 받아 후궁이 되는 여인이다. 창조리는 이를 무척 부끄럽게 여긴 것으로
본다.
태왕이 창씨의 어머니 오씨에게 ‘상부인’이라는 작위를 추증하고 무덤지기 열 명과 포구에 있는 산장을 주고,
창조리에게 식호 100가를 더해주자 창조리가 아뢰길 “신이 듣기로는 여색에 너그러운 이는 아랫사람들이 음란하게 되고, 무력에 너그러운 이는
아랫사람들이 죽이기를 즐기며, 임금과 신하가 같은 여인을 끼고 놀면 왕통이 어지러워진다고 하였습니다. 신의 딸에게 내리신 부인 작위와 신의 손자
충에게 내리신 태자의 호를 거두어주시기를 청하옵니다. 옛적에 진(陳) 영공이 신하 녕의와 함께 하희(夏姬)를 간음하여 사내아이 징서가 생겼는데,
녕의는 영공의 아들이라 하고 영공은 녕의의 아들이라 하여 징서가 화가 나서 영공을 죽였습니다. 지금은 비록 우스갯소리가 되었으나 이에
견주어보면, 신의 딸은 죄가 무겁고 신도 죄를 면하기 어려우니 식호・산장・포구를 거둬주시길 청하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태왕이 이르길 “충을 내 아들로 했지 맥남의 아들로 하지 않았소. 어찌 영공에 비교하시오. 지나친 걱정은
그만 하시오”라고 대답했다. 임금에게 목숨을 걸고 간언을 한 충직하고도 의로운 신하였던 창조리는 이러한 미천태왕의 태도에 실망한 것으로 보인다.
창조리는 사직을 위해 임금을 폐하고 새 임금을 세웠지만 늘 자신을 봉상왕에게는 죄인이라 했다는 기록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재생이 권력을 휘두름을 보고도 막을 수 없었기에 여러 번 꿈속에서 자신이 죽인 간신 원항을 보더니만 “아!
나도 쉬어야겠구나. 만사가 뜬구름인 것을, 소부(巢父)의 처신을 거듭 떠올리지 않은 것이 한스럽구나!”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이러했던 의인
창조리가 죽자 태왕은 그의 주검을 교외에서 맞이해 태공의 예로 장사지내려고 했으나, 부인 음씨가 그의 유지가 아니라고 하기에 판령(板岺)에 큰
예로 장사지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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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유가 더러운 귀 씻은 물을 소에게 먹이지 않은 소부 <이미지=필자제공> 참고로 소부에게는 이런
일화가 있다. 요임금이 허유에게 나라를 맡아달라고 전하자, 허유는 더러운 소리를 들었다고 근처 냇가로 가서 귀를 씻었다. 마침 옆에서 소를 몰고
냇물을 먹이려던 소부가 허유에게 “왜 귀를 씻느냐?”고 묻자, 허유는 “요임금이 나더러 자기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되라는군. 그런 더러운 소리를
들었기에 귀를 씻는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소부가 대답하길 “그 더러운 물을 내 소에게 먹이지 않겠다”하면서 소를 냇물 위로 끌고 갔다는
선비(隱士)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