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사년 정도 오래전에 처음으로 컴퓨터를 배운 후 글쓰기 연습겸 타자 연습겸 써본 글인데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생리적 질서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이미 태어날 때부터 짊어지고 가는 숙명과 같은 것으로서 순응하며 살아야지 역행하려 하면 오히려 마음의 고통만 가중된다. 어차피 순응하며 살아야할 운명이라면 담담히 받아 들어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라도 편한 것이다. 동양인들의 삶에서 강하게 나타나는 순응적인 태도는 이러한 운명에 대한 순응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으로 체념과는 다르다. 체념은 포기한다는 것이며 순응은 따른다는 것이다. 따라서 동양적 삶에서 강하게 나타나는 순응적 삶의 태도를 체념과 같은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서양적 삶에서 대삼(大三)대기(大氣)의 명에 따른다는 순응적 태도는 거의 없다고 본다. 그러니 죽는 날 까지 죽음과 싸우며 영생 영생하며 아직도 내 잔에는 몇 모금의 칵테일이 남아 있다고 핏대를 세우게 된다고 본다. 파티가 끝나면 말할 수 없는 허무함에 가슴이 쓰리면서도 겉으로는 큰 소리를 치며 어차피 한번 뿐인 인생 즐기며 살자 라는 식이 된다. 그것은 허무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동양인들은 처음부터 주어진 운명에 대해 담담하게 받아들일 려고 애쓰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 출발하는 삶의 방식과 운명과 싸우며 출발하는 삶의 방식은 크게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이런 차이가 자연을 정복대상으로 보는 서양식 시각과 정복대상이 아닌 더불어 가는 대상으로 보는 동양식 가치가 생겨나게 되었다고 본다.> 예를 들어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인 시한부 환자와 그렇지 못한 환자와의 차이 같은 것으로 시간적인 차이가 있을 뿐 그들과 일반인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결국은 모두가 죽음을 맞게 될 시한부 인생인 것을 그러므로 이런 차이에서 동양과 서양을 가르는 시각적 차이가 생겨난다고 보는데 동양인들은 대체로 죽음을 대비하는 마음으로 살기에 후회 없는 삶을 남기고자 애쓰게 된다. 또한 자연과 더불어 살고자 한다. 그러나 서양인들은 대체로 죽음을 거부하는 마음으로 살기에 후회 없는 삶을 남기고자 애쓰기 보다는 이름을 크게 남기거나 살아생전 해보고 싶은 것은 원 없이 해보자는 식이기에 죽음에 대한 준비를 잘 하지 못한다고 본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가며 죽음에 대한 공포가 밀려옴으로 그것을 잊고자 종교에 집착하거나 다른 무언가에 집착하고 열중하게 된다고 본다. 물론 현대사회에 들어오며 동서양을 칼처럼 잘라 말하기에는 무리라 보나 현대사회 이전까지의 경우는 대체로 그렇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자신의 문명이 출발할 때 가지고 있던 우주관의 작은 차이에서 시작해 그것이 지속적으로 쌓이면서 분화됨으로 생겨난 결과라 보는데 각 문화권 속에서 만들어진 영화 몇 편만 봐도 그 특색은 금방 들어 난다고 본다. 그중 가장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 현대문명으로 바뀌기 이전을 배경으로 한 헐리우드에서 만들어진 영화와 인도나 중국에서 만들어진 영화라 본다. 생명이 바라는 일차적인 것은 생리적인 안정이다. 그것은 대삼대기에 의해 주어진 수명과 건강이 일신각(△)을 중심으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생명이 가진 가장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욕구이다. 따라서 생명은 타고난 자신의 생리적 리듬이 외부충격에 의해 흐트러지거나 흔들리지 않는 평온한 상태를 유지할 때 아무런 갈등과 번민도 느끼지 않게 된다. 자연 속에서 인간이 휴식을 취하게 될 때 느끼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리적 리듬이 매우 안정되어 있어 하느님이나 그 외 여러 영혼(靈魂)적 존재들과 소통할 수 있는 최적의 상태가 된다. 그러나 생명은 이러한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가 없다. 이진수 체계로 돌아가는 현실은 여러 가지 형태로 생리적인 리듬을 흔드는 위협적인 상황을 만들어내게 된다. 그러한 위협 속에서 강한 충격을 받게 되면 생리적 리듬은 심하게 흔들리거나 흐트러짐으로 생명은 말로 다하기 힘든 극심한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그에 따라 영혼(靈魂)적 소통의 상태는 닫혀지게 되어 외부 문인 몸에 의지한 여섯 꼭지점에 집착하는 심리적 의식이 발동하게 되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채 오감에 의지한 의식적 욕망에 집착하게 된다고 본다. 그러한 집착이 만들어내는 허상들이 심미적 욕망들이며 물미적 탐욕들이며 사고적 대립이라 본다. 심미적으로는 미와 추 같은 것으로 나타나며 물미적으로는 재물과 권력 같은 것으로 나타나고 사고적으로는 흑백논리로 나타나게 된다고 본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게 무엇인지 모른 체 외부에서 그것을 찾고자 끊임없이 집착하게 됨으로 서로는 서로를 고통으로 몰아가게 된다고 본다. 인생의 끝자락에 가서야 왼지 잘 못 산거 같은 허망함을 느끼는 경우는 이런 이유 때문이라 본다. 인간의 일생이 전후라는 시간의 변화과정이라면 인간들의 다양한 양태들은 시간의 변화과정을 좌우로 펼쳐놓은 공간적 상태가 된다. 그러므로 자신의 일생 속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좌우에 펼쳐진 각가지 인간양태들의 경우의 수가 다 들어 있다는 것으로 여건만 주어지면 언제든 자신의 일생에서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을 늘 가지고 있기에 자신의 심리적 특성이 어떤 식으로 형성되어 있든 나도 그럴 수 있다는 타인에 대한 관대함과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 때에야 진정으로 타인을 볼 수 있고 그들이 나를 비추는 거울임을 서로가 깨닫게 되어 몸가짐이 조심스러워지고 겸손해지니 그 사이에 하느님의 의지가 들어나게 된다. 대학 중용편의 혈구지도란 이런 원리에서 나온 것으로 여섯 꼭지점 즉 전후(前後), 좌우(左右), 상하(上下)의 중앙에 나를 배치해 나를 둘러싼 타가 곧 나를 비추는 거울임을 깨달아 하느님의 의지를 갈고 닦으라는 소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중용(中庸)의 마음을 지닌 채 나를 비추는 타를 보고, 타에 비친 나를 보며 자신을 갈고 닦는 수신을 실천함으로서 온전한 일신의 자리인 부동심을 갖게 된다. 이러한 상태는 온갖 세상의 어려움 속에서도 스스로를 지키며 얻은 하느님의 의지임으로 수신의 완성태에 가까운 하느님의 장성한 자식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무진본( , 無盡本)은 어린 아기의 상태로서 앞으로의 험난한 인생의 여정을 거치며 순수성을 잃을 수도 있고 지킬 수도 있는 가능성상에 있는 불완전한 상태이나 부동본( , 不動本)은 그러한 여정을 거치면서 스스로의 순수성을 지키며 완성된 하느님의 장성한 자식이니 곧 성인이며 그리스도며 부처의 자리로서 공(工)적 완성의 상태가 된다. 이것은 개인의 수신의 형태로서 인문학이란 주제중 인간학에 속하며 다른 하나는 각개 구성원들의 영적의지가 삶을 통해 흔들리거나 길을 잃지 않도록 모든 수단을 동원해 도움을 주고자 형성된 것으로 이치학에 속하는데 정치와 과학으로 이해하면 되리라 본다. 이 글이 사회표면으로 떠올라 공론화 되었을 때 과연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나로서는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꽃송이를 받든 돌맹이를 받든 그것은 나중의 일로서 어떠한 대접을 받든 담담히 받아들일 것이다.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면 되는 것을 내 머릿골에 자리하신 하느님께서 그것을 원하고 계시니 이렇게 불쑥 사회표면으로 나서려고 하고 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동안 고민을 좀 했었다. 궂이 내가 이래야 하나? 현재 주어진 공동체의 팔쾌적 상태를 무시하고 너무 앞선 이상을 내세워 순차적 단계를 건너뛰는 급격한 변화는 잘못하면 극심한 사회적인 혼란이 올 수도 있기에 이제껏 알고 있던 상식들을 한꺼번에 흔들 수도 있는 내 생각을 풀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동안 고민을 했었다. 그에 대한 충격을 완화해주고 싶어 아주 가끔 내 생각을 어설프나마 정리해 이 사회에 전달해 주었다. 인연 따라 흘러가게 해주어 이 일을 누가 하게 되든 하느님의 의지가 온전하게 세상에 들어날 때 생길 충격을 완화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기를 놓치면 돌이키기 힘든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고 보기에 부족하지만 나 자신이 직접 나서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어쩌면 미친놈 취급을 받아 이 사회로부터 격리될 수도 있을 것이며 소리 없이 내 생이 끝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 나는 후회하지는 않는다. 나의 하느님이 이르시는 대로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노릇 한번 멋지게 해보고 가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나의 하느님께서는 이를 잘 알고 계시니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동안 이 일에 매달려 근 이십 년 가까이 가족들에게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나로서는 내 개인적인 소망은 이룰 수 없을지 몰라도 길을 말해준 이상 결국은 내가 말해준 방향으로 갈 수 밖에 달리 길이 없을 것이니 내 꿈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서로서로 공존하는 공생의 길을 찾지 못하는 한 얼마가지 않아 지구촌은 커다란 생존의 문제에 부딛쳐 자멸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생태계와 자연으로부터 공격을 받든 자원의 부족으로 고통을 받든 하느님의 소리를 외면한 과실은 모두를 파멸의 고통으로 내몰게 되리라 본다. 그대들이 아무리 자신의 가정과 나라를 아름답게 가꾸고 평화롭게 만들어도 다른 가정과 다른 나라의 환경이 악화되면 자식은 그에 물들 것이며 나라는 외부적인 충격에 흔들릴 것이다. 또한 생태계와 자연계는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어 국경은 인간에게나 통용되는 것이지 생태계와 자연계를 국경이라는 인위적인 잣대로 통제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오랜 세월 같이 공존하며 대응해오던 자연계와 인간의 관계는 지난 일세기 넘게 문명의 이기란 것으로 차단되어 왔고 그에 따라 동반된 환경의 악화라는 빠른 생태적 변화는 자연계와 인간의 공존이라는 질서의 균형에 조금씩 문제가 축척되기 시작했으며 그 조짐들이 근래에 나타나고 있는 여러 미생물들의 인간에 대한 공격들이다. 아니 공격이라기보다는 문명의 이기들에 의해 차단된 인간의 자체적 생리리듬의 항성력에 문제가 생김으로 인해 힘의 균형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현상이라 본다. 아직 까지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이는 것 같으나 이 힘의 균형이 어느 순간 무너지면 둑이 터지듯 겉잡을 수 없는 파국이 올 수도 있으니 지금부터라도 자연계와의 관계를 외곡 시키는 문명의 이기들에 너무 길들여져 자신의 생리적 리듬을 생태계와 자연계로부터 너무 차단시키지 말아야 하며 아울러 모든 생명들의 자체적 항성력을 높여주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말아 줄 것을 이 지면을 통해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내가 편하고자 문명의 이기들을 함부로 사용하며 자연계의 순환 고리를 파괴하게 되면 자연계는 보다 강력한 생리적 항성력을 갖춘 생명체들을 양산해내는 커다란 과학자의 실험실처럼 되어 그 속에 살고 있는 인간들 모두가 실험실 속의 모르모트 신세가 될 수 있음을 깊이 깨달아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나아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생명을 멸종시킬 수도 있는 우주적인 사건들과 커다란 자연재해들에 대한 대처에서는 거의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상태라 보기에 전 인류가 힘을 모아 거기에 대처해도 모자랄 판에 눈앞의 작은 이익에 연연해 대책 없는 소모전의 낭비를 줄여 전 지구촌적 차원에서 우주적인 사건들에 대한 대처와 갈수록 강도가 심해지는 자연재해의 해결에 인류가 서로 손을 잡고 논의해야 한다고 본다. 언제 닥칠지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위험 속에 갸냘픈 희망의 틈바구니에 끼여 있는 것이 인류의 현재 처지임을 돌아보고 희망의 불씨를 살리는데 지구촌의 사람들은 우선적으로 협력해야 한다고 본다. 혼(魂)은 지일의 하느님과의 수직적 통로이고 영(靈)은 천일의 하느님과의 수평적 통로이다. 혼(魂)은 차원의 문으로 인도하는 하느님의 사자이고 영(靈)은 현실의 세계를 움직이는 의식의 집합체이다. 살아생전 상생의 삶을 추구했던 사람은 그 정도에 따라 자신이 원하던 차원의 세계로 진입하게 될 것이며 살아생전 상극의 삶을 추구했던 사람은 그 정도에 따라 자신이 원하던 세계로 진입하게 될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다 속일 수는 있어도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일신의 하느님을 속일 수는 없는 것이니 결국은 그에 마땅한 보답을 받을 것이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이 하느님과의 교감을 통해 우주의 섭리를 깨치고 보니 천지를 분간하지 못하고 해매고 있는 철없는 어린양들과 뭇 중생들이 너무나 안타까워 성심껏 가르침을 배풀었 건만 위대한 스승들을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지금의 세태들은 그대들의 오만이 어디까지 갈건지 지켜보기가 민망할 정도다.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알량한 지식들을 가지고 이후로는 함부로 그분들을 폄하 시키지 말라. 교육은 태교에서부터 체계적으로 시켜야 만이 자연스러운 상생의 긍정적인 심리적 질서의 바탕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 사람의 처음출발은 백지와 같은 것으로 어떠한 심리적 그림을 그리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본다. 그러므로 부모와 주변사람들의 일상적 행동들이 만들어내는 정보들이 어떠한가에 따라 아기는 그 정보들을 재료로 활용해 자신의 심리적 질서의 밑그림을 그리게 된다고 본다. 따라서 태교에서 소년기에 이르기까지는 한 인간의 기초적인 심리적 질서의 밑그림이 희미하게나마 윤곽이 그려지는 매우 중요한 시기로서 부모와 주변사람들의 역할은 거의 절대적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라고 본다. <한 가정의 기본적인 의식주는 해결이 되어야만 다음 세대에 대한 교육이 원활해 질 수 있다. 그에 따라 사회적인 미래 인적자원의 자질을 높일 수 있게 되어 범죄 예방과 사회적 통합의 근원적인 해결방법이 되어 막대한 미래 인적자원의 낭비를 미리 막을 수 있다고 본다. 이 문제는 밝은이들이 힘을 모아 그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좋으리라 본다.> 이 시기를 거치고 소년기와 성년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부모와 사회적인 환경에 따라 희미하던 윤곽이 분명하게 들어나고 덧칠이 되어가는 상태로서 상극과 상생의 심리적 정보들이 색칠이 되어가며 그림의 형태가 들어난다. 그러나 아무래도 상생의 심리적 그림에 무개중심이 더 많이 기울어지는 상태가 된다. 그러나 사회에 진출을 하면서 상극과 상생의 정보들이 뚜렷하게 겹쳐지게 되는데 상생의 정보들을 많이 경험하면 상생의 심리적 질서들이 그려내는 그림에 무게중심이 기울어지게 되며 상극의 정보들을 많이 경험하게 되면 상극의 심리적 질서들이 그려내는 그림에 무게중심이 기울어지게 된다. <이 시기에 가장 심한 심리적 갈등을 겪게 된다고 본다.> 그러고 나서 이십대 중반쯤에서 삼십대 초반사이에 거의 완성된 그림이 그려져 나머지 인생의 대부분의 삶의 방식들을 만들어내게 된다고 본다. 그러므로 태아에서 성년에 이르기까지는 한 인간의 심리적인 기초적 그림이 그려지고 완성되는 시기로서 이 시기에 어떤 부모와 어떤 주변사람들을 만났느냐에 따라 <사회적인 환경 포함> 상생과 상극의 그림이 결정되는 매우 중요한 시기로서 부모와 주변사람들 그리고 사회적인 환경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인간성이라는 것은 부모와 주변사람들과의 일상적 교류를 통해서 길러지는 것이지 학교라는 곳에서 얻는 지식의 유무와는 크게 상관이 없다고 본다. 옛날과 달리 지금의 학교란 단순히 살아가는데 있어 필요한 논리적인 지식을 위주로 운영되는 것으로서 경험을 통한 직관적 이성을 배우는 곳이 아니라고 본다. 특히 입시위주의 교육은 이런 환경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교육은 일상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어른들의 역할은 거의 절대적인 것으로 한 아이를 짐승으로 만들 수도 있고 사람으로 만들 수도 있는 칼자루를 쥐고 있기에 일상적 생활 속에서 상생의 긍정적인 행동양태를 보여주지는 못할망정 어른으로서의 추한 모습은 보이지 말아야 한다. 나이만 처먹었다고 다 어른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기나 치고 싸움질이나 하는 교활하기 그지없는 상스런 행동 하나하나에서 아이들에게 짐승이 되는 길을 가르쳐주는 산 교과서가 됨을 어른들은 깊이 명심해야 한다고 본다. 표현의 자유나 행동의 자유는 절제된 자유이고 절제된 행동을 통해서이지 아무 곳에서나 시도 때도 없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최소한 다음세대의 인성교육에 악 영향을 미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표현의 자유이고 행동의 자유인 것이다. 물론 성년들끼리 있을 때는 서로가 이해할 수 있다면 어떻게 표현하고 행동해도 크게 상관은 없으나 최소한 성년의 나이 이전까지의 아이들이 있는 장소만큼은 피해야 한다고 본다. <육체적인 성숙만 보고 성인으로 판단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내가 보건데 지금의 아이들 수준으로는 스물다섯 이하는 보편적으로 아이로 본다.> 공동체의 성년들 모두가 아이들을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애써야하는 스승들이며 그러한 아이들의 재능을 학교를 통해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본다. 인간은 없고 재능만 잔뜩 키워서 어쩌자는 것인가? 인간성이 결여된 지식은 짐승에게 흉기를 쥐어준 꼴이라는 사실을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따라서 지식위주의 교육으로 국가경쟁력을 키우려는 지구촌 각 국가들의 교육시스템은 문제가 있다는 것으로 인성교육을 학교에서도 중요시해야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어른들 모두가 힘을 기우려야 한다고 본다., 그렇게 함으로서 미래사회를 이끌어갈 인간성이 잘 갖추어진 인재들의 잠재적 역량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본다. 지금의 세태 속에서 크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이 나라와 지구촌의 미래가 걱정이 된다.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을 본떠 만든 소우주로서 하느님의 자식이되 아직은 완전해지지 못한 불완전한 자식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완성되어야만 하는 필연을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자식들이다. 따라서 지금의 인간역사를 인생으로 치면 막 청년기를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는 것으로 이 청년기를 잘 넘겨야 원숙한 어른으로 거듭날 수 있고 자연계안의 모든 생명들을 잘 키우고 거둘 수 있는 부모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하느님을 대신해 생명을 보살펴주던 태양신명과 일월성신께서는 이제 그 역할을 인간에게 직접 맡기고자 하는 것이다. 자신의 품을 벗어나 스스로 독립할 수 있는 자립을 원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오랜 세월 진화를 통해 길러진 무한 경쟁의 상극적인 기운들로 이루어지는 심리적 질서들을 순화시킬 필요가 생기게 되었는데 언제까지 응석만 부릴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은 청년기의 티를 벗고 어른으로서 원숙한 지경에 이르러야하니 그 거듭나는 과정에 필요한 것이 하느님의 의지적 리듬인 감성(感性)과 육성(育性)과 덕성(德性)이다. 곧 진명, 진정, 진성을 말하는 것이니 감성은 밝고 따뜻함으로 싫어하고 좋아함의 선입견이 없는 아기와 같은 눈으로 있는 그대로의 사람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말하며 육성은 사람에 따라 차별하지 않는 몸가짐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며 덕성은 자신과 타를 미루어 짐작하고 이해하며 용서하고 사랑할 줄 아는 지혜를 말한다. 따라서 원숙한 어른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상생의 심리적 질서를 갖춘 어른으로 성장해야만 하니 그 성장과정은 필히 고통과 어려움을 동반하게 된다. 지금의 인간역사 또한 그 성장기의 한 과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고비를 잘 넘긴다면 인류의 역사는 원숙하고 화려한 장년의 역사를 열 수 있게 되니 지구촌의 사람들은 이를 깨닫고 새로운 시대를 열기위해 다 같이 손을 잡고 노력해야 한다. 아직은 자신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치기어린 청년들의 손에 과학이라는 칼자루를 쥐어주게 되니 그 칼로 자신도 죽고 남도 죽을 수밖에 없는 최악의 상황이 올까 하느님과 천지신명님들께서는 지금도 노심초사하고 계신 것이다. 이제껏 잘 길러온 자식들이 완전히 독립하고 성숙해져 인생의 황금기를 누리지 못한다면 얼마나 애달프시겠는가? 철모르고 마냥 즐겁던 유년기와 청년기는 이제 끝나가고 있음을 지구촌의 사람들은 깊이 깨달아야 하리라 본다. 인간의 등장 이후 이제껏 진화의 방식을 주도해 오던 상극의 원리가 상생의 창조적 기운으로 바뀌어 질 준비를 하게 되었는데 인간의 역사를 상극의 원리가 주도하는 투쟁의 역사로 보기 쉬우나 그것은 창조적인 화합의 역사로 가기위한 과도기에 해당했던 것으로 이제 그 과도기가 정리되려는 시점에 왔다고 본다. <마야력도 이와 연관이 있다고 본다.> 따라서 남성성이라는 분열의 상극적 기운이 역사를 주도해오며 생명의 삶을 구속하던, 외부 공간력에 대한 대응력을 높여와 이제는 전 지구적 차원으로 키우게 됨으로서 정보의 수용과 표출이 지구적 차원으로 공유되는 시대로 접어들게 만들었다고 본다. 그러므로 남성성의 역할은 어느 정도 완료된 시기임으로 이제는 여성성에 의한 창조의 상생적 기운이 인간의 역사를 끌어가며 서로를 통합시키게 만드는 내부 시간력의 확보를 통해 서로 어울리는 어울림의 미학을 만들어 내는 역사시대로 진입하게 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앞으로는 이러한 순리를 따르지 못하는 개인이나 집단은 점점 지구촌에서 따돌림을 당하게 되어 변방으로 차츰 밀려날 것이라 본다. 이것은 엄연한 역사의 진리로서 우주의 진리는 역사와 종교와 과학을 아우르지 않는 한 제대로 볼 수가 없다고 본다. 어느 한 가지 만으로 우주의 진리를 재려 한다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재어보는 것과 같다고 본다. 심리적인 욕구란 생리적 리듬을 근본으로 하여 살아오면서 겪게 되는 체험을 통해 형성되는 욕구를 말하는데 기본적으로 무진본이라는 생리적 리듬을 근본으로 하여 분화되는 욕망들이라 본다. 따라서 참으로 다양한 형태의 심리적 욕구를 지닌 인간형들이 나타나게 되지만 에너지의 성질은 같은 것으로서 심미적 물미적 두 가지 생리적인 욕구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본다. ㅡ<철의 단계에 접어든 사람은 일단 제외 한다.>ㅡ 그러므로 수용의 상태에서 나타나는 좋음과 싫음, 귀함과 천함, 같은 심미적 가치관과 표출의 상태에서 나타나는 잘난 자와 못난 자와 같은 물미적 가치관이 형성되게 되는데 이런 가치관들은 그것이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든 한 인간에게 있어 그 결과들은 모두가 진실이다. 아니면 모두가 거짓이던가? 왜냐하면 그가 그런 가치관을 만들어 온 배경에는 그가 살아오면서 체험한 구체적인 사회적 정보들이 있기 때문이다. 즉 자라온 환경적 요인에 따라 한 인간의 가치관은 조금씩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게 됨으로 그가 그런 가치관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나름의 정당한 이유인 과거의 사회적 배경에서 얻었던 정보가 그에게는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체적 집단속에서 생겨나는 모든 인간형들에 대한 결과들은 그 집단속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공동의 작품인 셈이다. 그게 선으로 비치든 악으로 비치든 그 결과는 서로의 책임인 것이다. 따라서 너는 너고 나는 나라는 이기적인 등식은 성립할 수가 없는 철없는 생각이다. 공동체 속에 나타나는 모든 인간형들의 결과들은 그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삼각적인 역학관계로 서로 부대끼며 만들어낸 합작품들로서 그것이 좋게 느껴지던 나쁘게 느껴지던 그런 인간형들을 만들어내는 사회적인 환경적 요인을 만들어내는데 직간접적으로 알게 모르게 지금도 모두는 관여되어 있음으로 어느 누구든 자유로울 수는 없다. 따라서 지금 이 사회를 점점 삭막한 쪽으로 몰아가는 개인주의란 이런 인연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시한 철딱서니 없는 발상이라 본다. 집단이 없는데 개인이 무슨 수로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의 창출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며 개인이 없는데 무슨 수로 집단이 유지되고 집단적 이익의 창출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개인의 자유가 소중하다면 서로가 만들어낸 집단의 권리 또한 소중한 것으로 개인의 자유가 소중한 만큼 공동체의 화합과 지속 가능한 번영을 위해 공동체가 개인에게 구성원으로서 요구하는 권리 또한 소중한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권리만을 주장한다거나 집단의 권리만을 요구하는 것은 모순이라 본다. 결국 모든 번뇌를 만들어내는 것도 너와 나이고 번뇌를 없애는 것도 너와 나일 수밖에 없다. 지금의 현실에서처럼 도 아니면 모식의 자신의 삶만 도모할 수밖에 없는 무한 경쟁이라는 극단적 생존방식 속에서는 영원히 없앨 수 없는 너와 내가 만들어내는 고통의 없인 것이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왜 어른들을 신뢰하고 존경하지 못하게 되었는지 아는가? 그것은 가정을 통해 어울림의 상생적 아름다움을 보고 배우며 자라 왔는데 막상 이 사회 속에 첫 발을 내 디뎠을 때 자신이 배워온 정보들과는 상반되는 정보들을 대하며 받게 되는 마음의 충격 때문이다. 부모와 형제자매들로부터 배워온 상생의 심리적 정보 질서가 막상 이 사회 속에서는 그게 아닌 상극의 심리적 정보 질서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것을 경험하며 받게 되는 마음의 충격 때문으로 부모들을 통해 알고 있던 어른들에 대한 신뢰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실망 때문임을 기성세대인 우리는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기성세대들이 아무리 그것을 가리고 치장하며 젊은이들의 입을 막고 설득하려 해봤자 직관적으로 이미 그 논리에 대한 거부반응을 그들은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기성세대들에 대한 존경심이 생겨 날 리가 없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분화되었다 하나 가정적인 분위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역사 이래 가장 노골적으로 계층과 나이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는 대규모의 상극적인 사회분위기는 더욱 젊은이들의 어른에 대한 존경심이 생겨나지 못하게 하는 주된 요인이 되고 있다고 본다. 다 자업자득인 것으로 젊은이들을 나무랄 일이 아니다. 그들은 이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거울에 비친 그 모습에 지금 기성세대들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고 있는 것이다. 가정을 통해 차라리 어울림의 상생적 정보를 가르치지나 말지 인간성이 통용되기 힘든 사회분위기 속에서 젊은이들에게 인간적인 삶과 존경을 바란다는 자체가 모순인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충격을 겪으며 젊은 시절을 무척이나 방황 했었다. 나는 나의 부모님과 이웃으로부터 보고 배운 어울림의 아름다움을 잊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이건 아니라는 느낌은 오는데 무어라 말을 할 수는 없고 아무도 나에게 그것을 제대로 말해주지 않았다. 쓸데없는 소리라고 세상이 다 그런 거라는 이해하기 힘든 핀잔만 들었었다. 그렇다면 내가 그 원인을 찾아보자. 그 결과가 어떤 식으로 내 인생을 바꾸게 돼든 후회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그 세월이 쌓여 이제 삼십년 가까이 되었고 그 결과가 이 글이라고 보면 된다. 아직은 먼 길이기는 하나 이 글에 대한 옳고 그름은 그대들이 내려주길 바란다. 영원한 내 마음의 등불이신 그분들의 무언의 가르침대로 그렇게 살 것이다. 그대들의 부모님 또한 그대들에게는 가장 위대하신 살아계신 하느님이심을 잊지 마시오, 그대들을 위해서라면 세상의 온갖 치욕과 굴욕도 마다하지 않는 그런 하느님이심을 잊지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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