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오늘의 동양학이 외곡되어 있다면?
|자유소통광장 돌둘 | 조회 87 |추천 1 |2012.06.17. 13:49
http://cafe.daum.net/mookto/GbHv/8145 내가 보기에는 일주일이 만들어지게
되는 단서를 나타내고 있는 기록이 한단고기에 나타나는 칠회제신력이라고 본다.
천부경이 동양사상의 뿌리라 본다면 오늘날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음양오행, 팔쾌, 역, 주역등과 같은 것은 천부경의 우주론에서 파생된 학문체계로 보아도 크게 무리가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이를 인정한다면 오늘날 전해진 동양사상을 액면 그대로 수용하기 이전에 당연하게 가져야 하는 의문이 지금의 동양학이 과연 조금의 왜곡도 없이
천부경의 우주론을 제대로 반영해 세워져 있는가 하는 질문이라 본다.
앞글에서도 여러번 강조 했지만 고대한국학의 핵심을 담고 있는 동양학의
근본 뿌리이자 몸통인 천부경의 우주론과 은문이 이렇게 까지 심하게 왜곡되어 전해지고 있는데 그에서 파생된 오늘날의 동양학이라고 왜곡 없이
온전하게 전해졌다고 믿는 것은 너무 순진한 발상이 아닐까 싶다.
<오랜 옛적부터 시작된 역사왜곡에 대한 것을 상기해
보라.>
이 사람의 판단으로는 핵심이 모두 빠져버려 현실계와 연계성이 너무 떨어지고 있다고 본다.
고대한국학의 핵심은
하느님이다.
모든 우주 삼라만상의 변화의 핵심에는 일신(一神)의 하나님이 있다는 핵심개념이 빠져버린 동양사상은 껍데기라고
본다.
예를 들어 앞글에서 일주일이 만들어지는 근거를 설명했는데 일,월(日,月) 즉 지구와 달이 지일신(地一神)으로 부모에 해당한다면
화,수,목,금,토는 그 자식에 해당하는 생태계와 생명이라 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쓰인 오행의 원리에서 5토는 시간운동을 주도하는
혼(魂)의 하나님을 의미하고 10토는 공간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영(靈)의 하나님을 의미하게 된다고 본다.
이는 천부경의 문장중에
나타나는 일묘연 만왕만래의 구절과 연계되어 있는 것으로 태양일신과 지구일신과 달일신인 삼신(三神)의 주도하에 생명의 변화가 일어나니 태양일신은
영(靈)의 하나님에 해당하고 지구와 달 일신은 혼(魂)의 하나님에 해당한다.
<이는 태양계에 적용했을 때의
논리이다.>
따라서 수직적인 시간운동으로 나타나는 생명의 혼(婚)은 자웅으로 나타남으로 둘이 되고 수평적인 공간운동으로 나타나는
생명의 영(靈)은 자연계의 순환 고리로 나타나는 서로에 의한 연기적인 결과임으로 하나가 된다.
이는 천일일, 지일이, 인일삼의 문장과
연계되는 것으로 생명의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는 중심이 영(靈)과 혼(魂)의 하나님이기에 오행의 중심 5토와 10토는 곧 생명의 변화를 이끌고
있는 영혼(靈魂)의 하나님을 의미하게 된다.
그러므로 일묘연에 쓰인 일(一)은 생명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영혼의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본다.
따라서 오행의 중앙 토(土)는 당연히 인일신의 하나님이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생명을 포함한 별, 태양계
등등의 모든 땅으로 나타나는 존재의 변화의 중심은 일신의 하나님이기에 이는 하늘 즉 영(0)이라는 본체의 분화로서 일로 시작하는 땅의 중심은
크고 작음을 떠나 모두 일신의 하나님으로 고대한국인들은 이해 했다고 본다.
따라서 숫자 영(0)으로 나타낼 수 있는 본체인 하늘과 숫자
일 즉 하나로 나타낼 수 있는 본체의 분화인 땅에 대한 명확한 개념적 구분이 필요함을 여러 번 강조 했지만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이 된다.
즉 하늘과 천지인(天地人)의 개념은 고대한국학에서는 분명하게 다른 것으로서 하늘은 본체이고 천지인은 본체의 분화인
땅임으로 천부경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 우리말 하늘과 땅임을 꼭 기억해 주기를 바래본다.
다시 말해 물질적인 형태로 나타난
천지인이라는 땅은 아무리 그 크기가 작든 크든 모두 본체의 분화인 땅의 개념이라는 것으로 ----원자, 별, 태양계, 은하계------ 등등은
하늘이 아니라 천지인이라는 땅의 개념임을 잘 이해해 주기를 바라며 바둑판의 설계원리와 원방각(?,□,△)의 개념적 적용이라는 앞글을 다시한번
상기해 주기를 부탁드린다.
사람은 태양천( )과 윤회천( )이 만들어내는 일방적인 수용적 정보들에 대해 나름으로 대응하는
자체적인 생물학적 생리(生理)의 방어체계를 갖고 있는데 세포라는 방(□)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생리적인 흐름과 몸이라는 원(○)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생리적인 흐름이 있다.
이러한 생물학적 생리의 질서 체계 속에 나타나는 두 가지 욕구가 있는데 하나는 유전자의 공간적 이동이라는
세포차원에서 일어나는 시간운동의 대물림의 욕구와 몸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공간운동의 신진대사에 의해 생겨나는 에너지 보충 즉 먹는다는 욕구가
생겨나게 되는데 이 두 가지 기본적인 욕구는 생명이라면 거부할 수 없는 필수적인 욕구로서 인간 또한 예외일 수 없다.
따라서 생명에게
있어 그것은 거부하기 힘든 숙명과 같은 것으로 부정적인 것으로 보아서는 안되리라 본다.
대물림을 통한 정보의 이동을 통해 시간운동의
연장을 꾀하며 인간과 같은 존재를 만들어내자면 성적인 욕구는 당연한 요소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며 에너지의 보충을 통해 신진대사의 원활함을
유지하며 쉼 없는 수평적인 정보의 창출과 수용을 통해 역사를 만들어내자면 먹는다는 욕구 또한 당연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성욕과 먹는다는
욕구는 생명으로서는 당연한 것으로 하느님의 의지를 실현하기위해 생명이 스스로 선택한 방법이라고 본다.
또한 생명은 쌍방적인 수평적 경쟁의
원리를 통해 역사라는 환경의 변화를 만들어내게 됨으로 보다 많은 정보창출과 보다 많은 정보수용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후대 또한 잘 길러내어야 만이 정보의 전달이 확실해짐으로 선택한 것이 역할 분담이라 본다.
즉 한꺼번에 두 가지 일을 다 해내기에는 힘이
든다는 것으로 남성성과 여성성으로 몸을 나누어 역할 분담을 통해 보다 빨리 역사의 중심에 서려고 했던 열망이 두 개의 성별로 나타났다고
본다.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의 사람을 만들어내려는 과정이었다고 본다.>
따라서 남성성은 후대의 양육이라는 대물림의
분담보다는 보다 적극적으로 경쟁에 개입해 좀 더 많은 정보를 만들어내는데 무게중심을 두었던 것이며 여성성은 적극적인 정보발산과 수집보다는 안전한
대물림을 통해 정보의 전달이 확실하게 이어질 수 있도록 양육이라는 시간력에 더 무게중심을 둔 생명의 선택이라고 본다.
따라서 공간력에
치중하는 남성성과 시간력에 치중하는 여성성은 그 본질 자체가 다르며 생리(生理) 시스탬의 변화 또한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본다.
그러므로
남성성이든 여성성이든 역사의 중심에 서려고 경쟁하던 생명체들이 스스로 몸을 나누어 둘로서 역할분담을 하고자 했던 고육지책으로 남성우위니
여성우위니 하는 소리들은 쓸데없는 말장난일 뿐 둘이 결합해야만 하나가 될 수 있음으로 남성성과 여성성이 서로에게 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본다.
인간사의 영원한 주제 같은 남녀간의 사랑도 이로 인한 것이다.
<사랑을 시작하면 자신의 반쪽으로 상대를 판단하지
마라.
그것이 불행의 시작인 것이니 모자라는 반쪽을 서로가 채워줌으로서 결혼은 완성되는 것이다.
사랑을 시작한 남녀들은 이
말을 꼭 명심해 주기를 바란다.>
다만 하나가 둘로 갈라진 시기가 너무나 아득 하기에 서로는 하나에서 갈라진 반쪽임을 잘 모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성은 후대의 포육을 위해 알, 체내수태, 등등과 같은 각가지 방식으로 수태에서 시작해 성체가 될 때 까지 가장
유리한 포육의 질적인 확대를 꾀했다고 볼 수 있으며 남성성은 정보의 양적확대를 높이는 쪽으로 나타나 후대의 생존경쟁의 우위를 확보하려는 쪽으로
나타났다 본다.
이것은 수평적인 관계로서 남여간의 문제는 공간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부모자식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천륜이라는
시간의 문제로서 부모가 과거이고 내가 지금이고 자식이 미래가 되는 것이니 부모자식 간에는 끊어지기 힘든 천륜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니 앞선
사람은 공경을 받아야 하고 뒤에선 사람은 사랑을 받아야하는 인륜의 근본이 되니 나라의 근간이 효이고 자식에 대한 사랑이 곧 부모의 마음이 되니
효가 지극하면 나라가 바로서고 사랑이 지극하면 나라 안의 모든 자식들이 내 자식과 같음으로 어른으로서 수신에 힘쓰게 된다.
서구
자본주의의 물결 속에 천륜(天倫)의 근간이 흔들리며 모든 인륜(人倫)이 땅에 떨어져 어지러운 혼돈의 인간세를 만들어내고 있으니 이것이 말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각자의 생명이 다양함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 다양함이 있기까지 거쳐 온 앞서간 생명들이 만들어온 심미적,
물미적, 분별적(사고), 편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편견이 쌓이고 쌓여 나무가 되고 코끼리가 되고 꽃이 되고 새가 되고 하는
등등의 다양한 생태적인 양태와 삶의 방식들을 만들어내게 된다고 본다.
그것은 앞서간 생명의 단계들이 여기, 이곳. 지금을 통해 선택한
심미적, 물미적, 사고적인 정보들이 쌓이며 만들어낸 유전정보의 특색과 삶의 방식 때문으로 어떠한 양태로 나타나든 어떠한 삶의 방식으로 나타나든
그것은 모두가 참이며 진실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다양한 자연의 생명들과 그들의 삶의 방식들을 보며 거짓과 진실을 따지지 않는다.
모두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인간계에 존재할 수 있는 진실의 종류 또한 자연계와 마찬가지로 무한이며
나름으로는 아름다울 수 있음을 자연은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양태는 진실이고 너의 양태는 틀렸다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너의 삶은 틀렸고 나의 삶은 옳다는 등식 또한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의 문명은 그러한 진실을 몇 개의
확률 모형으로 억지로 규정지으려 한다.
<인종주의, 민족주의, 미의 기준, 행동방식, 삶의 가치 등등>
모든 생명은
다 나름으로의 존재함과 삶의 이유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데도 인간적인 양태와 삶의 방식들을 몇 개의 확률모형으로 억지로 규정지으려 한다는
것은 곧 대다수의 생명들이 보여주는 진실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소수의 몇 종만을 선택해 그들의 양태와 삶의 방식들만이 진실이고 나머지 생명들은
거짓이며 허깨비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본다.
따라서 그 소수의 확률모형 속에 속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나머지 진실은 무시되고
소외된다.
그러므로 한 사회가 요구하는 아니면 맞추어진 규격에 맞지 않으면 매력 없고 쓸모없는 것으로 취급되는 수모를 당하게 되고 한
사회가 요구하는 삶의 방식에 선택되지 못하면 그 나머지는 무시되거나 버려지게 되며 심하면 격리되거나 추방당하게 된다.
이것은 공동체적인
삶을 통해 서로간의 삶의 수단 즉 공존의 수단이 점점 정밀도가 높아져 감으로 에너지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하는 것이지 타고난 개인적인 양태와
개인적인 삶의 가치까지 그런 쪽으로 몰아가는 사회적인 분위기는 너무나 곤란하고 편협한 불합리한 태도라 본다.
인간존재원리의 그림에서도
보이듯 이 현실에 나타날 수 있는 진실의 종류는 무한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원구의 표피를 이루고 있는 점들 하나하나가 곧 이 현실에
나타날 수 있는 진실의 종류이고 참이기 때문이다.
마치 다양한 생명들이 원구의 점처럼 각가지 양태로 나타나고 나름의 삶의 방식들을
만들어내며 자연계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모두는 나름의 역할이 있으며 그러므로 자연이라는 원구는 성립한다.
따라서 몇 종만을 선택해 그들의
양태와 삶의 방식들이 참이고 나머지는 거짓이라는 논리는 자연의 일부가 자연이라는 전체를 무시하는 것과 같은 모순을 저지르는 것과 같게 된다.
인간사회 또한 마찬가지로서 인종적, 민족적, 양태와 문화적인 양태들 중 어느 한 부분만이 진실이고 나머지는 거짓이라는 논리들은 분명
문제가 있는 논리이다.
이것은 부분이 전체를 무시하는 궤변으로 미우나 고우나 다른 부분이 존재하기에 자신의 부분 또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철저히 무시한 극단적인 태도라 본다.
각자의 양태는 모두 참이며 아름다울 수 있으며 각자의 삶의 방식 또한 모두가 참이 될 수도
있음으로 타인을 해치는 공공성이 결여된 삶의 방식 이외에는 어느 개성이든지 어느 삶의 방식이든지 무시되고 소외되어서는 한울의 지상천국을 만들어낼
수 없다.
서로를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다투게 되고 서로가 협력해 집단적인 에너지의 효율성을 높이며 삶의 질을 높이는 쪽으로 가지
않으면 인간사회라는 한울은 이지러지게 됨으로 끝없는 혼돈상태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진다고 본다.
그러므로 이 현실을 온전한 낙원으로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서로의 개성을 존중해 주어야하며 서로를 위해 협동해야 만이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게 된다.
각자의 머릿골 속에
일신각의 자리가 있음을 깨닫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수신을 하며 감성과 육성과 덕성을 고루 갖춘 성통광명(聖統光明)의 인간으로 거듭나야하며 서로가
협력해 피와 땀을 흘리며 지상천국을 만들기 위한 제세이화(濟世梨花)의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실천해야 만이 그 가운데에 하느님이 임하시니 이
지상은 하느님이 주제하는 지상천국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고대 선조들께서 얼마나 깊이 이 우주의 철리를 꿰뚤고 있었으며 그러한 밝은
이치를 바탕으로 이 지상을 천국으로 만들고자 노력했는지 조금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 분들은 이상주의자가 아니었다.
가장
현명하고 지혜로운 현실주의자들이었던 것이다.
댓글 5 | 손님댓글 0 추천하기 1 역학자 12.06.17. 22:11 한글에서
작성한 글 그대로 복사 처리 했네요
바탕 화면에 일반 텍스트 새로 만들기 해서 그곳에 글 옮겨서 그 텍스트에 있는 글을 웹 화면에서
붙여 넣으세요 그럼 저런 줄 간력이 없어집니다
신고 호두까기 12.06.18. 01:06 어디서 읽었던 삼극의학에 대한 글이
생각나는군요.
그리고 수직적인 혼과 수평적인 영에서는 카발라 이론이 생각나고. 다만 여성인 제 입장에선 남녀에 대한 정의가 기존의
보수적인 종교나 사상에 의존하신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들의 정서에 관한 연구에서 아버지쪽이 어머니쪽 만큼은 아니더라도 많은
시간을 할애해 돌볼경우 그렇지 않은경우보다 건강한 정서로 자라난다는군요.
결국 양육과 사회활동, 양쪽에서 성별의 균형이 맞을수록 건강한
사회가 된다는 것이겟지요.
조심스레 의견 올리며, 앞으로도 건필 부탁드립니다
신고 돌둘 12.06.18. 06:18 역학자님
읽기가 불편했겠네요.
미쳐 거기까지는 생각을 하지 못했네요
미안합니다.
신고 돌둘 12.06.18. 06:42
호두까기님 잘 지네시나요.
자연계에 일어나는 보편적인 생명 현상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인간이 짐승이 아닌 것은 오랜
진화과정에서 길러진 본능적인 유전적 충동을. 제어하고 바꿀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인간문명의 환경적인 변화가
획기적으로 일어난 20세기 후반을 지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흐르며 그 이전까지는 찾아볼 수 없었던 삶의 양태는 적어도. 표면적인
역할분담에서 만큼은 그 구분이 모호해지는 형태로 변화되었읍니다.
인간을 포함한 생명은 환경에 적응해 살아갑니다.
만약 남녀의
역할이 바뀌어 지는게 유리한 삶의 환경이 된다면 인간을 포함한 생명은 언제라도 그것을 수용하게 될 수밖에
신고 돌둘 12.06.18.
06:55 없을 겁니다.
개인적인 심리적 주관이전에 생리적인 혼의 하느님은 본능적으로 이를 수용하게끔 유도할겁니다.
겉으로
보기에 심리적인 주관이 생리를 앞서는 것처럼 보이나 크게보면 생리가 심리를 앞섭니다.
이제까지의 환경적요인에 맞추어 유리한 쪽으로 역할
분담을 해왔을 뿐입니다.
만약 남녀의 역할 분담이 필요없는 환경이 된다면 먼 훝날에는 자웅동체의 인간이 나타날지도
모르지요.
남녀의 성별에 대한 차별의 말이 아니니 오해는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