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식 동양학으로 고대한국학이나 훈민정음을 대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재려는 것과 같은 무모한 짓이라고 본다. 오늘날 형성된 한국학이라 주장하는 모든 논리들이 거의가 껍데기만 한국학이지 알맹이는 고대한국학과는 거리가 먼 차이나식 동양학이나 서양학으로 채워져 있다고 보기에 고대한국학이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본다. 몇 천 년 전의 한국학은 그렇다 쳐도 불과 몇 백 년 전에 만들어진 훈민정음이 만들어지는 원리조차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주된 이유가 자신의 정신은 모두 잃어버리고 남의 정신을 빌려와 내가 누구인지를 분석하며 그것이 나인 양 착각하고 있는 지금의 한국학의 현실 때문이라 본다. ㅡ<우리의 정체성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는 시발점이 세종이후부터라 본다.>ㅡ 물론 그 동안 한국학을 연구하는 많은 분들이 우리의 정신을 찾아내고 복원하려고 쏟아 부은 순수한 열정과 땀의 무게만큼은 이 사람도 높이 산다. 그러나 그러한 열정이 제대로 된 결과물을 낳았다면 좋았을 것이나 남의 정신을 빌려와 그것이 나를 재는 잣대인 줄 알고 나를 분석하려고 하다 보니 오히려 나를 더 이해하지 못하게 만드는 암초와 같은 방해물을 만들었음을 꿈에서라도 알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본다. 지난 세월을 없는 사람인 양 술과 노동일로 세월을 낚아왔던 주된 이유도 너무나 완고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나서봤자 본전도 찾지 못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 마디 꺼내어 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과거의 경험으로 수없이 당해 보았기에 아직은 나설 때가 아니다 싶어 입을 닫은 채 오랜 시간을 세월만 낚아 왔었다. 그러나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다는 판단이 들었기에 펜을 들었던 것이고 너무 오랫동안 신경을 쓰지 못했던 탓인지 머릿속이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아 한 동안 헤매는 와중에 쓴 글들이 인터넷에 올 린 글들이다. 이제는 머릿속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는 판단이 들었기에 길게는 수 천 년 짧게는 수 백 년에 걸쳐 이 사회에 짙게 드리워진 학문적 편견의 철벽을 무너트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일까 하는 고민을 했었고 그 방법 중의 하나가 우리말이 만들어지는 원리와 한자가 만들어지는 원리를 밝혀보는 일이다 싶어 본격적으로 소리 없는 전쟁을 시작한 것이 이 사람의 글이라고 보면 된다. 지금은 나 홀로의 전쟁을 시작했지만 시간이 흐르면 이 사람의 손을 들어 줄 우군이 많이 생길 것이라 믿는다. 결론적으로 고대한국학은 어떤 방식으로든 영(靈)과 혼(魂)을 일치시켜 하느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종교가 있든 없든 지식이 있든 없든 재물과 권력이 있든 없든 그런 것은 그 다음의 문제임을 가르침의 핵심으로 담고 있는데 도(道)의 길은 규격화된 정답이 없다는 것으로 오직 자신의 마음자리에 달렸을 뿐이니 스스로를 돌아보아 마음에 걸림이 없는 삶을 살아왔다면 그가 곧 하느님의 진리를 실천해온 진정한 도인이라고 가르친다. 이러한 철학적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이 우리말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므로 일방적인 진리의 잣대로 바라보는 시각은 진정한 도(道)의 길이 아니며 누구든 성자가 된 청소부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온 자가 진정한 도인이고 종교인임을 여러 가지 학문적 논리를 동원해 가르친 것이 고대한국학이라 보면 된다. 이러하니 지나온 역사 속에서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고대한국학을 용납하기 힘들었다는 것으로 예를 든다면 훈민정음이 만들어질 당시 고대한국학의 이념을 가진 정치적 리더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세종대왕과 유교적 이념을 내 세웠던 사대부들간의 첨예한 대립이 그 한 예라고 본다. 그러한 상징적인 사건 중의 하나가 장영실로 대표되는 인재 등용의 기준으로 누구든 귀천을 떠나 능력 있는 인재면 출세할 수 있다는 세종대왕의 국가운영 노선은 고대한국학의 정신과 상통하고 있고 ㅡ<고구려의 인재등용 방식과도 일치하고 있다고 본다.>ㅡ아니다 날 때부터 귀천은 이미 하늘이 정해준 것으로 한 번 상놈은 영원히 상놈이고 한 번 양반은 영원히 양반이니 출세는 하늘이 정해준 양반이라는 우리들만 대대손손 해 먹을 수 있다는 유교의 정신과도 거리가 먼 변질된 유교적 이념을 내세워 백성들이야 죽든 말든 국가의 백 년 대계야 어찌되든 말든 인재등용의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해 버린 사대부들의 폐쇄적인 정치 이념이 첨예하게 부딪치던 상징적인 사건 중의 하나가 장영실과 관련된 세종과 사대부들간의 대립이었다고 보며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과도 깊게 연관이 된다고 본다. 따라서 표면적으로는 권력과 관련된 정치적 대립이었지만 실제적으로는 고대한국학과 사대부들에 의해 변질된 사이비 유교와의 이념적 대립이 물밑에서 첨예하게 부딪치고 있었던 격랑기가 세종대왕의 제위 기간이었다고 본다. 불행하게도 세종이후 고대한국학은 유교적 이념에 밀려 완전히 불온서적으로 분류되어 역사의 표면에서 사라지게 되었다고 보는데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이 연구했던 학문들은 왕실서고에 소장되어 있던 고대한국학 관련 서적들로 훈민정음은 이를 바탕으로 새롭게 재정비해 창제해 내었다고 본다. 이는 훈민정음이 고대한국학의 핵심적인 정신을 담고 있는 은문천부경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사실이 충분히 입증하고 있다고 본다. 어쩌면 고대한국학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훈민정음이 만들어지는 원리를 기록한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남긴 서적이 있었을지도 모르나 세종대왕 이후 사대부들의 압박에 밀려 인위적으로 고대한국학과 관련된 서적들과 함께 사장되었을 수도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이와 관련시켜 이씨 조선의 정치적 흐름을 분석해 보는 것도 필요할 것이라 보며 나아가 오늘날 한국사회에 짙게 드리워진 여러 가지 부정적인 요소들이 생겨난 근본적인 원인과도 연계시켜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