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넋두리를 좀 늘어 놓겠습니다. 적에 비해 아군의 군세가 엄청나게 열세일 때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방법은 기습작전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봅니다. 저 또한 기습작전의 효율성을 잘 알기에 고대한국학에 관한 글을 조용히 준비 했다가 적의 뒤통수를 치듯이 느닷없이 이 사회에 발표를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생각을 하였으나 일부이기는 하나 인터넷에 글을 공개하는 이유는 미우나 고우나 한국학과 관련된 모든 분들이 저와 같은 길을 걸어가는 분들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스스로 자중지란을 일으킬 수는 없기에 이런 시각도 있다는 것을 알려 미리 준비를 할 시간적 여유를 주어야 할 것 같아 부족하나마 이 사람의 생각을 인터넷에 올렸던 것입니다. 부디 건방진 소리라고 오해는 하지 마시고 한국학의 미래를 걱정하는 이름 없는 야인의 충심이 담긴 생각이라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엊그제 술자리에서 만난 친구 놈이 그랬지요. 자신도 가끔씩 인터넷으로 이 사람의 글도 읽어보고 올라오는 댓글도 보나 왜 영양가 없는 짓을 하고 있느냐. 그럴 시간에 글이나 좀 더 쓰고 준비되면 책으로 내지 그럽디다. 만약 서양인들 중 누군가가 이 사람과 똑같은 글을 써서 인터넷에 올렸다면 저에게 보이는 반응과 같은 반응을 보였을까요? 누가 글을 썼든 글의 내용을 먼저 보아야 하는 것이 순서이고 그 내용을 기존의 학문적 논리와 비교해 보며 어느 것이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는데 더 유용한지를 살펴보고 버릴지 아닐지를 결정하는 것이 상식적인 일이 아닐까요? 김덕수 사물놀이패를 국내에서는 천한 광대 짓이라고 비하시켜 보고 있을 때 유럽인들은 그 가치를 알아보고 열광적인 기립박수로 그들을 환영했습니다. 그제서야 한국인들은 마지못해 사물을 음악의 한 장르로 인정했습니다. 지금도 상황은 비슷하다 보는데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은연중에 국악과 관련된 악기들은 천하게 보고 서양음악과 관련된 피아노나 바이올린 같은 악기들은 귀하게 보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상식적인 선입견은 서양학과 한국학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은연중에 적용되고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서양철학은 높게 보고 우리의 삼일철학은 낮게 보는 것인데 플라톤이나 아리스토 텔래스로부터 출발한 서양철학사는 끊임없는 대립과 긴장을 조장하는 철학의 아류일 뿐이라고 봅니다. 그들의 철학에는 성통공완으로 요약되는 화해와 용서의 논리가 너무 부족합니다. 그들의 철학적 바탕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성경을 보아도 투쟁이나 복수 같은 부정적인 단어들로 넘쳐납니다. 그들이 말하는 사랑은 우리가 말하는 사랑과는 다릅니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내 편만 사랑하고 나머지는 투쟁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그들의 사랑논리입니다. 생각이 다르다고 기독교에 시비를 건 것도 아닌데 가만히 있는 단군상의 목을 치는 기독교의 형태를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지 않나요? 따라서 그런 부정적인 대립의 철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서양철학을 따지지도 묻지도 않고 선진국인 서양인들의 철학이라고 무턱대고 철학의 주류로 보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맺어진 가정에서도 서로를 따뜻하게 품어주지는 못할망정 자신과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거나 생각이 다르다고 인간성은 제쳐두고 죽을죄를 지은 죄인 취급하듯 원수처럼 냉대하는 형태는 유독 기독교 계통과 관련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주변에서 흔하게 보지 않나요? 가족의 평화를 위해 마지못해 교회에 나가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내 동료들을 보며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쳤건만 서양철학의 주류와 기독교는 철저하게 그와는 반대의 길을 걸어온 것이 그들의 역사입니다. 서양문명의 호전성에 오죽했으면 원수를 사랑하라고 예수께서 가르쳤겠어요. 효자 효녀가 흔하디흔한 사회라면 효자 효녀상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청렴결백한 공무원이 흔하디흔한 사회라면 청백리상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상식화된 사회이니까요. 그와 마찬가지로 싸우지 않고 더불어 살 줄 아는 사람들이 흔하디흔한 사회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도 생겨날 필요가 없지요. 역설적으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무성한 사회일수록 원수질 일이 많이 생겨나는 혼란스런 사회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이미 서양인들 특히 독일인의 신망을 받은 하이데거 같은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철학적 한계를 수 십 년 전에 깊이 인식하고 우리말 하늘을 의미하는 무(無)나 공(空)사상의 동양철학에 눈을 돌렸는데 우리는 그들이 버린 서양철학의 막연한 환상에 아직도 매달려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요? 얼마 전에 중요 동서철학을 소개한 강신주씨의 “철학 대 철학”이라는 책을 읽어본바 이를 더욱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서양문명의 화려함 속에 감추어진 서양철학의 맹점을 조목조목 따져 보면 서양철학이 가진 한계는 분명하게 들어날 것이라 저는 봅니다. 얼마 전에 천부경의 우주론을 바탕으로 전개한 “다윈 진화론의 한계”라는 글을 올렸을 때 글을 읽어보고 다윈 진화론이 가진 맹점을 파악해내는 사람이 적어도 한 둘은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을 보고 상당한 실망을 했습니다. 최소한 그것이 사실이라면 세계 생물학계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수도 있는 새로운 학설일 수도 있다는 인식하에 과연 그런가 하는 확인의 질문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 한국학을 하는 사람의 입장이 아닐까요? 이 사람의 귀에는 서양학이 과학적이라는 맹신을 심어준 기둥들 중 몇 개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데 여러분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나요? 제가 너무 앞서가는 건가요? 까놓고 이야기해서 상당수의 한국인들조차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천대받고 외면되고 있는 지금의 암울한 한국학의 처지를 회원님들은 잘 아실 것이라 봅니다. 이러한 한국학의 현재 입지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들이라면 어쩌면 지금의 한국학의 암담한 현실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며 세계학문의 주류로 발돋움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입증할 수도 있는 희망의 소리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는 심정으로 이 사람의 주장을 최소한 확인이라도 해 보는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따라서 회원님들이 올리는 한국학과 관련된 글자하나 틀리지 않는 똑 같은 내용의 글이라도 일반인들의 시각에서는 한국학의 과학성과 합리성이 입증되는 상태에서 대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대하는 것에는 회원님들의 한국학을 사랑하는 열정에 상관없이 엄청난 무게 중심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한국학의 일차적인 진짜 적은 차이나나 일본이 아닙니다. 지금의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서양학에 대한 우리아이들과 일반인들에게 무조건적인 과학적 맹신을 심어준 그놈이 진짜 적입니다. 그러므로 한국학을 살리는 가장 기본적인 작업이 서양학이 감히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세계인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한국학의 과학성과 합리성을 확보하는 길임을 꼭 아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