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1) 나는 누구인가?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요소는 생리(生理)적인 무의식적 의지인 오감(五感)의 집합체인 혼(魂)의 의지도 아니고 영(靈)의 정신이 작용하는 제 육각인 심리(心理)적인 의식(議識)으로 기억의 총합인 생각이다.
생각은 자신이 살아오며 경험한 기억의 총합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데 혼(魂)의 정신이 주도하고 있는 생리적인 무의식적 의지인 오감(五感)의 본능마저 지배하며 작게는 자신의 삶과 크게는 인류의 삶마저 지배하게 된다.
ㅡ<각종 종교에서 다루는 선악(善惡)의 가름은 그것을 어떤 식으로 표현하고 있든 영(靈)의 정신이 만들어내는 심리(心理)와 관련된 주제라 보면 되는데 예를 들면 선령(善靈)이나 악령(惡靈)같은 표현들이 이에 속한다고 본다.>ㅡ
따라서 생각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개인적 삶과 인류의 삶은 결정된다.
예를 들면 오감(五感)을 통해 이루어지는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생리적인 개인적 취향과 의식적으로 나타나는 심리적인 생각의 가치들을 통해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나에게 타에게 인식되어 있는 나라는 존재가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충격을 받아 기억을 상실하게 되면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생리적인 개인적 취향도 바뀌게 되고 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심리적인 생각의 가치들도 바뀌어져 버리는데 기억상실 환자들의 경우를 보면 이런 점은 잘 들어난다고 본다.
드라마나 영화에도 이런 상황들을 설정해 이야기를 풀어가는 경우가 있는데 예쁘고 재주꾼인 “한 예슬” 씨가 연기한 드라마에서 기억상실에 걸려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인 몸빼 바지에 게걸스럽게 짜장면을 먹는 장면은 가히 압권이라 본다.
그렇다면 기억을 잃기 전에 있던 나와 기억을 잃은 후에 남은 나 중 어느 쪽이 진짜 나일까?
불가에서 말하는 오각과 육각 이후에 이루어지는 칠식, 팔식, 구식 들은 육각인 나를 비운 후에 이루어지는 의식 즉 심리적인 영(靈)적 정신의 차원적 성숙의 경지를 구분하는 말이 된다.
따라서 한 국가의 번영과 평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국가의 지도층이 최소한 칠각의 경지에 접어든 인물들이 이끌어가야만 작게는 국가의 번영과 국민들의 평화가 이루어지고 크게는 지구촌 인류의 번영과 평화의 공존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칠각 이상의 경지에 접어든 밝은 철인(哲人)들이 이끌어가는 인류사회가 아니고는 인류의 번영과 평화는 없다고 보면 된다.
이런 이상적인 국가가 인류사에 수 천 년 간 존재했으니 신시배달국과 고조선으로 그 남은 흔적이 천부경, 삼일신고 등의 경전과 고도의 과학적 원리가 집대성되어 만들어진 우리말과 우리글이라 본다.
가끔식은 나라고 규정된 나를 내려놓자
"나를 죽이라"느니 "너를 버리라"느니 하는 소리들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차라리 가끔식은 나라고 규정되는 외부적인 껍질들을 내려놓고 맨몸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돌아보거나 아예 잊어버리는 것이 개인의 정신건강에 훨씬 좋다고 생각한다.
누구누구 엄마, 누구누구 아빠, 직업, 재물, 명예, 권력 등등 나를 둘러싼 껍질들에 의해 나는 규정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것이 나라고 착각하기 쉬우나 나와 너라고 규정되는 껍질들은 너와 내가 살기 위해 만들어낸 생존의 방법들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부정한다는 것은 전쟁터에서 무장해제를 하고 맨몸으로 돌격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생존경쟁관계에 있는 일반인들로서는 도저히 실천하기 힘든 말이 "나를 죽이라"는 소리라 본다.
그것보다는 나와 너라고 규정되는 껍질들을 가끔식은 잊어버리고 무언가에 심취하거나 내려놓고 내가 누구인가를 물어보는 것이 개인의 정신건강에 훨씬 도움이 되어 건강한 일생을 누릴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일상을 벗어나 자연과의 어울림은 얼마나 즐거운가? 거기에 나라고 규정되는 무엇은 없다.
나라고 규정되는 껍질을 벗어던지고 가만히 자신을 돌아보면 많은 깨달음이 오게 된다.
거기에 나라고 규정되는 무엇은 없다.
그러므로 나라고 규정되는 껍질들은 생존을 위해 획득해온 서로에 의해 만들어진 삶의 방식들일 뿐 개인적인 경험상 가끔식은 무거운 짐을 내려 놓아보는 것이 자신의 정신세계를 보다 건강하게 해주고 삶의 긍정성과 활력을 주는 약이 된다고 생각한다.
뉴스에 나오는 사건사고들 중 상당수는 자신이라 규정짓던 껍질들이 무너지면서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다고 보는데 자신을 내려놓아보는 연습이 너무 부족해서 자신이라 규정되는 껍질이 깨어지는 순간 자신은 없다고 생각하니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고 본다.
자신의 겉껍질에 너무 집착한 불행한 결과라 본다.
2)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란 무엇일까?"에 대한 설명에 앞서 "천부경"과 "삼일신고"에 나타나는 우주관을 바탕으로 우리 고대 선조들께서 생각한 신관과 우주창조의 논리를 살펴봄으로 고대 선조들의 신(神)과 인간(人間)에 대한 관계의 인식을 한 번 짚어볼까 한다.
1, 본체의 하느님이 숨겨진 하늘로부터 들어난 하늘을 창조하였다.
-[ 빅뱅을 통해 생겨난 하늘<태초(太初), 무(無)> ]-
2, 그 후 하느님은 천일(天一), 지일(地一)의 영혼(靈魂)의 하나님으로 정신(精神)을 나누어 창조된 하늘을 재료로 천지(天地)를 창조하였다.
-< 일시무시일과 일종무종일, 말씀, 별과 별들의 사회 >-
3, 그 후 천일, 지일의 하나님이 결합해 인일(人一)의 하나님으로 나타났고 태양천(天)과 지구천(天)이라는 천지(天地)를 재료로 인계(人界)인 생태천(天)을 창조하였다.
-< 분자와 대기를 극으로 이루어져 오행(五行)체계로 돌아가는 만물이 몸담고 있는 집 >-
4, 그 후 인일의 하나님은 천일, 지일의 하나님이 다스리는 천지( 天地)의 기(氣)적 변화의 섭리를 따라 생태계의 변화를 주도하는 한편 만물의 개별적 영혼(靈魂)으로 나뉘어져 인계(人界)인 생태계를 재료로 만물의 창조와 소멸, 모임과 흩어짐의 시공간 운동을 통해 만물의 대물림활동과 먹이활동을 주도하고 있다. -<일묘연 만왕만래 용변 부동본, 생명과 자연계의 시공간적 진화 >-
이러한 구조는 표현양식만 다를 뿐 현대 물리학이 밝혀낸 우주탄생의 과정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아니 더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논리는 문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문자배치도로도 나타나는데 1, 2, 3 은 은문천부경에 대각선 엑스(X)의 문자배치도로 압축해 나타내고 있고 4는 수직수평(+)의 문자배치도로 압축해 나타내고 있다고 본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신(神)과 인간의 관계를 부모와 자식의 관계처럼 설정하고 있다는 것으로 본체(本體)인 하느님과 하늘로 부터 천일(天一, 지일(地一), 인일(人)의 삼신하나님과 천지인(天地人)의 삼계(三界)가 갈라져 나왔다고 했으니 "신(神)=인간(人間)"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된다.
다만 만물 중 인간만이 온전한 하나님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타고 났으나 아직은 성년식을 치르지 못한 어린아이와 같기에 하나님의 온전한 길을 걸을 수 있는 어른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으로 그 기준을 "삼일신고" 인물 편에서는 "선(善), 청(靑), 후(厚)' 즉 이성(理成)이라는 인간학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감성(感成)과 육성(育成)과 덕성(德成)을 고루 갖춘 이성(理成)이 충만한 사람을 하나님과 동격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이성(理成)이 빈약한 상태를 "악(惡), 탁(濁), 박(薄)"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자신밖에 몰라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는 마음 상태를 "악(惡)"으로 육체적인 타락을 "탁(濁)"으로 사고적인 경박함을 "박(薄)"으로 나타내고 있다.
우리말에 "후(厚)한 사람이다" "박(薄)한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후한 사람이란 하나님의 길을 걸을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뜻이고 박한 사람이란 천지(天地)를 분간 못하고 자기위주의 짐승의 길을 걷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만들어진 말이라 본다.
그러므로 이성(理成)이 충만한 사람에게는 어떤 형식도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이를 불가(佛家)에서는 사사무애의 경지라 하고 유가(儒家)에서는 군자의 길이라 하고 도가(道家)에서는 도의 길이라 하고 기독계열에서는 그리스도의 길이라 표현하고 있다고 본다.
즉 인간학이 몸에 배여 있는 이성이 충만한 사람에게는 어떤 형식도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형식은 오히려 거추장스런 짐일 뿐이다.
형식이란 인간이 집단생활을 함에 어리석은 사람들로 인해 집단의 평화가 깨어지고 분란이 일어나는 것을 막고 이성적 인간들을 길러 내고자 지성(知成)이 잘 갖추어진 지혜로운 이들이 만들어낸 이치학적 결과물로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이 이에 해당하게 되는데 종교는 인문과학에 속하는 형식의 한 갈래로 보면 된다.
그러므로 이치학(理治)의 결과물들은 인간들이 이성(理成)적 인간으로 완성되어 하나님의 길을 -< 성통광명, 홍익인간 >ㅡ 걸을 수 있도록 앞서간 지혜로운 이들이 만들어낸 보조수단 즉 형식들이라는 것으로 이치(理治)학의 궁극적 목표는 모든 인류의 보편적 행복을 위해 쓰이도록 만들어내는 것으로 곧 지성의 완성이 된다.
그러나 아직은 설익은 열매에 해당하는 것이 지금의 인간(人間)학과 이치(理治)학적 결과물들로 인류가 아직은 이성(理成)과 지성(智成)의 완성이 되어있지 않기에 설익은 열매에 섞인 독성을 제거하고 완전히 숙성된 열매로 만들어내어야 하는 과제가 지금의 우리 인류의 눈앞에 놓여 있다고 본다.
따라서 우리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으로 고대한국학은 철저하게 이러한 여기, 이곳, 지금이라는 현실논리에 기반을 두고 세워진 학문체계라는 것이다.
즉 아무리 우주가 광활하다 해도 내가 위치한 천지(天地)라는 여기는 태양계이니 태양계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현실 밖의 세계다.
그리고 태양계라는 천지(天地)의 위치가 정해져도 내가 살고 있는 곳은 태양계 속의 지구에 있는 생태천이라는 이곳이니 이곳을 떠나서 무슨 진리를 논할 것인가?
그리고 현실적인 여기와 이곳의 위치와 장소가 정해졌다 해도 지금이 중요한 것이지 지금을 떠난 과거와 미래는 공허할 뿐이다.
따라서 여기, 이곳, 지금에 초점이 맞추어진 현실을 바탕으로 진리를 논해야 하는 것이지 이를 떠난 진리라는 논리들은 공허한 공수표일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특히 종교적 형태에서 이런 점이 강하게 나타나는데 이성(理成)적 인간이 되라는 가르침을 먼저 베풀어야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내일 일을 들먹이며 인간을 협박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열심히 잘 살아가고 있는 후손들에게 집안 어른이라고 나타나 몇 대조 할아버지가 숨겨둔 유산이 너희 대에 나타나 너희들을 부자로 만들어줄 것이니
"내 말만 믿어라!'
"믿음이 약하면 유산을 나누어 받지 못할 수도 있으니 무조건 믿음을 가지고 나를 따라라!"
유산이 나타나면 다행이겠지만 나타나지 않으면 후손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과 그동안 역사 속에서 자행된 종교적 협박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종교는 이치학의 세 갈래 중 인문과학에 속한다고 말했는데 인문과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이 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자 만들어진 앞서간 사람들의 지혜의 산물이자 어떤 형식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종교에 대한 이해에 들어가야 만 종교가 무엇인지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가능해 진다고 본다.
즉 종교란 모든 인간이 살아있는 하나님이 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자 만들어진 인문과학의 한 형태로 사회과학이 주로 집단적인 쓰임과 관련된 것이라면 인문과학은 주로 개별적 쓰임과 관련된 것으로 각 개인들이 현실에서 느끼는 좌절과 허무, 공포, 절망 등등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부정적인 생리적, 심리적 상태를 완화시키고 개인적인 생리적, 심리적 안정을 도모하여 삶에 대한 긍정적인 희망과 위로와 활력과 용기와 같은 삶의 의지를 갖게 하기위해 만들어진 도구라고 보면 되기에 선조들의 종교관을 살펴보며 종교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앞에서 말한 대로 종교는 인문과학의 한 갈래로 모든 인간이 삼신하나님의 자식이니 너 또한 그렇게 될 수 있기에 삼신하나님과 같은 완전한 하나님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 일신강충 >- 그런 다음 너의 신성(神聖)함을 알았다면 그 신성이 너의 온 몸에 충만하도록 감성과 육성과 덕성을 길러 이성(理成)적 인간으로 거듭나라는 가르침을 전해주고 ㅡ< 수신을 통한 성통광명, 성령이 충만한 상태, 득도, 깨달음의 상태 >ㅡ 그 깨우침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길을 걷는 이성(理成)적 인간이 되어 -< 홍익인간, 사사무애 >ㅡ 인문과학과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창조하고 올바르게 인간세에 쓰일 수 있도록 이치(理治)학을 완성시켜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어라. -< 제세이화, 지상천국 >-
하는 것이 선조들의 종교적 가르침이라 본다.
그러므로 선조들의 종교적 가르침은 한 마디로 송아지가 크면 소가 되듯이 너 또한 완성된 신(神)이 될 수 있으니 개인적으로는 인간학을 통해 지일(地一)의 하나님과 같은 완성된 혼(魂)의 하나님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집단적으로는 서로가 힘을 합쳐 이치학을 통해 지상천국을 만들어내는 천일(天一)의 하나님과 같은 영(靈)의 하나님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것으로 이보다 명쾌한 종교적 가르침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선조들께서는 위로는 조상님과 더 위로는 삼신(三神)의 하나님과 더 위로는 본체(本體)의 하느님이 있었기에 오늘의 너와 내가 있을 수 있다는 내가 생겨난 근본(根本)에 대한 깊은 감사함을 간직하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이 현실을 떠나서 신(神)을 찾은 것이 아니다.
이 현실 속에서 개별적으로는 인간학을 통해ㅡ<수신(修身), 종교>ㅡ 너와 내가 하나님으로 완성되어야 신(神)의 은혜로움에 보답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집단적으로는 이치학을 통해ㅡ<치국(治國), 과학>ㅡ 서로가 손을 잡고 이 현실을 지상천국으로 만들어야 신(神)의 은혜로움에 보답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 그분들이 만들어 내었던 고대의 우리국가가 어떤 형태였을지 상상이 갈 것이라 본다.
-< 고조선, 배달국 등 >ㅡ
하이데거나 타고르 같은 분들이 이 점을 알았기에 우리 고대사에 관심을 가졌던 게 아닐까?
아울러 구약성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군대가 실제 있었던 고대의 사건을 각색해 기록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으로 그 실체를 우리 고대사에 나타나는 천지화랑이나 조의, 수사, 화랑 등과 연계시켜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설명을 잘 했는지 알 수 없으나 고대한국학에 기반을 둔 인문학에 대한 기본적인 뜻만 제대로 전달이 된다면 사회전반적인 분야에 대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라 보며 특히 종교적 형태들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서로 손을 잡고 함께 가지 않으면 안 되는 분위기로 바뀔 것이라 나는 판단한다.
그러므로 한국이 세계사의 중심으로 진입하려면 가장 기본적인 토대가 인간이니 고대한국학에 기반을 둔 새로운 인문학의 이해를 통해 구성원들의 근본적인 인식의 변화가 동반되어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어떠한 개혁도 성공하기 힘이 들 것이라 나는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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