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하는 밝은이라면 기본적으로 두 가지를 알아야 하는데 하나는 수직적인 시간적 근본으로 오늘의 내가 생리적으로 여기 있기까지 존재할 수 있음은 모두가 근본으로 부터 비롯되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근본은 위로는 부모님이고 더 위로는 조상님이고 더 위로는 인일의 하나님이고 더 위로는 천일, 지일의 하나님이고 마지막 근본은 본체의 하느님이니 그러한 크나큰 은혜를 알고 근본에 감사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로 자신의 몸을 귀하게 여기며 지금 내 눈앞에 살아계신 부모님에게 먼저 효도하는 것이 삼신의 하나님과 본체의 하느님에 대한 감사함과 공경함의 첫 시작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철학하는 밝은이의 지혜이다. ㅡ<그렇게 하지 못한 불효자식이 나이기에 다른 분들은 나처럼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ㅡ 그러므로 타 또한 거슬러 가면 모두가 한 뿌리로 부터 갈라져 나온 귀한 존재들이기에 어찌 서로를 존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수평적인 공간적 어울림으로 지금 내가 삶을 영위하며 심리적인 나의 의지로 살아갈 수 있음은 작게는 같이 공동체를 꾸려가는 이웃이 있기 때문이고 크게는 역사라는 사회적 환경을 만들어내며 축척시켜온 앞서간 사람들이 만들어낸 문명적 틀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맡은 역할을 묵묵히 해주는 이웃이 있기에 공동체는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유지될 수 있는 것으로 미우나 고우나 운명을 같이 하기에 공동체라는 집단적 힘의 유지가 가능하고 그렇기에 타 집단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아 각각의 개인적인 삶을 영유할 수 있는 것으로 그것을 알고 서로에 대한 감사함과 고마움을 가지는 것이 철학하는 밝은이의 지혜이고 아울러 앞서간 선조들의 얼이 축척되어 있는 나라라는 역사적 얼의 터전이 만들어져 있기에 그 뿌리를 바탕으로 모두의 의지가 힘을 얻게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철학하는 밝은이의 지혜가 된다. 나를 둘러싼 이웃과 사회지도층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과 잣대도 이제는 좀 더 현명하고 신중한 철학적 잣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잣대가 나는 삼일철학이라 본다. 우리말 바른손과 왼손이라는 말에 담긴 고대사의 비밀 고대한국인들은 오른쪽을 바른쪽으로 왼쪽을 바른쪽이 아닌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고 보는데 무엇을 근거로 그런 개념적인 이해가 생겨났는지 궁금해지리라 본다. 지금도 이런 흔적은 우리말에 더러 남아 있다고 보는데 바르다는 의미를 붙여 오른손을 바른손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 그 예라 본다. 이 사람이 기억하기에도35년 전 쯤에는 이 말이 일상적인 생활언어로 흔히 쓰이고 있었다고 보는데 오죽했으면 당시 담임선생님이셨던 분이 아이들이 일상적으로 양손을 가리켜 바른손 왼손이라고 쓰니까 국어 순화차원에서 오른손 왼손이 표준어니까 앞으로는 바른손 대신 오른손을 써야한다고 신신당부하며 아이들에게 몇 번이나 주의를 주며 교육을 시켰겠는가? 지금은 바른손이라는 말 대신 거의가 오른손이라고 쓰고 있다고 보나 35년 전 쯤에는 바른손이 일상적인 언어였던 것으로 나는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또한 농은유품 속의 천부경의 서술방식도 오른쪽에서 시작해 왼쪽으로 가고 있고 밝을 명( )자에서도 한문의 형태와는 달리 지구를 의미하는 날일( )자를 오른쪽에 배치한 것과 밝을 양( )의 문자에서 해를 의미하는 ( )자를 오른쪽에 배치한 것은 지정학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오른쪽을 왼쪽보다 더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고대한국인들의 유난스런 특색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고 본다. ㅡ<태양( )을 의미하는 문자아래에 일신(一神)을 의미하는 육(ㅜ)이라는 숫자를 결합해 쓰고 있음에 주목하기를 바라며 유태인들의 고대 문서도 오른쪽에서 시작해 외쪽으로 서술하고 있음을 주목하기를 바라는데 고대문자를 표기하기 어려워 괄호 처리하니 농은유집 기록본의 고문자를 참조하기를 바란다. <제2부>에서 다룰 천부경의 해석이 이루어진다면 이런 사소한 문제는 해소되리라 보나 아쉽지만 해석의 기본 틀만 잡아보는데도 벌써 많은 분량의 글이 소모되었기에 이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ㅡ 이러한 이유는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空轉)에 관계된 이해에서 나왔다고 보는데 고대한국인들은 지구가 태양(太陽)을 중심으로 공전(空轉)과 자전(自轉)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으로서 현상계에 나타난 일신(一神)의 하나님과 같은 개념으로 해를 이해하고 있었던 고대한국인들에게 해는 당연히 고마운 우러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인간이 해를 마주하고 설 때 지구의 자전과 공전방향은 오른쪽이 된다. 그것을 알았기에 오른쪽을 바른쪽이라 생각했으리라 보는데 만약 지구의 자전과 공전방향이 하루아침에 왼쪽으로 향한다면 인간세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왜냐하면 일 년 농사일이 국가사적인 중대사였던 고대농경사회에서 늘 그러한 변함없는 지구의 공전과 자전방향에 변화가 생겨난다면 이보다 더 큰 재앙은 없을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라 본다. 그런 연유로 오른쪽을 바른길로 이해했으리라 보는데 이런 흔적은 찾아보면 지금도 더러 남아 있으리라 본다. ㅡ<어렸을 적 동네 할머님들은 동네아이들 중 간혹 왼손잡이가 있으면 오른손잡이가 바른 것이라며 왼손을 쓰지 못하게 자꾸 나무라던 기억이 난다.>ㅡ 우리는 고대 선조들의 천문학적인 지식수준을 너무 얕잡아 보고 있다고 보는데 아무리 낮게 잡아도 최소한 청동기시대로 추정되는 고조선시대에 이미 태양계(太陽界)의 운행원리를 알고 있었다고 본다. 천간(天干)과 지지(地地)로 육십갑자(六十甲子)가 만들어지게 된 배경이 태양계(太陽界)이기에 태양계의 운행원리를 알지 못하고는 육십갑자(六十甲子)를 만들어낼 수 없다고 본다. ㅡ<이 사람이 몇 년 전에 이런 글을 공개하기 전 까지만 해도 육십갑자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는지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보는데 무엇을 근거로 육십갑자가 만들어지게 되는지 차이나의 학자들조차 꿀먹은 벙어리와 같았으니 고대한국학을 통해 이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육십갑자를 만들어낸 사람들이 우리 고대 선조들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ㅡ 그러므로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천문학적인 지식이 당대에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수준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또한 수학과 기하학에 대한 이해도 상당한 수준을 확보하고 있었음이 한단고기 기록에 나타난 다 보는데 천부경의 우주론을 바탕으로 한 과학지식을 사용해 단군왕검께서 천하를 다스렸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王儉氏 承經 一周 三匝四之機 <왕검씨 승경 일주 삼잡사지기> 專用王道 而 治天下從之 <전용왕도 이 치천하종지> 이 내용은 역대 단군들께서 360이 의미하는 땅의 세계인 전체적인 천하(天下)를 다스렸다는 내용으로 원주율을 삼잡사지기(三匝四之機))로 표현하고 있다고 본다. ㅡ<이는 상식적인 수학논리라기 보다는 삼은 감정과 생각과 육체적인 개인적인 심리적 양태와 사는 너와 내가 만들어내는 사상의 경우의 수로 인간세를 의미한다고 본다.>ㅡ 또한 중국의 무씨사당에 그려진 단군그림에서 컴퍼스와 자를 들고 있는 모습은 이 기록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본다. 그 밖에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 전통 마을의 구조나 민속 등등에서 고대한국학의 영향력이 그대로 간직된 살아 있는 화석과 같은 흔적들이 상당수 남아 있으리라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늦기 전에 현대문명 속에서 빠르게 사라져 가고 있는 옛 흔적들을 찾아내어 고대한국학을 이해하는 자료로서 영상물이나 기록물 같은 것으로 남겨두어 고대한국학을 연구하는 소중한 기초적인 자료로서 활용해야 한다고 본다. 오른손을 바른손으로 표현한 예가 단군세기 3세 단군 가륵 제위 때의 기록에도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러한 언어 사용의 전통은 매우 유서가 깊다고 본다. 그 기록에 따르면 단제께서 삼랑 을보륵을 불러 신왕종전의 의도를 물으시니 보륵은 엄지손가락을 교차시켜 바른손을 올려놓아 하느님께 삼육대례를 행한 다음 나아가서 말했다 하는 기록이 있는데 오른손을 가우수(加右手)로 표현하는 구절이 있다. 문자 뜻 그대로 풀면 바른 오른손이니 언어사용상 오른쪽이라는 의미는 생략되어 바른손이라는 언어로 굳어지게 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불과 35년 이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언어사용의 풍습이 상당부분 그대로 전승되어 전해지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사례 중의 하나가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시골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던 “바른손”이라는 말이라고 본다. 따라서 이 기록은 그냥 스쳐지나가기에는 너무나 커다란 의미를 담고 있는 중요한 기록이라 보는데 3세 단군 가륵 제위 때라면 단군조선 건국초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약 사천년 쯤 전이다. 또한 단군조선 건국초기이니 한웅신시 때와 같은 치세를 다 회복하지는 못했다고 보는데 이것은 3세 단군 가륵 제위 때의 기록에 그대로 나타난다고 본다. 예를 들면 신지고글에게 명해 배달유기라는 한웅신시의 역사서를 편찬하게 한 것이나 풍속이 하나같지 않고 말도 잘 통하지 않아 정음 38자를 만들었다는 것이나 신시를 이루던 구한의 백성들이 제위 후 한참 뒤에 다 복종하고 따르게 되었다는 내용들은 아직 한웅신시 때와 같은 위상을 제대로 회복하지 못하고 어수선한 상태 였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ㅡ<정음 38자라는 기록으로 보아 가림토가 처음 만들어질 때에는 표음기호였으리라 추측해 보는데 후대로 오며 표의기호의 의미가 덧붙여지며 표의문자와 표음문자로 갈라졌으리라 보는데 대표적인 것이 훈민정음과 한자라 본다. >ㅡ 따라서 구한으로 갈라진 한웅신시의 옛 백성들을 하나로 결속시키며 신시의 옛 위상을 회복해야하는 절실한 시대적 사명이 3세 단군 가륵제위 초기에 대두되었을 것으로 보기에 삼랑 을보륵은 구한의 백성들을 통합할 수 있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던 한웅신시의 옛 역사적 핵심을 꿰뚤고 있던 요즘으로 치면 수도인이나 대학자 였을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을 불러 그 조언을 구하는 기록 중에 나타나는 가우수(加右手)라는 기록은 그냥 스쳐지나가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역사적인 증거를 내포하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구한의 백성들을 통합할 수 있는 정신적인 구심점이 한웅 시대 때의 종교적인 제례라고 판단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보는데 하느님께 올리는 옛 신시의 제례를 설명하는 과정 중에 가우수(加右手)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은 곧 신시시대 때부터 바른손이라는 언어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록이라고 본다. 참고삼아 오른쪽과 바르다는 복수의 의미를 함께 품고 있는 언어 중에는 영어의 라이트 독일어의 레히트 프랑스어의 드르와 등이 있는데 모두 오른쪽과 옳다의 뜻을 함께 가지고 있고 이는 크게 동서양을 불문하고 오늘날 오른쪽은 좋은 의미로 왼쪽은 나쁜 의미로 쓰이고 있음은 인류사의 문화적 뿌리가 하나의 원류에서 갈라졌을 수도 있다는 중요한 단서를 보여주는 예 중의 하나라 보며 아무도 왜 오른쪽을 좋은 의미로 왼쪽을 나쁜 의미로 쓰게 되었는지 모르는 오늘날 그 비밀의 열쇠가 될 수 있는 것이 가우수(加右手)라는 짧은 기록과 우리말 바른손이라 본다. 그러므로 말에도 그 민족 나름의 오랜 전통과 기원의 비밀이 녹아 있다는 것으로 우리말 사투리의 복원과 연구는 우리 정신의 뿌리를 밝혀내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리라 본다. 적어도 오늘날의 표준어라는 말 보다는 우리 정신이 깊이 녹아있는 매우 아름답고 유서 깊은 정감어린 언어가 사투리라 본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삼육대례의 예는 “신왕종전”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신시배달국 때에 한웅들께서 삼신상제의 하느님께 올리는 삼배와 여섯 갈래의 성스런 기운을 육 배로 하는 우리전통 신교에서 행한 하느님에 대한 예법이었다고 본다. ㅡ<삼신의 하나님이 곧 본체의 하느님이고 하느님이 곧 삼신의 하나님이니 결국 정신은 하나라는 것이고 이를 중심으로 생겨나 변화하는 땅은 여섯 갈래의 성스런 기운의 방향성을 통해 존재하니 숫자로 나타내면 칠(7)로서 삼육구배나 칠성령이나 표현양식만 다를 뿐 같은 의미라 본다. 이는 바둑판의 설계원리에 쓰인 천원점과 은문천부경의 설계에 쓰인 숫자 육(ㅜ)의 논리가 증명한다고 본다.>ㅡ 이는 유일신(唯一神)관과 다신(多神)관이 하나로 녹아 있는 예법이라 판단한다. 그러므로 삼일신고(三一神告)의 제목풀이도 제목 그대로 쓰임으로 나타나면 셋인 삼신(三神)의 하나님과 쓰임을 다하면 본체의 하나인 대일신(大一神)으로 존재하는 삼일(三一)의 하느님께 고함이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한국사와 한국사회의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모든 분들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 내가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정말 억울한 것이 나라고 증거가 빈약한 주장만으로 핏대를 세운다고 그게 먹혀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 보다는 아무리 작은 증거라도 내 억울함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와 논리적인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훨씬 생산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국내에서 조차 제대로 먹혀들지 않는 주장으로 세계인들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겠는가? 차이나와 일본은 이미 오래전부터 국가적인 차원에서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엄청난 지원을 해가며 자신들의 입맛에 맞춘 치밀한 논리적 근거와 증거들을 차곡차곡 구축해 왔는데 한국은 국가적인 차원은 고사하고 민간에서 조차 극히 소수의 사람들 외에는 관심조차 없는 상태다보니 그에 대응하기에는 너무나 빈약한 증거자료와 어설픈 논리 외에는 ㅡ<물론 간혹 훌륭한 논문들과 증거 자료가 개인적인 노력을 통해 있기는 하나 차이나와 일본에 비해서는 너무 빈약하다.>ㅡ 별 도움도 되지 못하는 개인적인 감정풀이 밖에 되지 못하는 주장만 가득한 지금의 한국의 현실에서 이해 당사국인 차이나와 일본과 북한을 포함한 남한을 보며 이해당사국의 역사에 대해 거의 모르거나 별 관심도 없는 제 삼자들인 나머지 세계인들은 과연 누구의 주장에 손을 들어 주겠는가? ㅡ<해방이후 우리나리 정치인들의 역사인식이 주된 원인이라 본다.>ㅡ 따라서 설득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어설픈 감정적 주장들을 앞세워서는 거짓말쟁이나 허풍쟁이라는 오해의 소지를 세계인들에게 심어주는 역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 보다 효과적인 방법을 다 같이 힘을 모아 모색해 보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6)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인문학은 인간문명을 성립시키는 여섯 가지 요소를 총칭하는 개념으로 인간이 집단생활을 시작하면서 필요에 의해 만들어낸 모든 문명적 요소들을 말하는데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를 결정짓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인문학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물어보는 철학적 자세로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낸 인문학에 인간이 노예처럼 끌려가는 종이 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인간이 스스로 인문학을 통제하며 유익하게 사용할 줄 아는 주인이 되어야 하는지 물어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으로 삼·일(三·一) 철학이란 이에 대한 명쾌한 답변인데 삼·일(三·一)에서 삼(三)이 이성(理成)적 세 가지 요소를 말한다면 일(一)은 그 주인이 인간이라는 뜻이 되고 일·삼(一三)에서 일(一)은 인간을 의미하고 삼(三)은 지성(智成)적 세 가지 요소를 말하기에 결국 지성의 주인도 인간이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인간이 문명의 주인이 되어야 하지 문명이 인간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명쾌한 가르침이 삼·일(三·一) 철학이라 보면 된다. 즉 종교와 과학을 망라한 모든 인간세의 논리적 바탕의 중심은 인간이라는 것으로 인간중심의 논리가 아니면 모두가 쓸데없는 말장난이라는 가르침이 삼·일(三·一)철학이라 보면 된다. 이는 천부경에 나타나는 천지창조의 신관에서도 잘 들어나는데 하늘을 창조한 우주의 주인은 본체의 하느님이고 본체의 하느님이 갈라져 천일(天一), 지일(地一)의 하나님으로 나타나 하늘을 재료로 땅인 천지(天地)를 창조하였다는 내용과 그 후 천일, 지일의 하나님이 결합해 인일(人一)의 하나님으로 나타나 천지(天地)를 재료로 땅인 생태계(生太界)를 창조하였다는 내용과 그 후 천일, 지일의 하나님과 천지의 섭리를 바탕으로 인일의 하나님은 만물의 영혼(靈魂)으로 갈라져 시간적으로는 만물의 창조와 소멸을 주도하고 공간적으로는 만물의 삶의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내용이 된다. 그러므로 인일의 하나님으로부터 갈라져 나타난 것이 만물이니 인간도 하나님이라는 뜻이 된다. 다만 천일, 지일, 인일의 삼신하나님처럼 완전하지 못한 불완전한 하나님이니 하나님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으로 그러한 방법에 대한 가르침이 이성적 세 가지 요소인 감성과 육성과 덕성이 되는데 삼일신고라는 제목도 이와 관련된 제목이라 보면 된다. 오늘날 전해지는 고등종교라는 형태의 가르침의 핵심도 말만 조금씩 다를 뿐 따지고 보면 결국 감성과 육성과 덕성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우리 상고사에 나타나는 고대의 제왕들은 "너희들도 하나님이 될 수 있으니 하나님이 되기 위해 노력하라"는 홍익인간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고 널리 펴던 인간적 하나님들이었음을 알기를 바란다. 아직은 고대한국학(古代桓國學)을 바탕으로 한 인문학(人文學)에 대해 깊이 있는 분석을 시도해 보지 않아 인문학을 한마디로 정리하기가 좀 어려운데 가장 큰 장애 요소가 기본적인 학술용어에 대한 개념정리와 사회적인 합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다 보니 기존에 쓰는 학술적 용어만으로는 도저히 표현하기 힘든 개념들도 많아 새롭게 용어를 만들어내던가 여의치 않으면 기존의 학술용어를 그대로 쓸 수밖에 달리 길이보이지 않는 상태가 지금의 한국학(韓國學)의 현실이다 보니 그동안 공개했던 글들도 그런 진퇴양난의 상태에서 쓴 것으로 용어의 선택에 상당히 힘이 들었는데 지금도 그런 상태에서 글을 쓰고 있다. 쉽게 예를 들면 하늘과 땅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개념적 정리와 학술적 용어의 합의가 현재 한국학계(韓國學界)에 되어 있는가? 천지인(天地人)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확실한 개념적 정리와 학술적 용어의 합의가 현재 한국학계(韓國學界)에 되어 있는가? 등등 한국학계에 산재한 문제가 너무나 많은데도 한국학의 기초가 되는 가장 기본적인 학술적 용어에 대한 개념적 정리와 학술적 용어에 대한 사회적 합의조차 이루어지지 못함으로 동서양학의 소통을 전제로 한 학자들 간의 학문적 연구 성과의 교류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고 그에 따라 일반인들 또한 그 진의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혼란 상태에 처해 있다고 본다. 한국학(韓國學)이 세계적인 학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인 기초가 학술적 용어에 대한 개념적 정리와 그것에 대한 사회적인 합의인데도 아직까지 이러한 중요한 문제에 대해 거론하는 학자들을 나는 보지 못한 것 같다. 기초가 부실한데 제대로 된 건물이 지어질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한국학이 세계적인 학문으로 성장해 세계학계를 주도할 수 있으려면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 학술적 용어에 대한 개념적 정리와 그 용어에 대한 사회적 합의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나는 이미 이 문제를 오래전부터 제기해 왔으나 아직까지는 별 반응이 없다보니 아쉬우나 인문학(人文學)에 대한 글을 전개하기에 앞서 우선 이 사람이 쓰는 학술적 용어에 대한 개념적 정리만이라도 해놓아야 이제껏 쓴 글에 담긴 본질적 이해와 앞으로 전개할 인문학에 쓰일 용어들에 대한 개념적 이해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 개인적인 노력만으로는 도저히 하기 힘든 사회적인 합의는 일단 제쳐두고 이 사람이 개인적으로 쓰는 학술적 용어에 대한 개념적 정리만이라도 우선적으로 해 둘 생각이다.
Contact Us : 고객문의센터, Tel: 대표 201-674-5611
E-mail: newyorkkorea77@gmail.com, newyorkkorea@naver.com, 빠른카톡상담ID : newyorkkorea
미국최대 대표포털 뉴욕코리아는 미국법률변호사고문 및 미국저작권법의 보호를 받고 있으며, 컨텐츠 및 기사의 무단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Copyright (c) New York Korea, INC. News Media Group in US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