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쇼라즈니쉬의 가르침
임제 선사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그의 첫번째 행동은
자신의 몸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는 것이었다.
'내 몸이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그는 찾기 시작했다.
그는 제자를 불러서 이렇게 말했다.
"가서 내 몸이 어디에 있는지 좀 찾아오너라. 나는 내 몸을 잃어 버렸다."
그는 형상 없음 속으로 들어갔다.
그대 역시 또 하나의 형상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그대는 자신을 직접 알지 못한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통해서 그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대는 거울을 통해서만 자신을 알 수 있다.
거울이 없는 세상을 한번 상상해 보라.
그러면 그대는 홀로 남게 된다.
전혀 거울도 없고 거울처럼 작용하는 다른 사람의 시선도 없다.
그대가 무인도에 홀로 있다면
그 어떤 것도 그대에게 거울 역활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대에게는 얼굴이나 육체가 있을 수 없다.
사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만이 우리 자신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우리의 외형만을 알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외형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한다.
***합 일***
교차하는 에너지의 선들이 있을 뿐이다.
선들을 제거하면 점은 사라진다.
그대 또한 부분들의 조합일 뿐이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텅 빈 진공이 남을 뿐이다.
감정들이 제거되면 자아는 완벽하게 사라진다.
텅 빈 진공이 남을 뿐이다.
감정들이 제거되면 자아는 완벽하게 사라진다.
그대는 이 자리에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부재(不在)가 있을 뿐이다.
무한한 공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궁극적인 경지다.
이것이 마하무드라의 차원이다.
이 차원에서 그대는 전체와 하나가 되는 오르가슴을 느낀다.
이제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아가 사라졌다.
그대를 구분할 경계선이 없다.
전체에는 경계선이 없다.
그대는 전체처럼 되어야 한다.
이때 비로소 만남과 합일이 가능하다.
텅 비어 있을 때 그대는 경계선 없이 존재한다.
돌연 그대는 전체가 된다.
'나'가 존재하지 않을 때 그대는 전체가 된다.
'나'가 존재하면 그대는 추한 에고가 된다.
그러나 '나'가 존재하지 않으면 존재계 전체가 된다.
***의 심***
나 또한 노래를 부르기 위해 이곳에 있다. 그러나 이 노래는 그대가 준비되어야만 들려줄
수 있다. '준비'라는 말은 그대마음속에서 의심이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는 뜻이다. 의심을
억누르거나 물리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물리쳐도 의심은 마음속 어딘가에 남아 있
을 것이다. 억눌린 의심은 무의식 속으로 들어가 계속 그대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의심과
싸우지 말라. 의심을 억누르지 말라. 그보다는. 더 많은 에너지를 신뢰에 쏟아라. 의심하는
마음에 무관심 하라.
무관심이 열쇠다. 의심을 무시하라. 의심이 존재한다. 그 의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그
리고 신뢰와 사랑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부어라. 똑같은 에너지가 의심이 되기도 하고,
신뢰가 되기도 한다. 의심에 무관심하라. 의심은 그대의 협조가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무관
심해지는 순간이 협조가 깨진다. 그저 무관심하라. 찬성도 반대도 하지 말라. 의심을 편들지
말고 , 의심에 맞서지도 말라.
궁극적 차원에서의 경험은 결코 경험이 아니다. 경험자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험자가
없는데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누가 그것을 말할 것인가? 누가 그 경험을 설명할 것인
가? 주체가 없으면 객체 또한 사라진다. 둑이 사라지고 경험의 강물만 남는다. 앎이 거기에
있지만 '아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모든 신비주의자들의 문제다. 그들은 궁극적인 차원에 도달했지만 그것을 설명해 줄
수 없다. 지적인 이해를 구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설명해 줄 길이 없다. 그들은 그것
과 하나가 되었다. 그들의 존재 전체가 그것을 설명해 준다. 하지만 지적인 교류는 불가능하
다. 만일 그대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들은 그것을 전해 줄 수 있다. 그대가 허용
한다면, 그대가 수용적으로 열려 있다면 그들은 그대에게도 그 일이 일어나도록 도와줄 수
있다. 그러나 언어는 도움이 안 된다. 이론과 교리는 아무 쓸모도 없다.
그들의 경험은 'experience'라기 보다는 'experiencing'에 가깝다. 그것은 과정이다. 시작은
있지만 끝이 없는 과정이다. 그 안으로 들어갈 수는 있지만 그것을 소유할 수는 없다. 이것
은 물방울 하나가 바다에 떨어지는 것과 같다. 또는 바다 전체가 물방울 속으로 들어간다고
도 할 수 있다. 이것은 완벽한 합일이다. 그대는 그 안으로 녹아들어 사라진다.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자취조차 없다. 그러니 누가 그것을 전달할 것인가? 누가 이 골짜기로 돌아올
것인가? 누가 이 어두운 밤으로 돌아와 그것을 말해 줄 것인가?
세상의 모든 신비주의자는 언어적인 교류(communication)에 관한 한 무력함을 통감했다. 영
적인 교류(communion)는 가능하지만 언어적인 교류는 불가능하다. 처음부터 이것을 이해하
고 넘어가야 한다. 영적인 교류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그것은 두 가슴이 만나 사랑을
이루는 것이다. 언어적인 교류가 머리와 머리의 관계라면, 영적인 교류는 가슴과 가슴의 만
남이다. 영적인 교류는 느낌이다. 그러나 언어적인 교류는 지식에 불과하다. 말이 전달될 뿐
이다. 말이 주어지고, 말이 이해될 될 뿐이다. 그리고 말의 본성 자체가 아무 생명력도 없기
때문에, 말을 통해서는 살아 있는 것을 전달할 수 없다. 궁극적 차원의 일은 고사하고, 우리
는 일상 생활에서도 말의 무능함을 절감할 때가 있다. 일상적인 삶에서도 우리는 진실로 무
엇인가를 강렬하게 느낄 때 그것을 말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어린 시절, 나는 이른 아침에 강가에 나가곤 했다. 그 곳은 작은 마을이었으며, 강물은 아주
천천히 흘렀다. 언뜻 보면 흐르지 않는 것 같았다. 해가 뜨기 전에 보면 강물이 흐르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럴 정도로 느릿하고 고요했다. 이른 아침, 사람들이 목욕하러 나오기도 전
의 강가는 말할 수 없이 고요했다. 새들이 노래하기에도 이른 시간이었다. 정적이 감도는 강
가에는 망고 나무 향기만 짙게 풍기고 있었다.
나는 자주 그 곳에 가서 앉아 있었다.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도 충분했다. 그것은 아름다운 경험이었다. 나는 그 곳에서 수영을 하고 몸을 씻었다. 해가
떠오르면 넓은 모래 뻘이 펼쳐져 있는 건너편 기슭로 건너갔다. 나는 그 곳에 누워 몸을 말
렸으며, 어떤 때는 깜빡 잠이 들기도 했다.
내가 집으로 돌아오면 어머니는 "아침 내내 무엇을 했니?"하고 물었다. 나는 "아무 것도 하
지 않았어요."하고 말했다. 실제로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
렇게 말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너는 네 시간 동안이나 어딘가에 있었는데 그 곳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고? 너는 틀림없이 무엇인가 했을 거야."
그녀의 말은 옳았다. 그러나 나의 말 또한 틀리지 않았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
저 강과 함께 그 곳에 있었을 뿐이다. 나는 모든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했을 뿐이다. 간혹 수
영 같은 것이 느껴지면......이 말을 기억하라. 수영 같은 것이 느껴지면 나는 수영을 했다. 그
러나 그것은 내가 한 행동이 아니었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잠이 찾아오면 나는 잠
을 잤다. 그런 일들이 저절로 일어났을 뿐 거기에 행위자는 없었다. 이렇게 사토리(satori)의
첫 번째 체험은 그 강가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 곳에 존재할 뿐이었
으며, 수많은 일들이 저절로 일어났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냐, 너는 틀림없이 뭔가 했을 거야."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맞아
요. 저는 목욕을 했고, 햇볕에 몸을 말렸어요."하고 응답했으며, 어머니는 이 말을 듣고서야
만족하셨다. 그러나 나는 만족할 수 없었다. 강에서 일어난 일들을 "저는 목욕을 했어요."라
는 말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것은 너무나 초라하고 빈약한 표현이다. 강과 함께 장
난치고, 강물에 몸을 맡긴 채 둥둥 떠다니고, 강물에 몸을 담그고 헤엄치는 것은 너무나 깊
은 경험이었다. "저는 그 곳에서 목욕을 했어요."라는 말로는 아무 것도 전달할 수 없었다. "
그 곳에 가서 둑 위를 걸었고, 그 곳에 앉아 있었어요."라는 말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간혹 우리는 일상 생활 속에서도 말로는 표현하기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낀다. 말의 공허함
을 느낀 적이 없다면 그대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대가 매우 표피적으로 살아
왔음을 보여준다. 그대가 경험한 모든 것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그대가 진실로 살
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을 넘어선 어떤 것이 일어나기 시작할 때, 이때 비로소 삶이 그대를 찾아온다. 삶이 그대
의 문을 두드린다. 그리고 궁극적인 것이 그대의 문을 두드릴 때 그대는 간단하게 말을 넘
어선다. 그대는 벙어리가 된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내면에 단 하나의 단어도 형성되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하건 너무나 빈약하고 무의미해 보인다. 그대에게 일어났던 경험을 오염
시키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마하무드라(mahamudra)는 최후의 경험이다. 이것을 명심하라. 마하무드라는 궁극적인 경험
이다. 마하무드라는 우주와 하나가 되는 전체적인 오르가즘을 뜻한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대는 간혹 상대방 안으로 녹아드는 것을 느낀다. 더 이상 둘이 아니다. 몸은 분리되어 있
지만 그 사이에서 어떤 것이 황금의 다리를 놓는다. 내면에서 둘이 사라진다. 하나의 생명
에너지가 두 극단에서 진동하고 있다. 이런 체험을 한 사람만이 마하무드라가 무엇인지 이
해할 수 있다. 이런 체험보다 수 백만 배 더 깊고 높은 것이 마하무드라의 차원이다. 마하무
드라는 우주 전체와 하나가 되는 완벽한 오르가즘이다. 존재의 근원으로 녹아드는 것이다.
여기, 마하무드라의 노래가 있다. 틸로빠(Tilopa)가 이것을 '노래'라고 부른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대는 이것을 노래할 수는 있지만 말로 할 수는 없다. 춤출 수는 있지만 말할 수는
없다. 노래를 통해서도 극히 일부를 전달할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심오한 차원이다. 노
래의 내용이 아니라 노래하는 방식을 통해서 무엇인가 전달될 수 있을지 모른다.
신비주의자들 중에는 궁극적인 체험을 한 후에 춤을 춘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그 외에 아
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 전체를 통해 무엇인가 말하고 있었다. 그들의
몸, 마음, 영혼 등 모든 것이 그 일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들의 춤은 일반적인 춤이 아니었
다. 사실, 모든 춤은 이 신비주의자들로 인해 생겨났다. 춤은 행복, 엑스타시, 지복을 표현하
는 방법이었다. 미지의 어떤 것이 기지(旣知)의 차원으로 뚫고 들어왔다. 초월적인 어떤 것
이 이 세상으로 내려왔다. 이때 그대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춤추고 노래하는 것 외에
달리 무엇을 하겠는가? 마하무드라의 노래가 이런 식으로 탄생했다.
누가 그 노래를 부를 것인가? 틸로빠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법열(法悅)의 느낌 자체
가 노래한다. 이것은 틸로빠의 노래가 아니다. 틸로빠는 존재하지 않는다. 경험 자체가 진동
하면서 노래를 만들어 낸다. 그래서 '마하무드라의 노래'라고 불리는 것이다. 법열 차제가
노래하고 있다. 틸로빠는 이 일과 아무 상관도 없다. 그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완전히 용
해되어 사라졌다. 구하는 자가 사라지고 궁극적인 목적지만 남았다. 경험자가 사라져야만 경
험이 존재한다. 구하라, 그러면 놓칠 것이다. 구함을 통해 '구하는 자'가 더 견고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구하지 말라, 그러면 발견할 것이다. 구하는 노력 자체가 장애물이다. 구하면 구할수록 '구
하는 자'가 강화된다. 에고가 견고해진다. 구하지 말라. 이것이 마하무드라의 노래가 전하는
가장 심오한 메시지다. 구하지 말라. 그대의 모습 그대로 머물러라. 아무데로도 갈 필요가
없다. 지금까지 신이 있는 곳에 도달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대는 신
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그러니 어디로 갈 것인가? 어디에서 신을 발견할 것인가? 지도도
없고 길도 없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말해 주는 사람도 없다. 아무도 신에 도달하지 못했다.
언제나 그 역(逆)이 진실이다. 그대가 신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그대를 찾아온다. 그
대가 준비되면 신이 찾아와 그대의 문을 두드린다. 그대가 준비되었을 때마다 신이 찾아온
다. 이 '준비'란 수용성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완벽하게 수용적일 때에는 에고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는 아무도 살지 않는 텅 빈 사원이 된다.
틸로빠는 이 노래를 통해, 안에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대나무가 되라고 말한다. 텅 빈 대나
무가 되는 순간, 돌연 신의 입술이 그대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그대는 피리가 되고,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이것이 마하무드라의 노래다. 틸로빠는 텅 빈 대나무가 되었고, 신이
이 대나무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이것은 틸로빠의 노래가 아니다. 궁극적인 경험 자체가 부
르는 노래다.
이 아름다운 현상을 탐구하기 전에 틸로빠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 틸로빠에 대해서는 알려
진 것이 거의 없다. 사실, 틸로빠 같은 사람들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그들은 자
취를 남기지 않는다. 그들은 역사의 일부가 아니다. 그들은 역사의 바깥에 존재한다. 그들은
인류의 주된 흐름에 속해 있지 않다. 그들은 이 흐름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인류는 욕망
을 통해 움직이지만 틸로빠 같은 사람들은 무욕(無慾)을 통해 움직인다. 그들은 인류의 주된
흐름, 역사의 물줄기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
그리고 역사의 흐름에서 멀리 벗어날수록 그들은 신화적인 인물이 된다. 그들은 신화처럼
존재한다. 더 이상 시간 속의 인물이 아니다.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들은 시간을 초
월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간을 초월한 차원에서 살아간다. 그들은 영원 속에서 산다. 그들
은 이 평범한 인류의 차원에서 사라졌다. 자취도 없이 증발했다. 그들이 증발하고 있을 때,
오직 그 순간에만 우리는 그들을 기억한다. 그들은 증발하는 동안만 우리의 흐름에 속한다.
그런 까닭에 틸로빠가 누구인지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오직 이 노래가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노래는 제자인 나로빠(Naropa)에게 준 선물이다. 이런
선물은 아무에게나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깊은 사랑과 친밀함이 있어야 한다. 선물을 받
아들일 자격을 갖춘 인물이 있어야 한다. 이 노래는 나로빠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 노래가
주어지기 전에 나로빠는 수많은 시험을 받아야 했다. 그의 신뢰와 사랑이 시험받았다. 그리
고 그의 마음속에 일말의 의심도 남아 있지 않을 때, 그의 가슴 전체가 신뢰와 사랑으로 충
만해졌을 때 이 노래가 주어졌다.
나 또한 노래를 부르기 위해 이 곳에 있다. 그러나 이 노래는 그대가 준비되어야만 들려줄
수 있다. '준비'라는 말은 그대의 마음속에서 의심이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는 뜻이다. 의심
을 억누르거나 물리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물리쳐도 의심은 마음 속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다. 억눌린 의심은 무의식 속으로 들어가 계속 그대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의심
과 싸우지 말라. 의심을 억누르지 말라. 그보다는, 더 많은 에너지를 신뢰에 쏟아라. 의심하
는 마음에 무관심하라.
무관심이 열쇠다. 의심을 무시하라. 의심이 존재한다. 그 의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그
리고 신뢰와 사랑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부어라. 똑같은 에너지가 의심이 되기도 하고,
신뢰가 되기도 한다. 의심에 무관심 하라. 의심은 그대의 협조가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무
관심해지는 순간 이 협조가 깨진다. 의심이 먹이를 구하지 못한다. 의심은 그대의 관심을 먹
고 살아간다. 의심에 반대하는 것도 관심이다. 의심에 반대하는 것은 위험하다. 반대하는 관
심 자체가 의심의 먹이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반대를 통해 의심에 협조한다. 그저 무관심 하
라. 찬성도 반대도 하지 말라. 의심을 편들지 말고, 의심에 맞서지도 말라.
***에고와 무아(無我)***
Q. 스승님.
저는 삶의 어려운 일을 겪어 오는 동안에 인생을 많이 체념하였습니다.
이 체념은 명상 속에서 더 탄력적이고 생동적으로 살려고 하는
자기 노력을 억누르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이것은 내가 나의 에고를 억압했기 때문입니까?
A. 이것은 대단히 큰 문제 중의 하나이다.
이는 대단히 역설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에고를 버리기 위해서는 먼저 에고를 지녀야
한다. 익는 것, 그것이 도달하고자 하는 전부이다. 익지 않은 자아(自我)는 떨어져 나
갈 수도 파괴될 수도 없다. 만일 그대가 무르익지 않은 자아를 상대로 그것을 파괴하려고
하거나 분해하려고 한다면 그대의 모든 노력은 실패로 돌아간다. 오히려 새롭고
미묘한 형태로 자아가 강화될 것이다. 이것이 이해하여야 할 기본적인 것이다. 자아는
정점에 이르러야 한다. 강해야 한다. 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때만이 그것을 용해
할 수 있다. 미숙한 자아는 용해될 수 없다.
이것이 그대들에게 어려운 과제일 것이다. 먼저 그것을 획득한 다음 그것을 버려야 한
다. 그대가 무엇인가를 버릴 수 있는 것은 그대가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을 때뿐이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데 무엇을 버릴 수 있겠는가?
부유한 자만이 가난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가지고 있을 때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
가 결코 부유한 적이 없다면 어떻게 가난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은가? 그대의 가난
은 표면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정신에까지 다다르지 않는다. 그대가 줄곧
가난하였고, 가난에 시달려왔다면, 그것은 가난이 아니라 결핍일 것이다.
무르익지 않은 과일은 스스로 떨어질 수 없다.
설익은 과일은 모체인 나무로부터 스스로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기억하라. 모든 것이 성장을 통하여, 성숙을 통하여, 시간이 걸린다. 그것이 대지에
떨어져 죽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에고에도 자기 만족의 시간이 있다. 그것에는 성숙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그대가 에고이스트임을 무서워하지 말라. 그대는 에고 속에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는 벌써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그대는 존재할 수 없다. 이
것이 삶의 메카니즘이다. 그대는 에고이스트로 남아야 하며, 싸워야 하며 각기 자신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된다. 그대의 생존을 위하여 싸워야 한다. 에고는 생존을 위한 수
단이다. 또한 에고는 자연의 성장의 일부이다. 그러나 그대가 그것과 함께 영원히
공존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연적인 성장이다. 거기에는 떨어져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두번째의 단계가 있다. 그것 또한 자연적인 것이다. 그러나 두번째의 단계
는 첫번째의 단계가 절정에 도달할 때 시작된다. 나는 양쪽 모두를 다 가르친다. 나는
아(我)와 무아(無我)를 다 가르친다. 그러니, 우선 에고이스트가 되라. 절대적인 에고
이스트가 되라. 마치 전체가 당신을 위하여 있는 것처럼, 그대가 중심에 있는 것인 양.
에고는 그대가 무의식적일 때에는 병이 된다. 그대가 무의식 속에 숨겨 놓는다면 그것
은 병이 된다. 그러나 그대가 그것을 알고 있다면 에고는 하나의 게임이다. 그대는 그
것을 즐길 수도 있다.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속에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게임은
즐길 수 있다. 게임은 나쁜 것이 아니다.
만일 당신이 에고를 버릴려고 한다면 에고는 내면에 남아 있다. 이것은 참으로 미묘한
현상이다. 누가 그것을 버렸는가? 당신이 버렸다.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에고이다.
버린 것이 무엇이든 본체가 아니다. 본체는 남을 것이며, 당신은 전혀 다른 것을
던져 버린 것이다. 당신은 자신을 무아(無我)로 만들 수 없다. 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
는가. 그것은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날 뿐이다. 당신은 에고를
통하여 성장하며, 그 에고가 더 나아갈 수 없는 상태에 다다르게 된다. 그때 꿈은 깨어
진다. 갑자기 당신은 새가 병 속에서 나와 있음을 본다. 그것은 본래 병 속에 있지 않았던
것이다. 당신은 에고 안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당신을 에워싸고 있는 부질없는
꿈이었다. 그 꿈은 필요했다. 꿈에는 허물이 없다. 그것을 비난하지 말라. 그것은 성장
의 한 부분이었다.
생에 있어서 모든 것은 필요한 것이다. 불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불필요한 것은
있을 수 없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일어날 만한 깊은 이유가 있기 때문이며, 또한 그
대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대를 생존케 하고 보호하여 준 누에고치이다.
하지만 영원히 고치 속에 들어 있을 필요는 없다. 그대가 준비가 되었다면, 고치를 깨고
나오라. 에고는 알의 껍질이다. 그것은 그대를 보호한다. 그러나 그대가 준비가 되었다면,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한다. 에고는 껍질인 것이다.
그러나 기다려야 한다. 서두른다고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
시간을 허락하라. 그것을 절대 비난하지 말라. 오히려 그것은 성장의 한 부분이다.
창조하라.
그때 생은 말한다.
파괴하고 태어난다.
그러면 죽을 것이다.
획득하라.
그러면 잃을 것이다.
부유하라.
그러면 가난하게 되리라.
그리하여 정상이 되어라.
에베레스트에 서라.
그리고 나서 심연이 되는 것이다.
무아(無我)가 되는 것이다.
그때 그대는 양쪽을 다 알게 된다.
마야(Maya)와 브라흐마(Brahama)를.
***조주어록 강의(일부)
옛 이야기 하나가 있다.
암사자 한 마리가 이쪽 언덕에서 저쪽 언덕으로 뛰어넘다가 새끼를 낳았다. 새끼는
양 떼 사이에 떨어졌으며 양 떼 틈에서 자라났다. 새끼 사자는 자신이 양이 아니라
는 것을 알 방도가 없었다. 아마 그는 동물의 역사에서 유일한 채식주의 사자였을 것
이다! 그는 풀만 먹는 순수한 채식주의자였다.
풀만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른 양보다 더 크게 자라기 시작했다. 그러나 양들
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양들은 그가 위험하다는 것을 까맣게 몰랐다. 양들은 그와 친
구가 되었따. 어떤 양은 엄마의 역할을 했으면, 어떤 양은 아빠처럼 그를 돌보았다.
두려움의 문제는 전혀 없었다. 양들은 다만 이렇게 생각했다.
'사자처럼 보이는 양이라니 얼마나 보기 드문 양인가! 자연의 실수가 틀림없다.'
양들은 자기들 틈에 그렇게 뛰어난 양이 있는 것을 아주 흐뭇해했다. 수천 마리 양
떼가 움직일 때는 그가 중간에서 단연 돋보였다.
어느 날, 늙은 사자가 이 광경을 목격했다. 그는 눈을 의심했다. 양 떼 틈에 사자가
걷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늙은 사자를 보는 순간, 양떼는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틈에 섞여 젊은 사자도 도망
쳤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자신을 양으로 믿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늙은 사자는 조주와 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젊은 사자를 붙잡았다.
젊은 사자는 두려움에 질려 벌벌 떨었다.
늙은 사자가 말했다.
'이 바보 같은 놈! 너는 벌벌 떨고 질질 짜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네 놈은 양떼
틈으로 돌아가기 원한다. 여기엔 네가 모르는 어떤 이유가 있다. 나는 너에게 그 사
실을 깨우쳐 주지 않는 한 너를 놓아주지 않겠다. 나와 함께 가자!'
늙은 사자는 그를 호수로 끌고 갔다. 호수는 바람 한점 없이 고요했다. 늙은 사자는
그를 물가로 데려갔다.
'자, 물 속을 봐라! 네 얼굴과 내 얼굴을 잘 보란 말이다!'
물 속을 들여다보는 순간, 젊은 사자는 자신도 모르게 포효했다. 그것은 노력에 의
해 나온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사자라는 것을 아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포효한 것이
다. 그 포효는 먼 산까지 메아리 쳤다.
'내 일은 끝났다. 이젠 네가 누구인지 알겠느냐?'
젊은 사자가 감사하며 말했다.
'친절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저는 평생동안 양 떼와 함께
풀이나 뜯어먹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혼자 있는 것을 무서워했겠지요.
당신은 저를 새롭게 탄생시켰습니다.'
스승의 역할도 이와 똑같다. 어떤 상황을 조성하여 그대 자신을 알게 하고 저절로 사
자의 포효가 나오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스승의 역할이다.
*** 명상과 삶 ***.
Q. 우리는 삶이 주는 즐거움을 좋아하기 때문에 항상 미적지근한 태도로 수행에 임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우리를 걷어차서 내쫓기 전에는 이런 즐거움을 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A.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대는 나를 오해한 것이다. 나는 삶에 반대하지 않는다. 나는 즐거
움에도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그대가 삶을 즐기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
다. 그대는 삶을 즐기고 있다는 꿈을 꾸는 중이다. 실제로 보면, 그대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그대는 불행하다. 행복은 그대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희망은 즐거움이 아니다. 희망이란 위안을 받으려는 마음의 속임수이다. 오늘은 갔지만
내일은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려는 작전이다. "오늘은 불행하지만 내일
은 행복해질 거야." 그대는 이런 꿈을 꾸고 있다. 희망을 가지고 꿈을 투영한다. 그렇지만
진실로 삶을 즐기는 사람은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그는 결코 내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다. 미래를 꿈꾸지 않는다. 진실로 행복한 사람은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
왜 염려하겠는가? 무엇 때문에? 그의 모든 에너지가 지금 여기에서 진동하고 있다. 무한
한 지복과 행복, 축제의 춤이 되고 있다.
나는 그대에게 강렬하고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법들을 가르친다. 열정적인 삶을 살면서도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법을 가르치고 싶다.
집착은 불행한 마음을 대변한다.
그대가 어떤 것에 집착하는 것은
그것을 마음껏 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저 이것을 알아야 한다. 나의 눈에 비친 그대는 불행하다. "나는 삶을 즐기고
있다." 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 사실을 직시
하라. 그대가 진실로 삶을 즐기고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아무 문제도 없다. 그것을 축복
해 줄테니 마음껏 즐겨라. 그러나 내가 아는 한 그대는 삶을 즐기고 있지 않다.
그저 "나는 삶을 즐긴다." 하고 믿을 뿐이다. 자신의 불행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보는 것은
견디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댄 삶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기만한다.
그대는 슬픔의 눈물을 감추기 위해 웃음 짓는다. 자신의 상처를 가리기 위해 옷을 껴입고
색칠을 한다. 그대는 행복에 겨운 것처럼 위장하면서 타인과 자신을 기만하고 있다. 그대
는 행복하지 않다. 만일 진실로 행복하다면 그대는 이미 깨달은 것이다. 더 이상 명상할
필요도 없다. 진실로 그대가 행복하다면 어떤 종교도 필요 없다. 종교는 하나의 방편으로
써 필요한 것이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종교는 아직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 여전
히 불행과 어둠의 늪에 빠져 있는 사람들, 고통과 번민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한 도움의
수단이다.
나는 안다. 그대는 번뇌가 너무 심하기 때문에 어떤 안식처를 필요로 한다. 고통이 너무
큰 나머지 꿈을 필요로 한다. 그래야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꿈꾸는 천국과 행복은 항상 어딘가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결코 그대와 함께 있지 않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지금 여기에 있다.
'지금 여기'를 제외한 다른 시간과 공간은 모른다.
진실로 행복하다면 오직 행복이 존재할 뿐
그대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을 명심하라.
불행 속에서는 그대와 불행이 존재한다.
둘이 존재한다.
그러나 행복 속에서는
오직 행복이 있을 뿐이다.
그대는 없다.
행복의 차원에는 이원성(二元性)이 없다.
불행은 이원적이다. 불행 속에서 그대는 항상 둘로 존재한다. 조각조각 나뉘고 분열된 상
태가 불행이다. 불행할 때 그대는 유기적인 통일체가 아니다. 무엇인가 그대를 거스르고
있다. 그대가 원하지 않는 어떤 것이 거기에 있다. 생선의 가시처럼 목에 걸려 있다. 그대
는 "내일은 괜찮아질 거야." 하는 희망을 안고 그 고통을 겪고 있다. 그러나 어제를 돌이켜
보라. 어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대는 오늘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에는 오늘이
바로 내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다리던 오늘이 왔지만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다른 내일들도 계속 다가올 것이다. 그런데 내일은 항상 오늘로 온다.
결코 '내일'로 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먼저 이것을 가슴에 새겨라. 나는 삶에 찬성한다. 삶이 주는 즐거움에 전적으로
찬성한다. 나는 우울함과 심각함에 찬성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을 심각하게 만드는 모
든 종교들에 반대한다. 神은 심각하지 않다. 만일 그가 심각했다면 꽃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새들이 노래부를 수 없었을 것이다. 神은 아주 유쾌하고 놀이를 즐기는 사람이다.
神은 놀이를 즐긴다.
그는 여기저기로 내달리며
뛰어 노는 아이와 같다.
순수한 에너지로 넘쳐 흐르고
즐거워하며 온갖 노래와 춤을 즐기면서도
결코 지치는 법이 없다.
그는 언제나 새로운 활력으로 넘친다.
계속해서 인간을 생산해 낸다.
그러므로 인간 각자가
神의 새로운 춤이며 노래이다.
사람 하나 하나가 사랑과 삶을 위해
神이 기울이는 노력의 산물이다.
모든 인간이 神의 계획이며 노력이다.
神은 결코 지치지 않는다.
그의 놀이는 끝이 없다.
나는 흥겨움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대는 삶을 즐기고 있지 않다.
그래서 명상이 필요하다. 명상은 그대의 심각함을 몰아내기 위한 것이다. 명상은 그대
자신이 시체처럼 죽음 상태에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기 위한 것이다. 명상은 과거의
망령과 미래의 헛된 꿈을 몰아내어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도록 해 주는 것이다.
명상은 그대에게 넘치는 즐거움을 선사하여 그 즐거움 안에서 그대가 사라지도록 도
움을 주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남아 있다면 불행을 벗어날 수 없다. 그대 자신이 불
행이다. 그대가 존재하는 한 심각함은 멈추지 않는다. '나'가 존재할 때 그대는 즉시
자신의 주변에 심각하고 우울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무언가 이미 죽어가고 있다.
그대 자신이 곧 그대의 죽음이다. 그대는 질병이다.
즐거워하고, 춤추고, 사랑할 때, 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을 때, 이때 그대는
아무 이유도 없이 행복하다. 행복에는 아무 이유도 필요 없다. 만일 이유를 찾으려고
한다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다. 행복은 동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럴 수가
없다. 행복을 인과의 법칙에 귀속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행복은 절대적으로 비
논리적이다. 행복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행복하라! 기다리지 말라. 무엇인가 준비를
하려고 애쓰지 말라. 사전준비가 필요 없다. 그대는 지금 이 상태 그대로 행복해질
수 있다. 아무 것도 모자람이 없다. 나로부터 이 기술을 배운다면 그대는 모든 것을
배운 것이다.
행복은 어떤 동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동기란 그대의 불행에 의해 조작되는 것이
다. 불행한 마음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불행한 마음은 시간에 의지한다. 그러나
행복은 시간과 무관하다. 지금 당장, 바로 이 자리에서 무엇이 핵심인지 보라. 행복은
'앎(Seeing)'의 문제이다. 조금만 더 주위를 기울이면 지금 당장 그것을 알 수 있다.
행복은 자각의 문제이다.
지금 이 순간에 누가 그대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가? 먼저 아름다운 여자를 찾아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생각은 논리적으로 보인다. 완벽한 아내들이
없는데 어떻게 행복을 기대한단 말인가? 그러나 세상에 완벽한 아내가 있다는 소리를
들어보았는가? 완벽한 집, 완벽한 차가 어디에 있는가? 이 모두가 환상일 뿐이다.
완벽함이란 마음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그것은 에고의 장난이다. 삶은 불완전한 채
아름답다. 이것을 이해하라. 그러면 지금 당장 삶을 즐길 수 있다. 그리고 즐거운 순간이
많아질수록 삶을 즐기는 능력이 늘어난다.
이 말을 잘 들어라. 행복은 이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행복은 오직 자연스럽게 즐기는
습관, 즐기는 능력을 필요로 할뿐이다. 그 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 없다. 그리고
이런 능력은 오직 즐김을 통해서만 얻어진다. 다른 어떤 것을 통해서도 이런 능력을
얻을 수가 없다. 즐기면 즐길수록 그대는 더 많은 것을 즐기게 된다. 즐기는 능력이
늘어간다. 이런 능력은 끓이지 않고 늘어간다. 끊임없이 날아올라 정상을 향해 줄달
음 친다. 행복이란 이미 그대가 찾고 있는 것을 즐기는 능력이다.
그대는 "우리는 삶을 사랑하고 즐기려 하지만...." 하고 말하지만 나만큼은 아니다.
그대의 말이 진실이었다면 완전히 삶에 취해 있을 것이다. "여전히 우리는 반신반의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는 뒷말이 없었을 것이다. 그대가 반신반의하는 이유는
바로 삶을 전체적으로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명상을 삶 외의 다른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명상을 삶과 대립되는 것으로 여기지 말라. 나는 삶 외의 다른
것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 삶 외의 다른 길에 대해 확신을 심어 주려고 하지 않는다.
삶이 곧 길이요 목적지이다.
종교는 삶과 분리된 길이 아니다. 종교는 삶 속에서 완전히 뛰어드는 것이다. 그러면
삶이 모든 비밀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런 식으로 가장 깊은 비밀을 드러내게
되는데, 그 가장 깊은 비밀이 바로 神이다. 삶을 사랑하고 전체적으로 살아라. 그러면
점점 더 많은 비밀이 드러난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비밀이
드러난다. 그것이 바로 神이다.
삶을 사랑함으로써 그대는 神을 사랑하게 된다. 전체적인 삶을 살아감으로써 어느 날
문득 神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러니 미지근하게 살지 말라 . 전체적으로 뛰어들어라.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그대를 삶으로부터 이탈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은
이미 오랫동안 행해졌다. 모든 인류가 그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 종교는 삶과 대립되는
목표를 설정함으로써 인류를 재앙으로 몰아넣었다. 이것은 충분히 입증된 사실이다.
神은 삶을 반대하지 않는다.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만일 신이 삶을 반대한다면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오래 전에 끝나 버렸을 것이다. 그대가 聖者라고 부르는 자들은
삶을 반대할지 모르지만 神은 그렇지 않다. 그대의 聖者들은 "세상을 등져라!!" 하고
가르치지만 신은 계속해서 더 많은 생명체를 빚어내고 있다. 신은 도피주의가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생명을 빚어내고 삶을 주는 일에 깊이 몰두해 있는 것 같다.
삶에 대한 神의 몰입은 끝이 없다.
神은 영원토록 그 일에 지치는 법이 없다.
그는 지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여전히 신선하고 젊은 에너지를 갖고 있다.
과거를 짊어지고 다니지 않는다.
매 순간이 그의 새로운 작품이다.
내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종교적인 인간이 된다면 그대는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 자신을 포기하겠지만 삶을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 자신을 버리고
삶과 하나가 될 것이다. 어떤 구별도 존재하지 않을 만큼 삶과 일체가 될 것이다.
버려야 할 것은
'나'라는 에고이지
삶이 아니다.
영혼, 환생 ------ 오쇼
먼저 두 세 가지사항을 말할 수 있다.
첫째 육체를 떠난 영혼의 상태는 정적이지도 동적이지도 않다. 이 때문에 더욱 이를 이해하
기 어려워 지는 것이다. 움직임이 없다면 그 반대 즉 정지 상태이다라고 이해하는 것이 보
통이다. 우리 생각엔 모든 것은 움직이거나 정지한 상태일 뿐이다. 정지해 있지 않으면 움직
이는 것이고 동적이지 않다면 정적인 것이다. 우리 역시 이 두 상태는 서로 반대된다고 느
낀다.
따라서 먼저 움직임과 정지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의 다른 면이라는 것을 이
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움직임을 보거나 지각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그것을 정지 상태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움직임이란 정지상태를 지각할 수 없으면 그 걸 움직인다고 한다. 만약 어
떤 물체가 굉장히 빠른 스피드로 움직인다면 그건 정지된 듯이 보일 것이다.
선풍기가 매우 빠르게 돌면 그 날개를 볼 수 없다. 날개 사이의 빈 공간이 그 것을 볼 수
있기 전에 날개로 채워지기 때문이다. 선풍기는 날개 사이의 공간에 아무것도 넣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돌 수 있다. 이처럼 물체는 그 것을 만질 때 움직이지 않는 듯이 느껴질 만
큼 빠르게 움직일 수도 있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정지상태로 나타나는 모든 물체 역시 동적
이라고 말한다, 단지 그 운동이 우리의 감각 기관으로 포착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를 뿐이다.
따라서 움직임과 정지상태는 서로 다른 두 가지가 아니라 정도에서만 차이가 나는 같은 것
의 다른 현상이다.
육체가 없는 영역에서는 움직임도 정지상태도 없다. 육체가 없으니까 時空도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시공을 넘어선 영역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아는 어떤 것도 시
공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영역을 뭐라고 해야 하는가? 이 세상엔 시공이 없는 상태를 표현한 어떤 단
어도 없다. 종교적 체험에서 그런 상태의 message를 처음 경험했을 때 그걸 어떻게 표현해
야 하나 하는 어려움이 닥쳤다. 과학자들도 새로이 발견된 현상을 정의할 때 이와 흡사한
당혹스러움을 경험했다. 모든 기존의 지식으론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나타나면 이를 표현
하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다.
예를 들어 전자가 처음 발견되었을 때 그 것을 입자라 해야 하나 파동이라고 해야 하나 하
는 의문이 생겼다. 전자는 동시에 두 가지 모두이다. 보통 이해되기로는 어떤 것이든 입자나
파동 중 하나일 뿐이지 둘 다 아닌 것은 없다. 때론 전자를 입자로 파악하고 때로는 파동으
로 이해한다. 어떤 언어에도 이런 현상을 표현하는 말은 없다.
전자를 관찰한 과학자들에게 전자는 상상할 수 없어 보였고 매우 불가사의했다. 사람들이
아인슈타인에게 왜 당신은 전자를 입자로서 그리고 파동으로서 동시에 설명하느냐며 당신의
생각이 매우 비 논리적이고 불가사의하다고 하였다. 그때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되 물었다
“내가 사실을 믿어야 되오, 논리를 믿어야 하오.” 사실대로라면 전자는 동시에 두 가지 모
두이고 논리대로라면 한번에 둘 중 하나여야만 한다. 전자는 하나의 예이다.
종교적인 개인들의 경험에 의하면 한 육체를 떠나 다시 다른 육체로 태어나기까지의 사이에
있는 영혼은 동적이지도 정적이지도 않다고 한다. 그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
니다. 움직임과 정지를 지각할 수 있는 時空이 죽음과 재 탄생 사이엔 존재하지 않기 때문
이다. 육체 없이는 움직임도 정지도 있을 수 없다. 육체는 단지 정적인 동적인 상태가 관찰
될 수 있는 매개체일 뿐이다.
움직임과 정지는 육체의 質이다 육체를 떠나서 움직임과 정지는 무의미한 언어이다. 이것은
모든 이중성에 적용될 수 있다. 떠듦 과 침묵을 그 예로 들어 보자. 육체가 없인 떠들 수도
침묵할 수도 없다. 보통 육체 없이 떠들지 못한다는 건 이해하지만 육체 없이 침묵할 수 없
다는 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떠들 수 있게 하는 매개체를 통해서 만이 침묵을 표현할
수 있다. 조용해진다는 것은 말하는 방법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침묵은 떠들지 않는 것이면
서 동시에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느 장님이 있다. 사람들은 그가 어둠만을 볼 수 있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
것은 환상이다. 어둠을 보는 것 조차도 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눈 없이는 어둠을 보는 것
조차도 불가능하다. 여러분은 눈을 감으면 어둠이 보이므로 장님이 어둠을 본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건 여러분이 실수 하는 것이다. 눈을 감더라도 눈은 여전히 거기에 있다. 장님이
되는 것이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의 장님은 어둠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어둠 역시 눈을 통
항 경험이기 때문이다. 어둠은 빛을 경험하는 기관을 통해서 경험할 수 있다.
움직임을 가능케 하는 기관을 통해서만 정지상태 역시 가능하다. 육체가 없다면 정지상태를
경험할 수 없다. 육체 없이 영혼은 떠들 수도 침묵할 수 도 없고 움직일 수도 정지할 수도
없다. 모든 경험은 육체에 의지한다.
그렇다고 육체를 떠난 영혼은 궁극적 자유에 도달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자유에 도달한
영혼이나 재생을 기다리는 영혼을 묘사하자면 아주 흡사할 것이다. 그럼 무엇이 자유에 도
달한 영혼과 재생을 기다리는 영혼의 다른 점인가? 그것은 그 잠재성에 있다.
육체 없음 동안 전생의 경험과 느낌들은 씨앗의 형태처럼 영혼에 머문다. 영혼이 육체를 얻
자마자 그 영혼이 가진 전생의 경험과 느낌들이 활성화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느 사람의
다리가 잘렸더라도 그의 걸음에 대한 경험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리 없이 그는 설 수
도 뛸 수도 없다. 뛸 수도 없는데 어떻게 설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다리를 다시 얻는다면
그의 모든 경험과 이전의 감각이 되 살아날 것이고 원할 땐 뛸 수도 있을 것이다.
자유를 얻은 영혼은 이 경험과 느낌들로부터도 자유롭지만 반면 다음 생을 기다리는 영혼은
단지 기관으로부터 만이 자유롭다. 이 두 종류의 영혼의 유사점은 육체로부터 자유로운 것
이고 다른점은 자유로운 영혼은 육체로부터 자유로울 뿐 아니라 모든 경험과 그 느낌과 욕
망으로부터 역시 자유로우나, 生과 來生 사이의 보통 영혼은 육체로부터는 자유로우나 육체
를 얻었을 때의 경험과 그 느낌이 여전히 씨앗의 형태로 연결되어 있어 그 씨앗은 육체를
얻음과 동시에 활성화 될 수가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런 두 生 사이의 경험을 체험하였다면 그것은 마치 육체 없이 영혼이
가질 수 있는 그런 것일 것이다. 그것은 명상의 경험과 같다 이런 명상적 경험을 갖는 사람
은 아주 드물다. 수 백만 명 중 하나 정도가 명상적 경험을 가질 수 있다. 그럼 나머지 사람
들은 어떤 종류의 경험을 하게 되는가? 그 들의 경험은 꿈과 같다. 꿈에서는 감각기관이 동
원되지 않는다.
만약 A가 꿈을 꾸고 B가 꿈에서 A의 사지를 자른다 하더라도 A의 꿈은 계속될 수 있다.
그의 잠이 깰 수는 있다. 만약 A가 꿈을 꾸고 B가 꿈에서 A의 사지를 자르고 A가 잠에서
깨지 않으면 A의 꿈은 계속될 것이다. 육체의 사지가 꿈을 위해 필수 조건은 아니기 때문
이다. 꿈 꾸는 동안에 육체는 전혀 활성적이지 않다. 꿈에서는 육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
다. 육체 없이도 그 꿈의 경험은 남을 것이다. 사실 모든 경험은 꿈의 형태로 남는다.
만일 누가 당신에게 당신은 꿈속에서 정지 상태로 있는가 움직이고 있는가를 묻는다면, 대
답하기 곤란할 것이다. 당신이 꿈에서 깨어났을 때 모든 당신 주변은 그대로 같은 곳에 놓
여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꿈 속에 있었다. 깨어나자마자 당신은 꿈속에서 오래고 깊은
사건이 있었음을 안다. 그러나 거기에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적절하게 이해하자면 당신 자신은 꿈에 참가하지도 않은 것이다. 깊은 의미로 말하자면 당
신은 목격자일 뿐이다. 그것이 당신이 꿈에서 죽을 수도 있는 이유가 된다. 꿈에서 당신이
걷는 것을 본다면 당신이 보는 당신은 꿈의 현상이고 당신은 목격자일 뿐이다.
그래서 어느 사람이 세상을 꿈처럼 바라볼 수 있다면 그는 지고의 종교적 경험을 가질 것이
란 견해가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을 마야(환상, 꿈)이라고 부르는 종교적인 개념이 이것이다.
더 깊은 의미로는 세상을 꿈인 것처럼 볼 수 있다면 그는 목격자가 되는 것이다. 당신이 당
신을 연극 속의 배우로 보게 된다면 당신은 언제나 목격자이고 관망자, 주시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육체 없는 경험이란 꿈 같은 것이다. 그 영혼은 전생에서의 경험이 고통 속에 있
었으면 악몽과 지옥을 꿈꿀 것이고 행복한 생이었으면 천국을 꿈꿀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꿈 같은 경험이다.
때때로 다른 종류의 사건이 생길 수도 있다. 동적이지도 정적이지도 않은 영혼이 다른 사람
의 몸으로 들어가는 경우이다. 그러나 영혼이 어떤 육체로 들어간다는 것은 언어상의 오류
이다. 오히려 그 육체가 영혼이 들어 오도록 야기하였다는 게 더 타당하다.그런 영혼의 세계
는 우리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 그 세계 역시 우리 옆에 가까이 존재한다. 우린 같은 세계에
동거하는 것이다. 모든 공간은 영혼으로 꽉 차있다. 우리가 보기엔 비어있는 바로 이 공간
역시 滿員이다.
두 가지 종류의 육체가 있다. 하나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육체이다. 그런 육체는 그 안의 영
혼을 움츠리게 한다. 몸의 일부가 완전히 빌 만큼이나. 그 때 가까이 있는 영혼들이 그 빈
공간으로 쓸려 들어 가게 된다. 마치 물이 도랑으로 쏟아져 들어 가듯이. 그때 그 영혼들이
육체를 가진 영혼만이 경험하는 것 들을 경험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깊이 기도하는 상태의 육체이다. 이런 육체 역시 그 안의 영혼을 움츠리게 한
다. 그러나 두려움의 상태에서는 고통과 번민 중에 있는 영혼만이 들어간다. 왜냐하면 공포
에 질린 사람은 추하고 더러운 상태에 젖게 되므로 높은 수준의 영혼은 그런 사람에게 들어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공포에 질린 사람은 하수구와 같아서 낮은 곳으로 움직이는 영혼이 들어가고 기도 중에 있
는 사람은 봉우리와 같아서 높은 곳으로 움직이는 영혼이 들어 갈 수 있다. 기도 상태의 사
람은 높은 수준의 영혼에게 관심을 끄는 내적인 향기와 미가 충만하다. 그런 높은 수준의
영혼은 기도에 의해서 초청된다.
이 두 가지 종류의 영혼이 가지는 경험은 육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接神의 완전한 방법이
여기에 있다. 이 신은 천국이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악마 역시 지옥이나 악마의
세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와 동거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공간에는 다차원의 존재들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앉아 있는 이 방은 공기로 꽉 차
있다. 누군가 여기서 향을 피우면 이방은 향으로 채워질 것이다. 누군가 노래를 부른다면 그
소리가 이 방을 채울 것이다. 그렇다고 향의 연기가 노래 소리와 부딪치지는 않는다. 이 방
은 소리로도 채워지지만 빛으로도 채워져 있다. 빛이 소리와 충돌하지는 않는다. 사실 그 공
간은 소리라는 하나의 차원 빛이라는 다른 차원 공기라는 또 다른 차원에서 꽉 채워져 있
다. 그 것들은 서로에게 장애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공간은 다 차원인 것이다.
예를 들어 여기에 책상하나가 있으면 다른 책상을 가져올 수 없다. 왜냐하면 책상은 같은
차원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차원의 존재에게 책상은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모든 영
혼들은 이렇게 우리 곁에 있다. 영혼이 접신 되면 영혼은 육체적인 형태의 경험을 갖게 된
다. 이런 경험들은 오로지 육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살아있는 육체에 들어온 영혼이 어떻게 대화하는 가가 또 하나의 짚어볼 부분이다. 이 대화
는 그 육체에 기존하는 영혼과 새로 들어온 영혼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이것이 우리가 직접
적으로 영혼과 대화할 수 없는 이유이다. 그렇다고 거기에 어떤 대화도 없다고 하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대화는 일어난다. 우리가 갖고 있는 천국이니 지옥이니 하는 개념은 사람들
의 상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영혼들이 유체를 빌어 대화한 것이다.
오래된 시절엔 하나의 시스템이 있었다. 힌두의 베다 Vedas를 예로 들면 그 저자들은 결코
자기들이 베다의 저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네들은 전혀 저자가 아니다. 그들이 겸
손해서 자기를 비하해서 자기들이 저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선
그들은 듣고 받아 적은 것이다. 이것은 매우 분명한 경험이다. 영혼이 당신 안으로 들어 왔
을 때 당신이 아니라 그 영혼이 얘기하고 있다면 당신은 당신이 비켜서 있다는 것을 완전히
안다. 당신 역시 화자가 아닌 청중이 되는 것이다.
밖에서는 알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주의 깊게 살펴 보면 그 말하는 방법 스타일이 다르
다는 걸 알 수 있다. 목소리 톤이 다르고 어휘사용이 다르고 웃음 역시 다르다. 안에 있는
그 육체의 원 주인은 모든 것이 유리를 들여다보듯 분명하다. 만일 악마가 들어오면 그 사
람은 너무 두려워서 무의식이 될 것이다. 그러나 거룩한 영혼이 들어오면 그는 예전에 없이
깨어 있게 될 것이다. 그 때에 그에게 그 상황이 분명해 질 것이다.
그래서 악마가 들어 왔던 사람은 악마가 떠난 뒤에야 누군가 내 안에 들어 왔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너무 무서워서 졸도하거나 무의식에 빠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룩한 영
혼이 들어온 사람은 그때 내가 아닌 누군가가 말하고 있다고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두 사람이 하나의 전화를 사용하는 것과 같이 두 목소리가 하나의 기관을 사용한다.
하나가 멈추면 다른 하나가 시작한다. 육체라는 기관이 그렇게 이용될 때 영혼들의 대화가
가능케 되는 것이다. 이게 악마와 신에 대한 알려진 지식이 알려진 방법이다. 이외의 방법은
없다.
이를 위한 완전한 과학들이 발전되어 왔다. 일단 과학이 전개되면 사물이 쉽게 이해 된다.
그때 이 사물들이 온전한 이해로 이용될 수 있게 된다. 과거에 이런 종류의 사건들이 발생
하면 과학적 원칙들이 이로부터 추출되었다. 예를 들어 우연히 거룩한 영혼이 접신 되면 그
런 현상을 유도한 조건들에 관한 원리가 발전하게 될 것이다. 그런 조건을 자꾸만 조성하게
되면 그런 영혼이 들어오게 된다.
예를 들어 이슬람 교도는 lohban을 태울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특별한 향으로 신을 부르는
방법이다. 힌두교도 역시 향을 피운다. 그들은 ghee로 만든 불꽃을 비춘다. 이것들이 오늘날
엔 종교 예식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한때는 깊은 의미가 있었다.
힌두교도는 신을 부르기 위해 특별한 주문 mantra를 찬미한다.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을 필
요는 없다. 보통은 의미가 없는데 그 이유는 의미를 가진 주문은 시대를 거치면서 변질 되
기 때문이다. 의미가 없는 주문은 시대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 의미 없는 주문에는 시대의
흐름에 따르는 이질적인 요소가 침투하지 못한다. 그래서 깊은 주문은 의미를 포함하지 않
는다. 깊은 주문은 뜻이 없기 때문에 변하지 않고 남는다. 그 것은 오직 소리일 뿐이다. 이
소리를 찬미하는 방법이 있다. 정확한 비트, 강도, 리듬이 갖춰 지면 초빙된 신이 즉시 육신
에 들어올 것이다. 만일 초청된 영혼이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면, 다른 유사한 영혼이 들어올
것이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주문, 기도문을 가지고 있다. 자이나교는 Namokar를 갖고 있다.
모든 적을 섬멸하신 분께 귀의합니다.
자유를 성취하신 분께 귀의합니다
종교적 스승께 귀의합니다
성직자께 귀의합니다
종교적 구도자께 귀의합니다
이 주문은 5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각 부분마다 영혼을 점점 깊게 초빙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전체를 한꺼번에 부른다. 그러나 그건 적절한 방법이 아니다. 지고의
영혼을 접촉하고 싶은 사람은 첫째 부분만 반복하면 된다. 나머지 네 부분은 암송할 필요가
없다. 한 구절에 완전한 강조가 있어서 그 구절에 관련된 영혼은 다른 영혼과 관련한 나머
지 구절과는 다르다.
예를 들어 이 주문의 첫번째 구절 모든 적을 섬멸하신 분께 귀의합니다 Namo
Arihantanam은 Arihantas에게 귀의하는 것이다. Arihantas는 모든 적을 파괴하였고 그들의
모든 감각을 초월한 영혼들이다. Ari는 적을 의미하며 Hanta는 파괴자를 의미한다. 그러므
로 이 구절의 주문은 오직 한번만 생을 더 가질 수 있는 완전히 깨달은 영혼을 부른다. 이
주문은 특별한 음조와 강세를 이용하여 반복되어야만 한다. 이 초빙에서 다른 자이나 영혼
은 포함되지 않아 접속될 수 없다.
Arihant는 특별한 기술적인 단어로써 자이나의 최고의 영혼과 연결된다. 이 기도문으로 예
수 그리스도는 초빙되지 않는다. 여기엔 그런 소망을 표현하고 있지 않다. 부처도 초빙되지
않는다. 이 것은 자이나의 영혼을 부르는 기술적인 조건이다. 이처럼 이 주문의 모든 구절은
다섯 가지의 다른 영혼을 부르는 주문이다.
마지막 구절인 ‘종교적 구도자께 귀의합니다’ Namo loye savva sahunam은 모든 구도
하는 영혼을 부른다. 모든 종교의 모든 구도자와 관련 있다. 자이나나 어느 특정 종교 그룹
과 무관하다. 이 것은 어떤 구속 없이 구도하는 영혼을 향한 초빙이다.
모든 종교는 접신을 가능케 하는 주문, 기도문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매우 중요하게 된다.
주문은 사람에겐 그 이름과 같다. 사람은 자기 이름을 누군가 부르게 되면 즉시 알아차릴
것이다.
모하메드를 예로 들면 그는 언제나 자신을 전달자 Messenger, Paigambara 라고 했다. 왜냐
하면 그는 그가 경험하고 있는 것이 자기 것이라고 느끼지 않았다. 위에서 그에게 도달한
목소리는 매우 분명했다. 그의 경험은 그의 계시로서 설명되었다. 모하메드는 무언가 자기에
게 들어와서 말하기 시작한다고 느꼈다. 그 자신도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누구도
그를 믿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설사 자기의 생각이라고 말하더라도 아무도 믿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는 전에는 그런 식으로 얘기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
무도 그런 얘기를 믿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그는 계시를 받은 곳에서 집으로 돌아와 남의 눈을 피했다. 그는 바로 그의 계시를 나타내
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전에 그런 배경을 전혀 갖지 않은 그를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
이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그의 아내에게 그의 계시를 말했다. 그의 아내가 믿을 수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말할 것이고 안 그러면 말하지 않을 거라고도 말했다. 그러나 그의 아내가
그를 믿었고 그는 다른 사람에게도 말하기 시작했다.
모세에게도 역시 같은 일이 일어났다. 목소리가 그에게 강림했다. 이 목소리가 내려오기 위
해서는 신성한 영혼은 매개체를 사용하여야 한다. 그렇다고 누구나 매개체가 될 수는 없다.
매개체가 될 수 있는 역량과 순수성은 무시할게 아니다. 대화는 역량 있는 매개체를 통해서
만 가능하다.
최근에 크리슈나무르티에게 이러한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했다. 이는 Maitreya 라는 이름하
의 붇다를 환생 시키려는 시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붇다는 Maitreya라는 이름으로 한번더
생을 가질 것이라고 말했었다. 약 2500년의 세월이 경과했으나 붇다가 여전히 환생하지 않
았다. Maitreya가 적절한 엄마와 자궁을 찾을 수 없다는 지적이 있었다. 따라서 적절한 엄
마와 자궁이 없다면 다른 형태의 시도가 있어야 했다. 선택된 누군가가 Maitreya가 들어와
원하는 걸 말할 수 있도록 준비하여야 했다..
이를 목적으로 거대한 신지학 운동이 태동했다. 알맞은 개인을 선택하여 Maitreya가 들어
올 만하도록 준비시키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모하메드에게 계시를 준 영혼은 모하메드에게
서 이미 준비된 매개체를 발견했고 모세에게 계시한 영혼도 매개체를 따로 말들 필요가 없
었다. 그 영혼들은 기성 제품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 시절엔 사람들이 단순하고 순수했고 훨
씬 덜 이기적이었다. 매개체를 발견하기 쉬웠다. 자기의 육체를 다른 영혼이 쓰도록 양보할
수 있었다 마치 자기의 몸이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그러나 지금은 불가능하다. 개개인은 고집스럽고 자기 중심적이며 아무도 양보하길 원치 않
는다. 신지학자들은 네 다섯 명의 어린이들을 선택했다. 각 어린이들이 어떻게 개발되어 갈
지를 확실하게 예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크리슈나무르티 Krishnamurti를 선택
했고 마찬가지로 그의 형제인 Nityananda도 선택했다. 나중에 그들은 krishnamenon과
george Arundale도 선택했다.
Nityananda는 그를 Maitreiya의 매개체로 양성하기 위한 강도 높은 준비에 시달려 요절하고
말았다. 크리슈나무르티는 그의 형의 죽음으로 정신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워 져 그 자신이
매개체가 될 수 없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그의 나이 9살에 Annie Besant와 Leadbeater에 의해 간택되었다. 그러나
이 세계는 거대한 드라마이다. 이 실험은 위대한 권력들에 의해 행해 졌다. 이 드라마는 강
력한 개인들이 국제 무대에서 연출하였다. Maitreiya가 크리슈나무르티에 들어 올 때가 임
박하였을 때 붇다의 사촌이면서 전 생애를 붇다에 반대하고 수 차례 붇다를 살해 시도 했던
Devadatta의 영혼이 크리슈나무르티의 부친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
Devadatta의 영향으로 크리슈나무르티의 부친은 Annie Besant와 다른 신지학자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그들의 보호하에 있는 그의 아들 크리슈나무르티에 대한 권한을 돌려받
기를 요청하였다. 이 소송은 추밀원까지 갔다. Annie Besant는 온갖 방법을 모두 동원하여
법정 투쟁하였다. 그러나 법정에서 그 녀 Annie Besant는 이길 수 없었다. 어린 아들은 마
땅히 그 아버지에게 그 양육의 권한이 있는 것이다. 비록 그 어린이가 자기 아버지에게 가
길 거절한다 해도 그 어린이가 아직 어려서 Annie Besant는 이길 수가 없다.
따라서 Annie Besant는 불가피하게 크리슈나무르티를 데리고 인도로부터 피신해야 했다.
인도에서 소송은 계속되었고 소송은 고등법원까지 갔다. 거기서 Annie Besant는 패배했다.
법의 전쟁이었다. Devadatta가 더 막강했다.
일반적으로 법은 악과 손 잡기에 익숙하다. 선한 사람은 법의 문제에 몰두하지 않는다. 범죄
자는 모든 합법적인 조치를 미리 강구한다.
나중에 Annie Besant는 런던에 있는 추밀원에 항소했고 모든 합법적 조건에 반하여 그 결
정은 뒤집어 졌다. 그 어린이는 Annie Besant와 남게 되었다. 그런 전례가 없었다. 판결은
정의롭지도 적절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추밀원 이후의 더 이상의 항소는 없었다. 그 판결은
이전의 법정에선 영향을 주지 않던 Maitreiya의 영혼이 영향을 끼쳐 이끌어낸 것이다. 그는
이 마지막 판결을 위해 그의 영향력을 비축했던 것이다.
낮은 수준에서 신문에 대문짝 만하게 실린 머리글처럼 규정된 드라마였다. 법정에서는 합법
적 문제였다. 그러나 높은 수준에서 큰 싸움은 두 강력한 영혼 간에 일어났다. 다른 사람에
게는 일찍이 없었던 커다란 고통이 크리슈나무르티를 준비시키는 중에 생겼다. 많은 개인들
이 어떤 목적을 위해 자기를 닦는 과정에서 많은 고통을 수반하지만 여러 사람이 한 사람에
게 그렇게 많은 고통을 안겨준 예는 없었다.
그러나 이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때가 왔을 때 모든 희망은 수포로 돌아 갔다. 신지
학자들은 세계 도처로부터 네덜란드에 약 육천명의 사람들을 모았다. 그리고 크리슈나무르
티는 그날 자기 자신의 개성을 포기하고 Maitreiya의 것을 받아들였다라고 선언하도록 계획
되었다. 모든게 준비 되었다. 오래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크리슈나무르티가 자기는 더 이상
크리슈나무르티가 아니라고 선언함으로써 Maitreiya가 그 안에 들어와 말하기 시작할 수 있
도록 연단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커다란 기대를 갖고 Maitreiya의 목소리를 경청하기 위하
여 각지로부터 파견된 육천 명의 대표들이 모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결정적인 순간에 크리슈나무르티는 자기 자신의 개성
을 포기하기를 거부했다. Devadatta가 그의 마지막 시도를 해 냈다. 추밀원에서 할 수 없었
던 그 무엇을 대표단의 최종 법정에서 해낸 것이다. 그는 크리슈나무르티가 자기는 세계의
스승이 아니다, 자기는 다른 사람의 영혼과 아무 관련이 없다, 자기는 자기 자신이다, 자기
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게 했다. 위대한 실험은 실패했다. 그러나 어떤 의미
에선 그런 식으론 첫번째 시도이어서 실패할 확률이 더욱 컸다.
영혼이 사람의 육체에 들어 가지 않고 대화를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이 것이 사람으로의
탄생이 불가피한 이유이다. 예를 들어 어느 사람이 지금 죽는다. 그가 육체 없이 수 백년을
보낸다면, 거기에 어떤 형태의 발전도 없다. 그는 그가 전생의 죽은 순간 있던 그 곳부터 새
로운 생을 시작할 것이다.
그래서 많은 종교가 잠에 대하여 반대한다. 자는 동안에는 아무런 진도가 없기 때문이다. 이
종교들이 자는 시간을 줄이기 시작했다. 당신은 잠든 그 침대에서 변하지 않은 채로 일어난
다. 그와 같이 당신이 환생할 땐 당신은 전생에서 육체를 떠날 때의 그 수준에서 시작한다.
아무런 진척이 없다.
두 생 사이에는 어떤 진보도 없다. 어떤 신성한 영혼도 천국에 있으면서 세상을 구할 수 없
다. 거기엔 아무런 행위도 없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끝 없는 꿈이 있을 뿐이다.
뭔가 하려면 이 땅에 내려와 인간으로 탄생하여야 한다.
서로 만나기를 열망하는 두 영혼은 두 서로 다른 두 육체에 들어 가야 만날 수 있다. 두 영
혼 간에 서로 직접적으로 만날 방법은 없다. 마치 한방에 자고 있는 스무 명의 사람처럼. 그
들이 한 방에 밤 새 잠들면 그들은 서로를 지각할 수 없다. 깨어남 후에야 서로 알아 볼 것
이다.
한 사람이 깨어 나머지 자는 사람을 알 수는 있다. 그것은 즉 한 영혼이 육체를 갖게 되면
그 영혼은 다른 영혼을 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머지 영혼들은 그 한 영혼
을 알지 못한다.
실제로 안다거나 인식하는 은 육체에 있는 뇌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죽을 땐 육체는 뇌와
함께 죽는다..
물론 다른 가능성이 있긴 하다. 어떤 사람들이 살아 있는 동안 뇌와 상관 없는 그리고 뇌의
작용이 아닌 텔레파시나 투시 등의 방법으로 관계를 맺게 되면, 그런 사람들은 악령이나 신
성과의 관계도 수립하는 데 성공할 수 있다. 그런 능력자는 매우 드물다. 영혼의 세계에 관
한 정보는 그런 영혼들로부터 알려진 것이다.
사후의 영혼 세계에 대한 정보를 접촉하려는 조직이 몇 있다. 예를 들어 런던의 降神 협회
의 멤버였던 올리버 로지경 Oliver Lodge이 죽은 후에 오랫동안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노력
해 왔으나 실패로 끝났다. 이십 년간의 지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메시지가 전달될
수 없었다. 실제 어떤 다른 영혼이 올리버 로지경의 영혼이 진지하게 메시지를 정달닿려 애
쓴다고 알렸다. 그러나 알맞은 주파수가 마련될 수가 없었다. 그는 이십 년 동안 그가 죽으
면 바로 메시지를 주겠다고 약속한 사람의 문을 두드렸다. 그는 이 작업을 위한 협회에 의
해 준비 되었다. 그는 잠자는 그의 친구를 깨우려 했던 것 같다. 그의 친구들은 깨어 앉아
있으면서 그의 존재를 가까이 느꼈으나 아무도 그가 말한 것을 받을 수 있도록 조율 되지
못했다.
올리버경은 이십 년간 그의 노력을 지속할 준비가 된 채로 죽었으나 아무도 그의 죽음의 언
어를 이해하도록 준비되진 않았다. 이런 일이 매우 잦았는데 어떤 친구는 길을 걷다가 오리
버경의 손이 그의 어깨에 닿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올리버가 그에게 말하려 할 때 그는 올
리버의 존재에 대한 감이 사라져 버리곤 했다. 이에 대해 그의 모든 친구들이 매우 분개하
였으나 올리버의 이 반복된 노력에도 불구하고 메시지는 전달되지 않았다.
이중으로 준비되어야만 했다. 누군가 살아 있는 동안 테레파시 경험의 능력이 있다면 말 없
이 생각을 전달할 수 있었다면 눈을 감은 채로 멀리 볼 수 있는 투시력이 있었다면 그런 사
람이 영혼의 세계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아는 것은 오직 물리적 경험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어린이, 시인, 식물학자,
가게 주인이 한 정원 갔다고 하자. 어린이는 벌들을 따라 다닐 것이다. 상점 주인은 그의 가
게를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시인은 꽃 앞에 서서 시를 구상하기에 여념이 없을 것이다. 그
리고 식물 학자는 나무에 관한 많은 것을 증명하려 할 것이다.
식물 학자는 그가 지난 기 십년 수집한 지식을 확인하는 분석적인 눈으로 모든 뿌리 잎 꽃
들을 볼 것이다. 그 외에는 아무도 그가 볼 수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육체 외
에는 아무 것도 알 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다른 세계를 알 수도 없고 그 것들과 관계를 가
질 수도 없다. 그들은 혼수 상태로, 깊은 무의식 상태에서 죽는다. 새 탄생을 기다리면서. 그
러나 어떤 준비가 되어 죽은 사람은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준비에 대한 기록들
이 있다.
만일 누군가 사후에 할 일을 계획하고 방법을 마련하여 충분히 준비한 채로 죽는다면 그는
무언가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평범하게 죽는다면 그는 곧 바로 혹은 한참 있다 환생할
수도 있다. 그 때 그는 두 생 사이의 아무 것도 모를 것이다. 이것이 영혼의 직접 대화가 불
가능한 이유이다.
이상은 라즈니쉬가 봄베이에서 1970~1973년 사이에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dimension beyond the known 에서 p116~p133사이의 내용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