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림토(다)에 대한 견해 생리와 심리 인간은 생리(生理)와 심리(心理)를 양대 축으로 해서 존재하기에 생리와 심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인간과 인간문명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기초를 제공하게 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인간자체가 생리적인 측면과 심리적인 측면이 동시에 작동하며 존재하기 때문인데 어느 한 쪽이 어느 한 쪽을 부정한다는 것은 너무나 큰 모순으로 비유가 적절한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운행 중인 자동차와 운전자는 분리할 수 없는 공동운명체로 어느 한 쪽이 어느 한 쪽을 부정한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되는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대한국인들은 이러한 생리와 심리의 동반적 관계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고 보는데 그 흔적이 삼계와 생명의 생리적 관계를 논리화 시킨 천간(天干)과 인간과 인간문명의 심리적 관계를 논리화 시킨 지지(地支)라 본다. 따라서 이 둘을 분리하지 않고 간지(干支)로 통합해 불렀다고 본다. ㅡ<천간(天干)과 지지(地支)의 문자풀이는 앞글을 참고하기 바란다.>ㅡ 이 생리와 심리는 인간문명을 만들어내는 핵심적인 여섯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인문학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바탕이기에 인문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 21세기 새로운 인류문명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인 생리와 심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 한다. ㅡ<전에 올린 인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설명한 이성을 만들어내는 인간학과 지성을 만들어내는 이치학에 대한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ㅡ 그러나 현재 형성된 동·서문명의 인간과 인간문명에 대한 이해들은 거의가 상호 보완적인 동반적 관계로 이 둘을 보지 못하고 어느 한 쪽에 치우치거나 적대적 관계로 설정해 인간과 인간문명을 이해하고 있다고 보는데 그러다보니 많은 문제점을 들어내고 있다고 본다. 다른 말로 바꾼다면 생리는 무위(無爲)의 도(道)이고 심리는 인위(人爲)의 도(道)로 이 둘의 관계가 상호보완적인 동반적 관계가 아닌 상호대립적인 적대적 관계로 설정되게 되면 많은 문제가 생겨나게 되는데 예를 들면 무위를 앞세운 도교(道敎)와 유위를 앞세운 유교(儒敎)의 특성들이라 본다. 따라서 도교는 너무 무위를 앞세우다 보니 인위인 인간문명에 관여해 인위의 도를 세우는 일 즉 심리적인 역사발전은 나 몰라라 무책임하게 산속에서 생리적인 무위자연의 도만 추구하려는 쪽으로 흐르게 되고 유교는 너무 인위를 앞세우다 보니 무위의 도를 세우는 일 즉 생리적인 인간행복은 생각지도 않고 너무 교리니 법이니 윤리도덕이니 하는 명분을 앞세워 무위의 도인 인간의 생리를 죄악시해 억압하고 탄압하려는 쪽으로 흐르게 된다. 그러나 생리는 삼계의 흐름에 따른 인간을 포함한 만물의 자연스런 무의식적 흐름 즉 본능으로 이를 부끄럽거나 추하거나 죄악시 하는 것과 같은 억압의 대상으로 보아서는 안 되며 기본적으로는 삼신하나님이 만물에게 내려준 축복의 대상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본다. 직설적으로 남녀간에 사랑을 나누는 행위가 죄라고 한다면 엄마아빠는 나를 낳기 위해 죄를 지은 범죄자가 되는 것이고 범죄자가 되지 않기 위해 사랑을 나누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할 수가 없다. 이게 논리적으로 말이 된다고 보는가? ㅡ<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는 결국 남녀간에 사랑을 나누는 것은 죄라고 전재하고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는 것으로 그게 죄라고 한다면 모든 기독교인들은 죄인의 자식이고 말로만 회개하지 실천은 전혀 없이 지난 수 천 년 간 대를 이어 죄를 지어온 철면피라는 소리가 된다. 한마디로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는 인간역사를 그만 마감하자는 소리로 기독교인들은 이를 인정할 수 있겠는가? 물론 사랑의 나눔을 원천적으로 죄악시 하는 타 종교도 마찬가지다. >ㅡ 우리는 일반적으로 만물이 만들어내는 자연의 자연스런 생리적 흐름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오히려 삼신하나님이 내려주신 축복의 선물이라고까지 자연을 찬양한다. 그런데 만물중의 하나인 인간에게 만은 이 잣대를 적용하지 않는다. 여기에 문제가 생겨나게 되는데 종교를 포함한 대다수의 윤리 도덕적 잣대들은 생리를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보지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려고 하지 않는다. 즉 심리가 만들어내는 인간문명을 해칠 수도 있는 위험한 측면이 생리라고 인식해 대부분 이를 억압하려고만 든다. 생리는 만물이 삶을 영위하며 자연계를 만들어내는 에너지의 원천이다. 그러하기에 인간행동의 동기를 부여하는 가장 원초적인 에너지도 생리(生理)로 인간이 어떻게 이 생리라는 에너지의 원천을 활용하는가에 따라 심리(心理)가 만들어내는 인간문명은 활력을 얻기도 하고 생기를 잃기도 한다. 심하면 인간문명 자체를 파괴할 수도 있다. 따라서 심리가 만들어내는 인간문명의 지속가능한 발전과 성숙을 위해서는 자연계에서와는 달리 인간사회에서는 생리적 표출을 각기의 구성원들이 순화하고 자제할 수 있는 상태로 다듬어야 할 필요가 생겼는데 곧 이성적 능력으로 인간학을 통한 생리적 에너지의 표출을 갈고 다듬는 공부를 의미하게 된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생리는 본능적인 생리적 에너지를 이성적으로 표출할 수 있도록 다듬어야 하는 공부의 대상으로 보아야하는 것으로 생리적 본능은 부끄럽거나 추악한 억압의 대상이 아니라 삼신하나님이 만물에게 내려준 축복의 대상인 것이다. 이를 잘 이해해야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곰과 호랑이의 이야기가 이해가 되며 동물인 소를 숭배하는 풍습도 이해가 된다고 본다. 즉 인간이 자연 상태와 같은 식으로 자신본위로 함부로 생리를 표출해서는 인간사회가 성립할 수가 없다는 것으로 스스로 이를 통제하고 자제하며 표출할 수 있어야만 지속가능한 인간사회가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곰과 호랑이의 이야기는 호랑이와 달리 곰은 스스로 이를 통제하고 다스릴 수 있는 상태로 이성적 능력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보는데 힘든 농사일을 도우는 소 또한 본능적인 생리적 에너지를 이성적인 상태로 다듬었다는 것으로 고대한국인들의 시각에서는 굉장히 성스러운 동물로 인식되었을 것이라 보기에 소를 숭배하는 풍습도 이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 본다. 하여간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사회를 만들고 인간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근본적인 힘이 생리적 에너지를 이성적으로 표출할 수 있도록 스스로 다듬고 자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 보는데 인간문명의 기본적인 틀이 만들어지던 고대에는 더더욱 이런 점이 부각되었을 것이라 본다. 왜냐하면 인간사회를 유지하는 방법은 두 가지 밖에 없다는 것으로 구성원들 각자가 스스로 생리적 표출을 자발적으로 순화하고 다듬어 서로 간에 충돌이 없이 자연스럽게 인간사회가 유지되도록 하는 방법과 아니면 국가와 같은 외부적인 거대권력이 가진 엄청난 힘을 통해 공포심을 심어주어 스스로 자제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인간사회를 유지하는 두 가지 방법밖에는 없는데 인간문명의 기본적인 틀이 만들어지던 고대에는 국가라는 거대권력자체가 거의 없었을 것이므로 구성원들 각자가 스스로 생리적 표출을 자제하고 순화하여 이성적 능력을 갖추지 않고는 인간문명을 만들어내는 공동체의 성립은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문학이 가장 자연스럽고 순수하게 정립이 되었던 시기가 고대라 보기에 고대한국학은 인문학이 무엇인지를 올바로 알게 해주는 근원적인 답을 줄 것이라 본다. 오늘날의 인간문명은 거의가 외부적인 거대권력이 가진 폭력적인 힘에 의지해 구성원들의 생리적 표출을 통제하고 있다고 보는데 이는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으로 구성원들 스스로가 이성적인 능력을 길러 인간문명이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지속가능한 인간문명의 발전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근원적인 방법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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