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한국학은 진리의 기준을 철저하게 여기라는 차원적 위치와 이곳이라는 장소와 지금이라는 때에 맞춘다. 이것은 철저한 인간중심의 이해 방식으로 여기는 내가 존재하는 차원이며 이곳은 내가 살고 있는 이승이며 지금은 과거와 미래가 연결되는 현재이다. 여기, 이곳, 지금을 벗어난 진리들은 공허할 뿐이다. 그것은 인간의 입장에서는 실수가 아닌 허수의 차원이고 허수의 장소이며 허수의 시간이다. 여기, 이곳, 지금은 나 자신이 직접적으로 연관된 차원이며 살아가고 있는 장소이며 숨쉬며 느끼고 있는 현재이다. 이러한 구체적인 기준을 떠나서 무슨 진리를 논할 것인가? 있다 한들 그것은 뜬구름과 같은 허무함일 뿐이다. 따라서 고대한국인들은 철저하게 인간중심의 논리를 펼쳐간다. 그 결과들이 천부경이며 천부경을 근본으로 해서 쓰여진 한국학계열의 경전들이라 본다. 내가 존재하는 여기라는 차원적인 위치개념이 생겨남으로 아래와 위라는 상하(上下)의 차원적인 구분이 가능해진다. 여기라는 차원적인 위치개념이 생겨나지 않으면 무엇으로 차원적인 구분을 할 것인가? 무한 연쇠의 고리로 이어진 수직적인 차원의 구조에서 여기라는 위치개념이 생겨나지 않으면 십진수로 나타나는 모든 차원이 다 원(○)이며 동시에 방(□)이 되어 버린다. 이래서는 진리의 기준을 잡을 수가 없다. 따라서 어느 차원에 맞추는가에 따라 내가 존재하는 차원은 허수가 될 수도 있고 실수가 될 수도 있다. 미소 차원이나 거대 차원의 논리에 의해 인간계가 좌지우지 되는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 그 예라본다. 그러므로 십진수의 구조상 무한대로 이어질 수 있는 수직적인 차원적 구조에서 내가 존재하는 여기를 기준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차원의 기준을 잡을 것이며 무엇으로 진리의 기준을 잡을 것인가? 또한 차원적인 상하의 위치개념이 잡혔다 해도 내가 살고 있는 이승이라는 장소를 떠나서 무엇으로 이곳이라는 장소의 기준을 잡을 것인가? 따라서 이승을 벗어난 다른 장소에서 일어나는 모든 물리적인 조건들은 허수일 뿐이다. 또한 지금이라는 시간의 개념에서 내가 지금 직접적으로 느끼고 있는 시간개념을 떠나서 일어났거나 일어날 사태들은 허수일 뿐이다. 그러므로 여기, 이곳에서 나타나는 지금이 실수이고 여기 이곳을 벗어난 사건의 흐름은 허수이다. 또한 여기, 이곳의 시간도 지금이 중요하지 과거에 매달리는 것도 문제이고 단계적인 과정을 무시한 허황한 미래에 매달리는 것도 문제이다. 바꾸어 말해 지금 현재의 나무가 인류문명이라면 마음에 안들고 잘못 자랐으니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떼를 쓴다고 지금의 나무가 과거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또한 꽃도 채 피지 않은 나무에서 열매를 따겠다고 떼를 쓴들 열매를 얻을 수는 없다. 여기, 이곳, 지금이라는 눈앞에 보이는 나무를 떠나서 도대체 무슨 진리를 찾는다는 것인가? 결국 모든 진리의 출발선은 지금, 여기, 이곳인 것이다. 이것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 천부경이다. 그러므로 여기라는 위치와 이곳이라는 장소와 지금이라는 때에 기준이 맞추어지지 않은 헛된 꿈에 인류는 더 이상 에너지를 낭비해서는 안되며 그러한 헛된 꿈에 휩쓸려 이 현실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 주기를 이 자리를 빌려 간절히 바래본다. 천부경의 총 글자수 81이 의미하는 것을 질량적인 형태에 대입하면 삼진수 체계로 나타나는 질량적인 세계 속에 나타날 수 있는 최대 변화 자리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원(○)이 최대한 부풀어 올라 360으로 나타날 때 일신각(△)을 중심으로 삼진수 체계로 나타나는 아홉 단계의 변화 과정의 최대자리수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좌우라는 음양적 체계로 쌓여지며 원(○)이 최대한 부풀어 오른 상태가 9×9=81로서 일신각(△)을 중심으로 각기 40자리씩 나타나는 최대 변화 자리수가 81이라는 뜻이 된다. 즉 구구단은 삼진수 체계로 이루어지는 입체적인 질량적 세계가 최대한의 변화 극점에 이르러 360의 상태가 되었을 때 나타나는 내부적인 변화 자리수를 의미한다. 나눗셈은 소멸과정으로 보면 된다. 참고삼아 81자로 이루어지는 총 변화자리수를 삼진수체계로 묶게 되면 81÷3=27로서 27개의 삼진수 배열이 나타나게 된다.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달력체계에 나타나는 일주일을 의미하는 일(日), 월(月), 화(火), 수(水), 목(木), 금(金), 토(土)가 만들어진 배경에 대해 나름의 생각을 말해볼까 하는데 생명은 태양계와 지구와 달이 만들어낸 자식들로서 태양이 천일신(天一神)의 하나님을 의미한다면 일월성신(日月星辰)은 지구와 달을 다스리는 지일신(地一神)의 하나님으로 태양과 지구와 달은 부모로서 생명은 그 자식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화(火), 수(水), 목(木), 금(金), 토(土)는 오행(五行)을 의미하는 것으로 태양과 지구와 달에 의해 소하늘이라는 오행체계로 움직이는 생태계가 만들어 졌기에 태양은 아버지로 지구와 달은 일월성신으로 어머니와 같게 되고 오행체계로 돌아가는 생태계 속에 나타난 소천지인 생명은 그 자식과 같아진다. <계속 강조하지만 일(日)을 뜻하는 한자어를 태양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일(日)자는 선조들의 시각에서는 우주정신과 우주정신이 만들어낸 세계를 의미하는 문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대에 쓰인 일(日)자 들은 문장에 따라 다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일(日)과 월(月)이 가장 중요한 개념이 되어 일주일의 가장 앞에 쓰이게 되고 오행(五行)은 뒤에 쓰이게 되었다고 본다. <서양식 달력체계가 로마시대 이짚트에서 건너간 역법(曆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본다면 고대동양문명은 이짚트 문명과 어떤 식으로든 깊이 연관되어 있으리라 본다.> 그랬기에 달력체계에서 가장 기본적인 순환개념으로 일주일을 정하면서 일(日)이라는 지구와 월(月)이라는 달을 가장 앞에 쓰게 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최소한 로마시대까지는 지금보다도 더 긴밀하고 깊이 있는 동서문명의 소통이 학문적으로는 있었을 것으로 보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일(日)이라는 개념이 태양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를 의미한다는 인식도 동서문명에 있었다고 본다. <고인돌에 나타나는 점과 원으로 이루어진 그림문자는 날일자의 뿌리로 점은 우주정신을 나타내는 기호이고 원은 삼신상제의 우주정신이 만들어낸 하늘과 천지인을 나타낸다고 본다.> 그런데 어째서 일이 현재는 태양을 의미하는 뜻으로만 쓰이게 되었는지 궁금해진다. 물론 이것이 아니고 우연의 일치로 창세기와 연관되어 달력(達曆)체계가 만들어 졌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열어두나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일(日)과 월(月)과 오행(五行)체계로 나타나는 일주일의 달력체계를 만들어내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많은 의문이 생긴다고 본다. 그러므로 일주일이 만들어진 근거가 한단고기에 나타나는 칠회제신력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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