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자모음기호에 담긴 비밀 15> 1, 갑(甲) 옥편에서는 이 문자를 "갑옷 갑"이라 읽고 있는데 억지로 같다 붙인다면 갑옷이라는 의미로 쓸 수는 있으나 이는 甲자가 만들어진 의미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풀이라 본다. 먼저 밭 전(田)이라는 문자부터 풀이를 한다음 갑(甲)이라는 문자와 이와 관련된 다른 여러 문자들에 대한 풀이를 생각나는 대로 할까 한다. 田=(ㅁ)+(ㅣ)+(ㅡ) 한자에서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입체적 형상을 의미하는 (ㅁ)의 기호에 수평적인 둘래나 경계를 의미하는 (ㅇ)의 기호를 통합해 사용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농작물을 키우는 논이나 밭의 둘래, 좀 더 크게 본다면 국가의 경계 등을 나타내는 기호로 (ㅁ)을 쓰고 있다고 본다. ㅡ<田, 國 등등 상당수 있다고 본다>ㅡ 우리말 자음기호 (ㅁ)은 크게 보면 모든 우주나 생태계 등을 의미할 수도 있으나 알기쉽게 예를 들면 씨앗이나 열매를 둘러싼 딱딱한 껍질을 의미하게 되는데 전(田)이라는 문자에서는 수평적 경계를 의미하는 우리말 자음 (ㅇ)의 의미로 쓰인다고 본다. 따라서 전(田)이라는 문자에서 (ㅁ)은 농작물을 키우는 논이나 밭의 경계를 의미한다고 본다. 그리고 (ㅣ)는 수평적 음양운동의 기준을 의미하게 되고 (ㅡ)는 수직적 음양운동의 기준을 의미하게 된다. 따라서 田이라는 문자에서는 농작물의 수직적인 생리적 성장과 수평적인 심리적 활동이 시작되는 기준을 의미하게 된다고 보는데 어떤 특정한 경계 안에서 생명이 수직수평의 음양운동을 하게 된다는 의미로 田이라는 문자를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전(田)이라는 문자에서 (ㅁ)의 의미를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크고 작은 입체적인 형상을 뜻하는 우리말 자음 (ㅁ)의 의미로 본다면 씨앗이나 열매를 둘러싼 딱딱한 껍질을 의미하게 되고 (ㅁ)의 안에 쓰인 (ㅣ)와 (ㅡ)는 수직수평의 생명활동이 시작되는 첫 출발선을 의미하게 되는데 생명활동이 나타나지는 않지만 딱딱한 껍질안에 숨겨진 생명력이 있음을 나타내는 의미로 전(田)자를 쓸 수 있다고 본다. ㅡ<수직수평의 시공간운동이 시작되고 끝나는 중심에는 우주정신이 있다는 의미로 十자를 쓸 수도 있는데 크게는 본체의 하느님을 의미할 수도 있고 좀 더 작게는 삼신의 하나님을 의미할 수도 있고 작게는 만물각자의 영혼의 정신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와 비슷한 의미로 만(卍)자가 있는데 十자가 씨앗이나 열매와 같은 기(氣)의 변화가 나타나지 않고 리(理)의 상태로만 있는 우주정신을 의미한다면 만(卍)자는 리(理)가 만들어내는 기(氣)의 변화가 나타나며 우주적 연기의 고리가 생겨나고 있는 상태를 나타내는 기호가 된다. 쉽게 말해 十자기호는 기(氣)의 시공간적 변화를 마치고 씨앗이나 열매의 상태로 있는 우주정신을 의미하고ㅡ(十자 기호는 우리말 모음 (ㅡ)와 (ㅣ)의 결합으로 무언가 완성된 상태를 나타내는 기호인데 열 십, 열매라는 말을 살펴보기 바란다.)ㅡ 卍자기호는 우주정신이 기(氣)의 시공간적 양태로 변화되며 만물이 연기적으로 얽혀 자연계의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기호가 되는데 이를 우주적으로 확대한 불교적 용어가 카르마이고 도형화 시킨 그림이 만다라 그림이라고 본다. 따라서 十과 卍을 대표적인 의미체로 내세운 기독교와 불교의 특색은 이 두기호의 의미만 제대로 알아도 종교적 핵심과 역사적 흐름을 꿰뜷어 볼 수 있다고 본다. 나아가 이 두 종교를 기본 바탕으로 세워진 문명적 특색도 꿰뜷어 볼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쉽게 말해 정신만 인정하고 기(氣)의 변화가 나타나는 물질적 양태를 부정하는 것이 十자 기호를 대표적 의미체로 하는 기독교계열이고 물질적 양태만 인정하고 정신을 부정하는 것이 卍자를 대표적 의미체로 하는 불교계열이라 본다. 둘 다 문제가 있는 것으로 정신이 물질이고 물질이 정신인데 리(理)나 기(氣)만 인정하고 한쪽을 부정한다는 것은 모순이 된다. 그러니 기독교는 이 현실을 다 거짓이라 부정하게 되기에 진리를 찾아 이 현상계를 해맬 필요가 없는데 원죄설이 나오게 되는 근본적 이유가 된다. 그러나 이 현실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 나이니 자신조차 부정할 수는 없고 해서 나와 하느님을 연결해주는 현실적 존재가 꼭 필요해지기에 그리스도라는 개념이 생겨나게 되고 그 대표적 인물이 예수가 되고 작게는 목사나 신부가 된다. 즉 나대신 진리를 알려주는 예수나 목사나 신부와 같은 존재들의 말만 잘 듣고 따라가면 되기에 기독교인들에게는 너무나 편리한 인생이 된다. 반대로 불교는 정신을 인정하지 않고 물질적 양태만 인정하기에 어떤 식으로든 이 현실에서 진리를 찾아야만 한다. 그러니 불교인들은 필사적인 구도의 길을 찾아야 하는데 짧은 인생으로는 현상계의 모든 기(氣)의 변화태를 경험할 수는 없으니 그 대안으로 나온 것이 진리는 자신안에 다 갖추어져 있으니 깨달음을 얻으라는 것으로 대표적인 형태가 선불교라 본다. 팔만대장경과 같은 방대한 불교의 서적은 필사적인 구도의 길을 찾아가던 많은 선승들의 노력의 결실이 된다. 한마디로 불교는 너무나 진지하게 인생을 본다는 것이고 이와 반대로 기독교는 어떻게 살든 너와 나는 모두 죄인들이라 보기에 너무나 인생을 가볍게 본다. 그러니 구약 신약을 다 합쳐도 불가의 서적에 비한다면 그 양적인 면에서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나게 된다. 이들 두 종교인들의 보편적인 인생에 대한 시각도 그 정도의 차이라고 본다. 하여간 기독교와 불교는 진리를 찾는 방식이 극과 극으로 전혀 다른 것 같아도 극과 극은 통한다는 것으로 부디즘이 서양인들에게 파고들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가 된다고 본다. 따라서 서양인들은 맛보기 힘든 반대의 무엇이 불가에는 있기에 지금의 서양인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수 천 년을 통해 쌓여온 불가의 지혜라 보며 특히 한국의 선불교라 본다. 그리고 이 들 종교보다 비교적 늦게 나타난 것이 유교인데 정신과 물질의 양 측면을 같이 검토하면서도 정신과 물질을 하나로 볼 것인가 아니면 둘로 볼 것인가를 두고 피터지게 논쟁을 벌린 것이 리기일원(理氣一原)론과 리기이원(理氣二原)론이 된다. 리기일원론으로 우주를 본다면 태어날때는 모두가 평등하나 자신의 노력에 따라 인생은 달라진다는 민주주의사상이 나오는 기본바탕이 되고 리기이원론으로 우주를 본다면 모두는 태어나면서부터 차별화되기에 어떻게 인생을 살든 귀천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신분계급사상이 나오는 기본바탕이 된다. 조선은 철저한 신분계급사회였기에 민주주의 사상이 싹 틀 수 있는 이론적 바탕은 마련되어 있었으나 현실화되지는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조선말 동학도들이 보여준 흔적은 양반계급들이 몰락하는 틈을 타고 나타난 리기일원론을 바탕으로 싹튼 한국식 민주주의의 한 형태였다고 본다. 그 싹이 제대로만 피었어도 분단과 같은 비극은 없었을 텐데 너무나 아쉽다. 하여간 지금의 지구촌에서 가장 특이한 곳이 한국인데 전 세계문명의 쓰래기통이라 왜국인들에게 불릴만큼 거의 모든 문명적 형태가 한국땅에 몰려있다는 것으로 각자가 가진 너무나 강한 개성들로 인해 서로 융합되지 못하고 대치하고 있는 국면이다보니 왜국인들에게는 당연히 문명의 쓰래기통으로 보일지도 모르나 이는 쓰래기통으로만 봤기에 그렇지 만약에 용광로로 본다면 언제든 불길만 당겨진다면 각자의 개성들을 녹이고 하나로 융화시키는 뜨거운 용광로의 역할을 다할 것이라 본다. 그때에 세계인들은 이 한국땅을 주목할 것이라 보는데 21세기 세계문명의 대변혁을 이끌어낼 정신적 리더로서의 역할을 한국이 충분히 해 낼 수 있을 것이라 예측해 본다. 최근들어 그런 조짐들을 사회 곳곳에서 나는 보았다.>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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