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한국학의 가장 큰 특징은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현실적이라는 것은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과 연계된 학문이라는 것으로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든 수긍할 수 있는 현실을 바탕으로 한 현실논리의 근거를 확보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고대한국학은 보편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걸림이 없다.
서양학이든 동양학이든 정신이든 물질이든 종교든 과학이든 모두 천부경의 우주론으로 포용된다.
이는 고대한국학이 가진 가장 큰 특징으로 보편적이지 못한 학문일수록 포용성이 좁아진다.
따라서 아무리 논리적 짜임새가 치밀하고 훌륭하다 해도 그 논리가 담고 있는 포용성에 한계가 있다는 것은 이미 보편성을 잃고 있다는 뜻이 된다.
현재 나타난 종교와 과학을 망라한 동서의 학문 중에 이러한 포용성을 확보하고 있는 학문이 있는가?
단언하건데 거의 없다고 본다.
모두가 자신의 논리가 옳다고 주장들은 하고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상대의 논리를 포용 하는 데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어느 주장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 그러한 주장들을 뒷받침하고 있는 논리적 근거가 보편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현재의 동서양학이라 본다.
보편성이란 연결성과도 통한다.
따라서 종교, 정치, 경제, 수학, 과학, 심리학, 의학 등등 인간문명 전반에 걸쳐 형성된 학문체계들과 소통의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학문체계 일수록 보편적이라는 의미가 된다.
학문이란 그러한 보편성을 전제로 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 못하고 어느 한 분야에 갖혀 그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면 그 논리가 아무리 치밀하고 훌륭해도 결국은 가지밖에 되지 못한다.
몸통은 가지를 포용할 수 있어도 가지는 몸통의 부분일 뿐이다.
오늘날 각가지 가지들이 몸통 노릇을 하려고 과도하게 자신의 주장을 내 세우니 서로 부닥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러한 혼돈상태에 처해 있는 것이 지금의 인류문명의 현 주소라 나는 판단한다.
20세기가 분열과 분석의 시대였다면 앞으로의 시대는 통합과 종합의 시대라 될 것이라 예측하는데 그 중요한 핵심에 고대한국학이 있다고 나는 본다.
따라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학자라면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소통이라는 서로간의 통합과 서로의 주장을 종합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학문적 길을 잡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자 세계적인 석학으로 성장해 인류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는 대학자가 될 수 있으리라 본다.
그러므로 지금의 시대에 대한민국이라는 곳에서 살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이미 세계적인 석학이 될 수 있는 가장 큰 기회를 잡았다는 것을 학문하는 사람이라면 행운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라 본다.
아직은 많이 부족하나 나 또한 그 행운을 잡은 사람 중의 하나라 생각하고 있다.
고대한국학의 핵심인 천부경의 우주론을 남겨준 선조들과 그러한 문화적 틀 속에서 그 문화적 향취를 듬뿍 느낄 수 있게 나를 낳아 잘 길러주신 부모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다.
젊은 날에는 나에게 가해지는 삶의 압박이 너무 고통스러워 모든 것을 원망하는 못난이 였으나 세월이 흐르며 그 모든 것이 나를 키우고 단련시켜준 약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나는 모든 것이 새로워 보였고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생겨났었다.
오늘날 고대한국학을 가장 잘 담고 있는 것이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쓰고 있는 우리말이라 본다.
우리말 자체가 천부경의 우주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말이니 우리말 보다 고대한국학의 의미를 더 잘 전달해 주는 말은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말을 바탕으로 한 한국학의 정립은 가장 쉽고도 간결한 학문체계로 대중들에게 닦아 설 수 있으리라 본다.
나아가 우리의 주체성을 확보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도 하며 소통의 단절과 그로인한 학문적 분열로 혼돈상태에 빠진 오늘날의 동서양학에 소통과 통합의 길을 제시해 주는 세계학문의 중심으로 발돋움 할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으리라 본다.
꿈은 꿈을 꿀 줄 아는 사람만이 이룰 수 있다.
현실에 안주해 꿈을 꿀 줄 모르는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 미래를 준비하는 희망의 꿈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천부경에 나타나는 천부경이라는 제목은 후대의 사람들이 편의상 가필한 것으로 그냥 천경신고라 해서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한 쌍으로 불렀음이 한단고기에 나타난다 보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천부경이라는 제목은 맞지 않는 것으로 하늘이 내 보이는 땅의 이치를 나타내는 것이 천부의 이치이기에 땅에 속하는 개념인 천(天)자를 쓴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고 하늘과 관련된 개념인 예를 들면 은문천부경의 첫 문장과 끝 문장에 쓰인 두 개의 무( , )자와 같은 문자를 써서 하늘이 내보이는 땅의 이치란 의미로 제목을 붙여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땅의 개념만 나타나는 동양학의 테두리 안에 고대한국학이 갗혀 변질되다 보니 하늘을 나타내는 문자는 거의 쓰이지 않거나 변질 된다 보는데 두 개의 무( , )자의 의미가 동양학에서 거의 사라지고 그나마 남은 의미조차 하늘과는 별 상관이 없는 없음을 의미하는 이상한 자원해석과 풀이인 없을 무(無)자 하나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이를 잘 보여 준다고 본다.
따라서 우리말로 바꾸어 새롭게 제목을 붙인다면 하늘이 내보이는 땅의 이치를 밝힌 책 정도로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이를 더 줄인다면 하늘과 땅의 이치 정도가 좋다고 본다.
동양학에 나타나는 무극(無極)이라는 말도 하늘과 관련된 말이라 보는데 구약에 나타나는 태초(太初)라는 말과 같은 것으로 하늘, 무극, 태초라는 말은 말만 다를 뿐 모두 같은 의미로 동서양학에서 오늘날 이 개념은 거의 쓰이지 않거나 설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천부경에서는 이에 대해 숨겨진 도형과 문자 배치도를 통해 명확하게 그 개념적 정의를 내리고 있다고 본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동서양에서 오늘날까지 무심코 쓰고는 있지만 그 많은 숫자 중에서 하필이면 왜 백(100)이라는 숫자를 완전함이나 전체적인 의미로 쓰고 있는지 ㅡ<백성, 백점, 백 퍼센트, 백온 등>ㅡ 그 이유에 대해 제대로 설명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천부경으로 대표되는 고대한국학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며 하늘의 개념도 같이 사라지다 보니 동서양학 또한 그 뿌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 보는데 고대한국학에서 하늘의 개념은 전체와 완전함을 나타내는 개념이 되니 갑골(은문)천부경의 설계에서 하늘을 나타내는 숨겨진 도형을 이루고 있는 백(100)개의 꼭지점 자체가 전체와 완전함의 개념이 된다.
그러므로 천부경이 동서문명의 뿌리였기에 하늘의 개념적 의미가 동서양학에서 사라졌다 해도 그 흔적은 남게 되어 백(100)이라는 숫자가 오늘날까지도 완전함이나 전체라는 의미 등으로 쓰이게 된 이유가 되었다고 본다.
이런 흔적이 어디 한 둘인가?
구구단은 문자 배치도에 의해 만들어진 원리이고 십진수와 삼진수와 이진수 또한 문자 배치도와 연관이 된다.
공(工)자나 무(巫)자나 왕(王)자나 천(天)자 등과 같은 한문이나 은문에 나타나는 우주관과 관련된 문자들이 만들어지는 원리도 문자 배치도와 갚은 연관이 있다,
이러한 원리에 대한 언급은 한 삼사 개월 정도 삼태극에 올린 사백페이지 정도의 글을 통해 이미 다 말한 것들이다.
바둑판의 설계원리, 666, 칠성령, 다윗의 별, 중용의 원리, 팔쾌와 역의 성립원리와 용도 등등 동서양문명의 뿌리가 천부경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내용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이 언급했고 이 사람의 설명이 부족했을 수도 있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동서문명의 소통의 다리를 놓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은 중독, 왜독, 양독에 찌든 학문적 테두리 속에 같혀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 보는데 최소한 이 사람의 말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 기존의 학문적 상식을 완전히 깨트릴 수도 있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 놓았는데도 질곡의 늪에 빠진 한국학에 신선한 바람을 몰고 올수도 있다는 가능성 정도는 검토되어야 하나 그것조차 논의가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오늘날의 한국학이 스스로의 자정능력을 상실하고 수동적인 상태에서 얼마나 폐쇄적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동서양학의 학문적 상식들이 우물 안의 개구리가 본 하늘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볼 수는 없는가?
우리가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해서 그렇지 고대한국학은 우물 밖에서 본 하늘을 말한 것 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볼 수는 없는가?
이러한 가능성은 그동안 이 사람이 올린 글을 통해 기존의 동서양의 학문체계로는 설명은커녕 언급조차 하지 못했던 동서의 고대인들이 남긴 여러 흔적들이 천부경의 우주론을 통해 만들어지고 동서양에 전해지게 되었다는 설명을 통해 충분하지는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입증했다고 본다.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도 어느 누구의 주장이 맞고 틀리고를 따지기 이전에 동서의 고대인들이 남긴 여러 흔적들을 연결시켜 종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우주론적 틀과 그렇지 못한 우주론적 틀 중 어느 쪽이 더 보편성을 갖추고 있다고 보는가?
우물 속에서 본 하늘이든 우물 밖에서 본 하늘이든 하늘은 하늘이니 틀린 것은 아니나 그 포용성과 보편성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하늘이라고 다 같은 하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물 속에서 본 하늘만 하늘로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우물 속에서 본 하늘만 수용할 수 있지 다른 하늘은 밀어낸다.
그 하늘 이외에는 하늘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물 밖에서 본 하늘은 우물 속에서 보이는 모든 하늘의 실체이자 본체이니 어떤 하늘이든지 포용하는 보편성을 가진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동서의 학문체계들이 서로 포용하지 못하고 밀어낸다는 것은 포용성과 보편성이 모자란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이러한 상황에서 동서의 고대인들이 남긴 우주론적 흔적들을 포용하며 그 성립원리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고대한국학이 지금으로서는 동서양학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실체로서 하늘의 몸체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솔직히 외롭다.
삼태극에 글을 올리기 전 까지만 해도 이런 마음이 크지는 않았으나 지난 삼사 개월 글을 올리며 오늘날의 현실을 걱정하고 있는 한국인이라면 특히 학문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보다도 환영하고 격려를 해 줄 줄 알았는데 솔직히 실망스럽다.
지금까지 해 왔던 대로 사람들이 어떠하든 묵묵히 내 갈 길만 가면 되겠지만 인류가 나아가야할 새로운 꿈을 이끌어 내기에는 기존의 학문체계로는 한계에 부닥쳤다는 사실을 세계적인 석학들과 정신적 지도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과거의 왜곡된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매달려 있는 한국학의 현실이 나는 무척이나 안타깝다.
절박한 오늘의 현실을 직시 한다면 없던 것도 만들어내어야 할 처지에 천부경이라는 확실한 실체조차 부정하려 드니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기존의 체계로 안 된다면 과감하게 그것을 탈피하여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선구자적인 자세가 아닌가?
그러므로 새로움을 추구하는 자 만이 사업이든 학문이든 어떤 것이든 시대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따라서 학문이든 무엇이든 이미 자신이 원하는 답을 미리 정해놓고 보게 되면 원하는 답 이외에는 다른 답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려면 늘 비워 두어야 한다.
가득 채워진 그릇 속으로는 어떤 것도 담을 수 없고 담겨지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자신이 원하는 답을 미리 정해 놓았다는 것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것 이외에는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으로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있는 그릇의 공간이 남아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에고이고 아집이다.
따라서 늘 비어있는 그릇이어야 한다.
특히 공인은 그래야 한다.
그래야 무엇이든지 담을 수 있다.
따라서 학문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그래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학문을 위해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학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어디 학문뿐인가?
인간 문명의 모든 것이 그러하건만 정작 가장 중요한 인간이 빠진 오늘날의 현대문명과 그러한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는 동서의 학문체계들은 이미 스스로의 자정능력을 상실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기존의 동서양학에서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뜻이 된다.
고대한국학은 모든 우선순위가 인간이다.
인간을 천지인의 우주에서 가장 귀한 존재로 본다는 것이다.
즉 천(天)보다 인간을 우위에 둔다는 것으로 동양학의 인문학적 특색과 고대한국학의 인문학적 특색이 차이가 나는 가장 큰 대목인데 하늘이 만들어낸 땅으로 나타난 천지(天地)를 연결하고 완성시키는 가장 귀한 존재가 인간임을 인중천지일이라는 천부경의 핵심 문장으로 고대한국인들은 만 천하에 선포를 했다는 것이다.
대일의 하느님이 천지를 만들어낸 근본목적이 인간의 완성임을 선조들은 알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대리인으로 자처하며 만들어온 인간중심의 역사가 한단고기임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떤 분이 하신 질문이 있어 그에 대한 글을 쓰려고 했는데 쓰다 보니 이렇게 되어 버렸네요.
그 분에게는 조금 미안한 일이나 일에도 순서가 있는 것이니 천부 즉 천부경이라는 제목의 의미와 백이라는 숫자에 대한 설명으로 오늘은 그치겠습니다.
물어 오신 질문이 간단한 것 같아도 한꺼번에 설명하기에는 너무 광범위한 주제이니 이해를 바랍니다.
시작을 안했으면 모르겠으나 이왕에 시작한 일이니 확실하게 답을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