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동서양학을 불문하고 서로 간에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 주된 이유가 같은 의미이나 각기
다른 말을 쓰기 때문에 개념적 혼선이 생겨나기 때문이라 본다.
동양은 동양대로 서양은 서양대로 종교는 종교대로 과학은 과학대로 자신의 우주론적 틀 속에서 안주해
서로간의 소통의 다리를 놓을 생각보다는 자신의 울타리 속으로 상대를 끌어들이려는 이기적인 생각이 더 강하기 때문이라 본다.
학문이란 무엇인가?
인간을 위한 것이 학문이 아닌가?
인간이 먼저이지 학문은 그 다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학문은 그 반대로 가고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인간중심의 세상이 되려면 인간이 중심이 되어야 하지 학문이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 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고대한국학은 인류사 이래 최초로 인간중심의 학문이 정립되었던 의미 있는 시기라
본다.
따라서 인간을 중심으로 정립된 천부경의 우주론은 오늘날의 동서양학의 우주론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는
것으로 사 개월 정도 삼태극에 올린 이 사람의 글을 참고 하길 바라며 천부경의 우주론을 기본 틀로 해 개념적 정리를 간략하게 시도해 볼까 한다.
천부경의 우주론과 동서양의 우주론이 대비되는 가장 큰 차이점이 정신과 물질에 대한 개념으로 동서양학은
이러한 개념적 구분이 모호한데 비해 천부경은 확실한 개념적 정리를 하고 논리를 전개한다는 것이다.
즉 하늘에도 정신과 물질이라는 개념적 구분을 하고 땅에도 정신과 물질이라는 개념적 구분을 하며 논리를
펼쳐가는 것이 천부경의 우주론과 고대한국학이라면 동서양학에서는 이러한 개념적 구분이 없을 뿐 만 아니라 아예 논리적 틀 자체가 하늘을 정신으로
땅을 물질로 보는 이원론적 대립의 구조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천부경에서는 하늘이 갈라진 것이 땅이고 땅이 돌아가면 하늘이라는 것으로 상호 보완적인 것으로
보지 대립구조를 만들어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하니 기독교로 대표되는 유일(唯一)신관과 불교로 대표되는 다(多)신관이
하나로 연결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ㅡ<불교는 기독교와는 반대로 하늘을 부정한다고 본다.>ㅡ
아예 까놓고 이야기해서 유일신관과 다신관이 하나로 연결되어 부드럽게 통합되는 종교논리가 인류사 이래
천부경의 우주론 말고 이제껏 있었던가?
맨날 눈만 뜨면 영혼(靈魂)을 들먹이는 철학자나 종교인들의 이야기 속에 영혼이 무엇인지 우주론적 논리를 바탕으로 확실하게 설명하는 논리적
틀이 천부경의 우주론 말고 있었던가?
이것 하나만 보아도 기존의 동서양학과 천부경의 우주론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증명되리라 본다.
직설적으로 말해 오늘날의 동서양학에서 종교와 과학을 통합하는 논리가 있던가?
정신과 물질을 통합하는 논리가 있던가?
영과 혼을 통합하는 논리가 있던가?
그 비슷한 이론만 나와도 세계적인 사건이라는 것으로 동서양을 통 털어 당대 최고의 석학이라는 110명에게 오늘의 세계를 물어 그들의 생각을 정리한 2007년 판
엣지에서 출판한 ‘위험한 생각들“이란 책을 읽어 본다면 천부경의
우주론과 고대한국학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실감하게 되리라 본다.
이 사람이 워낙 이름이 없어 신뢰가 떨어진다 해도 세계적인 석학들이 한 말이라면 충분히 신뢰가 가지
않겠는가?
하여간 우리말 하늘에는 정신적인 하늘과 물질적인 하늘의 개념이 같이 들어있는데 정신적인 하늘로는
삼신의 근본인 유일신인 대일의 하느님을 의미하는 것과 천지인인 삼계의 근본인 물질적인 하늘을 의미하는 것으로 나누어지는데 천부경의 설계에 쓰인
정 중앙에 배치된 육(ㅜ)이 정신적인 대일의 하느님을 의미하게
되고 숨겨진 일원백점의 도형은 물질적인 하늘을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하늘을 근본과 바탕으로 생겨난 땅에도 정신적인 땅과 물질적인 땅의 개념이 나타나게 되는데
정신적인 땅으로는 대일의 하느님이 나누어진 다신(多神)인
삼신(三神)의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과 물질적인 하늘을 재료로
삼신의 하나님이 만들어낸 물질적인 땅으로 삼계(三界)의 개념이
나타나게 된다.
즉 천부경의 설계에 쓰인 정 중앙에 배치된 육(ㅜ)이 땅으로 나타난 정신적인 일신ㅡ<삼신>ㅡ의 하나님을 의미하게 되고 숨겨진 일원백점의 도형은 형상이라는 원(○)과
질료라는 방(□)으로 나타나는 물질적 땅인 삼계를 의미하게 된다.
따라서 육(ㅜ)은
숫자로서의 의미 이외에 하늘에 적용될 때는 대일의 하느님을 의미하게 되고 땅에 적용될 때는 삼신의 하나님을 의미하게 되는 것으로 이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우주정신을 의미하는 영혼(靈魂)이 되고 일원백점의
도형은 하늘에 적용될 때는 순수형상과 순수질료를 의미하게 되고 땅에 적용될 때는 형상과 질료를 의미하는 물질의 개념이 된다.
ㅡ<정신은 물리로 이해하고 물질은 물질적 세계로
이해해도 된다.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하느님은 본체의 우주정신을 하나님은 본체에서 갈라져 나온 삼신의 우주정신을
말하는 개념임을 꼭 숙지하기 바란다.>ㅡ
이를 정리한 도형기호가 원방각이고 태극과 삼태극의 그림문양이고 공(工)이고 영(0)과 일(一, ㅣ)의 개념이라 본다.
즉 영(0)은 영혼의 구분이 나타나지 않는 대일의 하느님을
의미하는 정신적 개념과 상대적인 물질적 구분이 나타나지 않은 순수현상과 순수질료를 의미하는 물질적 영(0)의
개념을 함께 가지고 있고 일(一, ㅣ)은 천일, 지일, 인일이라는
영혼의 구분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정신적인 개념과 천지인이라는 상대적인 물질적 구분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물질적 일(一, ㅣ)의 개념을 함께 가지게 된다.
즉 영(0)이 정신과 물질의 구분이 나타나지 않는 시작도
끝도 없는 하늘이라는 우주의 근본과 바탕이라면 일(一, ㅣ)은 영혼이라는 정신적 구분과 천지인이라는 물질적 구분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땅의 시작과 끝을 나타내는 숫자적 개념이
된다.
ㅡ<일시무시일과 일종무종일이라는 문장이 이를 설명하는
문장이 된다.>ㅡ
그러므로 하느님은 유일신을 나타내는 정신적 개념이고 하나님은 다신을 나타내는 정신적 개념으로 쓰이게
되는데 삼일신고에서는 유일의 하느님을 대일신으로 삼신의 하나님을 일신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본다.
그동안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포함한 고대한국학의 경전들이 제대로 해석이 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이제는 알게 되었으리라 본다.
이미 우주를 재어보는 우주론적 틀 자체가 기존의 동서양학과는 그 차원이 다른데 어설픈 동서양학의
잣대로 재려니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닭 잡는 칼로 소를 잡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따라서 하늘과 땅이라는 우리말 개념만 제대로 이해하고 그를 바탕으로 한 정신과 물질이라는 개념만
제대로 이해해도 팔만대장경이니 사서삼경이니 물리학이니 하는 동서양학은 논리적으로는 이미 정복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 둔다.
뜻있는 학인이라면 닭 잡는 칼은 이제 버리고 소 잡는 칼로 새 시대를 준비하는 세계적인 석학으로
성장해 주길 간절히 바래본다.
물은 낮은 데로 흘러 시내가 되고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
인간문명의 모든 학문 또한 그러한 순리로 결국은 흐르게 된다.
이미 세계학문의 흐름도 그러한 보편적 순리로 흘러가고 있는데 이러한 순리를 역행해서는 결국 자멸하게
된다.
삼태극에 올라오는 역사관련 글을 보아도 예전에는 알 수 없었던 새로운 사실들이 여러 경로로 밝혀져
공개되고 있다는 것은 시대의 흐름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이 사람도 세속에 뭍혀 살기는 하나 도인인지 세속인인지 구분이 잘 안 갈 때가 많다.
세속인이라 하기에는 좀 특이하고 도인이라 하기에는 너무 세속적이고 다만 일반인들 보다는 보는 눈이
조금 다른 것 같다는 차이 정도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