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읽어보시고 판단해 주시기 바랍니다.
갑(甲)
옥편에서는 이 문자를 "갑옷 갑"이라 읽고 있는데 억지로 같다 붙인다면 갑옷이라는 의미로 쓸 수는 있으나 이는 갑(甲)자가 만들어진 의미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풀이라 본다.
먼저 밭 전(田)이라는 문자부터 풀이를 한다음 갑(甲)이라는 문자와 이와 관련된 다른 여러 문자들에 대한 풀이를 생각나는 대로 할까 한다.
田=(ㅁ)+(ㅣ)+(ㅡ)
한자에서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입체적 형상을 의미하는 (ㅁ)의 기호에 수평적인 둘래나 경계를 의미하는 (ㅇ)의 기호를 통합해 사용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농작물을 키우는 논이나 밭의 둘래, 좀 더 크게 본다면 국가의 경계 등을 나타내는 기호로 (ㅁ)을 쓰고 있다고 본다.
ㅡ<田, 國 등등 상당수 있다고 본다>ㅡ
우리말 자음기호 (ㅁ)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입체적형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크게 보면 모든 우주나 생태계 등을 의미할 수도 있고 생명의 몸을 의미할 수도 있고 입체적인 상자나 집 등을 나타낼수도 있는데 알기쉽게 예를 들면 씨앗이나 열매를 둘러싼 딱딱한 껍질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리고 (ㅣ)는 수평적 음양운동의 기준을 의미하게 되고 (ㅡ)는 수직적 음양운동의 기준을 의미하게 된다.
따라서 田이라는 문자에서는 수직적인 생리적 성장과 수평적인 심리적 활동이 시작되는 기준을 의미하게 된다고 보는데 어떤 특정한 경계 안에서 생명이 수직수평의 기(氣)적 음양운동이 멈추어져있는 리화(理化)된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田이라는 문자를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전(田)이라는 문자에서 (ㅁ)의 의미를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크고 작은 입체적인 형상을 뜻하는 우리말 자음 (ㅁ)의 의미로 본다면 씨앗이나 열매를 둘러싼 딱딱한 껍질을 의미하게 되고 (ㅁ)의 안에 쓰인 (ㅣ)와 (ㅡ)는 수직수평의 생명활동이 나타나지않고 있음을 의미하게 되는데 겨울에 나타나는 초목의 상태처럼 생명활동이 나타나지 않고 있음을 나타내는 의미로 전(田)자를 쓸 수 있다고 본다.
ㅡ<수직수평의 시공간운동이 시작되고 끝나는 중심에는 우주정신이 있다는 의미로 십 (十)자를 쓸 수도 있는데 크게는 본체의 하느님을 의미할 수도 있고 좀 더 작게는 삼신의 하나님을 의미할 수도 있고 작게는 만물각자의 영혼의 정신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와 비슷한 의미로 만(卍)자가 있는데 十자가 씨앗이나 열매와 같은 기(氣)의 변화가 나타나지 않고 리(理)의 상태로만 있는 우주정신을 의미한다면 만(卍)자는 리(理)가 만들어내는 기(氣)의 변화가 나타나며 우주적 연기의 고리가 생겨나고 있는 상태를 나타내는 기호가 된다. 쉽게 말해 十자기호는 기(氣)의 시공간적 변화를 마치고 씨앗이나 열매 또는 겨울에 나타나는 초목과 같은 리(理)의 상태로 있음을 나타내는 기호가 되고 卍자 기호는 생명활동이 왕성하게 나타나는 봄과 여름의 연기적인 초목의 상태로 분화와 변화를 하며 기(氣)로 있음을 나타내는 고대인들의 기호라 보는데 우주를 나타내던 고대인들이 남긴 문명출발 초기의 문자기호들에 속하는 것들이라 본다. 十자 기호는 우리말 모음 (ㅡ)와 (ㅣ)의 결합으로 무언가 완성된 상태를 나타내는 기호인데 열 십, 열매라는 말을 살펴보기 바란다.>ㅡ 그리고 만(卍)자기호는 우주정신이 기(氣)의 시공간적 양태로 변화되며 만물이 연기적으로 얽혀 자연계의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기호가 되는데 이를 우주적으로 확대한 불교적 용어가 카르마이고 도형화 시킨 그림이 만다라 그림이라고 보면 된다. 따라서 十과卍을 대표적인 의미체로 내세운 기독교와 불교의 특색은 이 두기호의 의미만 제대로 알아도 종교적 핵심과 역사적 흐름을 꿰뜷어 볼 수 있다고 본다. 나아가 이 두 종교를 기본 바탕으로 세워진 문명적 특색도 꿰뜷어 볼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쉽게 말해 리(理)의 정신만 인정하고 기(氣)의 변화가 나타나는 물질적 양태를 부정하는 것이 十자 기호를 대표적 의미체로 하는 기독교계열이고 물질적 양태만 인정하고 정신을 부정하는 것이 卍자를 대표적 의미체로 하는 불교계열이라 본다. 둘 다 문제가 있는 것으로 정신이 물질이고 물질이 정신인데 리(理)만 인정하거나 기(氣)만 인정하고 한쪽을 부정한다는 것은 모순이 된다. 그러니 기독교는 이 현실을 다 거짓이라 부정하게 되기에 진리를 찾아 이 현상계를 해맬 필요가 없는데 원죄설이 나오게 되는 근본적 이유가 된다. 그러나 이 현실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 나이니 자신조차 부정할 수는 없고 해서 나와 하느님을 연결해주는 현실적 존재가 꼭 필요해지기에 그리스도라는 개념이 생겨나게 되고 그 대표적 인물이 예수가 되고 작게는 목사나 신부가 된다. 즉 나 대신 진리를 알려주는 예수나 목사나 신부와 같은 존재들의 말만 잘 듣고 따라가면 되기에 기독교인들에게는 너무나 편리한 인생이 된다. 반대로 불교는 리(理)의 정신을 인정하지 않고 기(氣)라는 물질적 양태만 인정하기에 어떤 식으로든 이 현실에서 진리를 찾아야만 한다. 그러니 불교인들은 필사적인 구도의 길을 찾아야 하는데 짧은 인생으로는 현상계의 모든 기(氣)의 연기적 변화태를 경험할 수는 없으니 그 대안으로 나온 것이 진리는 자신안에 다 갖추어져 있으니 깨달음을 얻으라는 것으로 대표적인 형태가 선불교라 본다. 팔만대장경과 같은 방대한 불교의 서적은 필사적인 구도의 길을 찾아가던 많은 선승들의 노력의 결실이 된다. 한마디로 불교는 너무나 진지하게 인생을 본다는 것이고 이와 반대로 기독교는 어떻게 살든 너와 나는 모두 죄인들이라 보기에 너무나 인생을 가볍게 본다. 그러니 구약 신약을 다 합쳐도 불가의 서적에 비한다면 그 양적인 면에서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나게 된다. 이들 두 종교인들의 보편적인 인생에 대한 시각도 그 정도의 차이라고 본다. 하여간 기독교와 불교는 진리를 찾는 방식이 극과 극으로 전혀 다른 것 같아도 극과 극은 통한다는 것으로 부디즘이 서양인들에게 파고들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가 된다고 본다. 따라서 서양인들은 맛보기 힘든 반대의 무엇이 불가에는 있기에 지금의 서양인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수 천 년을 통해 쌓여온 불가의 지혜라 보며 특히 한국의 선불교라 본다. 그리고 이 들 종교보다 비교적 늦게 나타난 것이 유교인데 정신과 물질의 양 측면을 같이 검토하면서도 정신과 물질을 하나로 볼 것인가 아니면 둘로 볼 것인가를 두고 피터지게 논쟁을 벌린 것이 리기일원(理氣一原)론과 리기이원(理氣二原)론이 된다. 리기일원론으로 우주를 본다면 태어날때는 모두가 평등하나 자신의 노력에 따라 인생은 달라진다는 민주주의사상이 나오는 기본바탕이 되고 리기이원론으로 우주를 본다면 모두는 태어나면서부터 차별화되기에 어떻게 인생을 살든 귀천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신분계급사상이 나오는 기본바탕이 된다. 조선은 철저한 신분계급사회였기에 민주주의 사상이 싹 틀 수 있는 이론적 바탕은 마련되어 있었으나 현실화되지는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조선말 동학도들이 보여준 흔적은 양반계급들이 몰락하는 틈을 타고 나타난 리기일원론을 바탕으로 싹튼 한국식 민주주의의 한 형태였다고 본다. 그 싹이 제대로만 피었어도 분단과 같은 비극은 없었을 텐데 너무나 아쉽다. 하여간 지금의 지구촌에서 가장 특이한 곳이 한국인데 전 세계문명의 쓰래기통이라고 외국인들에게 불릴만큼 거의 모든 문명적 형태가 한국땅에 몰려있다는 것으로 각자가 가진 너무나 강한 개성들로 인해 서로 융합되지 못하고 대치하고 있는 국면이다보니 외국인들에게는 당연히 문명의 쓰래기통으로 보일지도 모르나 이는 쓰래기통으로 만 보았기에 그렇지 만약에 용광로로 본다면 언제든 불길만 당겨지면 각자의 개성들을 녹이고 하나로 융화시키는 뜨거운 용광로의 역할을 다할 것이라 본다. 그때에 세계인들은 이 한국땅을 주목할 것이라 보는데 21세기 세계문명의 대변혁을 이끌어낼 정신적 리더로서의 역할을 한국이 충분히 해 낼 수 있을 것이라 예측해 본다. 최근들어 그런 조짐들을 사회 곳곳에서 나는 보았다. 지난 글에서 갑(甲)자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다가 옆길로 샜는데 한 주제에 집중해야 의사전달이 원활하게 되나 쓰다보니 그렇게 된것 같으니 양해를 구한다.
이와 비슷한 의미로 만(卍)자가 있는데 十자가 씨앗이나 열매와 같은 기(氣)의 변화가 나타나지 않고 리(理)의 상태로만 있는 우주정신을 의미한다면 만(卍)자는 리(理)가 만들어내는 기(氣)의 변화가 나타나며 우주적 연기의 고리가 생겨나고 있는 상태를 나타내는 기호가 된다.
쉽게 말해 十자기호는 기(氣)의 시공간적 변화를 마치고 씨앗이나 열매 또는 겨울에 나타나는 초목과 같은 리(理)의 상태로 있음을 나타내는 기호가 되고 卍자 기호는 생명활동이 왕성하게 나타나는 봄과 여름의 연기적인 초목의 상태로 분화와 변화를 하며 기(氣)로 있음을 나타내는 고대인들의 기호라 보는데 우주를 나타내던 고대인들이 남긴 문명출발 초기의 문자기호들에 속하는 것들이라 본다.
十자 기호는 우리말 모음 (ㅡ)와 (ㅣ)의 결합으로 무언가 완성된 상태를 나타내는 기호인데 열 십, 열매라는 말을 살펴보기 바란다.>ㅡ
그리고 만(卍)자기호는 우주정신이 기(氣)의 시공간적 양태로 변화되며 만물이 연기적으로 얽혀 자연계의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기호가 되는데 이를 우주적으로 확대한 불교적 용어가 카르마이고 도형화 시킨 그림이 만다라 그림이라고 보면 된다.
따라서 十과卍을 대표적인 의미체로 내세운 기독교와 불교의 특색은 이 두기호의 의미만 제대로 알아도 종교적 핵심과 역사적 흐름을 꿰뜷어 볼 수 있다고 본다.
나아가 이 두 종교를 기본 바탕으로 세워진 문명적 특색도 꿰뜷어 볼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쉽게 말해 리(理)의 정신만 인정하고 기(氣)의 변화가 나타나는 물질적 양태를 부정하는 것이 十자 기호를 대표적 의미체로 하는 기독교계열이고 물질적 양태만 인정하고 정신을 부정하는 것이 卍자를 대표적 의미체로 하는 불교계열이라 본다.
둘 다 문제가 있는 것으로 정신이 물질이고 물질이 정신인데 리(理)만 인정하거나 기(氣)만 인정하고 한쪽을 부정한다는 것은 모순이 된다.
그러니 기독교는 이 현실을 다 거짓이라 부정하게 되기에 진리를 찾아 이 현상계를 해맬 필요가 없는데 원죄설이 나오게 되는 근본적 이유가 된다.
그러나 이 현실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 나이니 자신조차 부정할 수는 없고 해서 나와 하느님을 연결해주는 현실적 존재가 꼭 필요해지기에 그리스도라는 개념이 생겨나게 되고 그 대표적 인물이 예수가 되고 작게는 목사나 신부가 된다.
즉 나 대신 진리를 알려주는 예수나 목사나 신부와 같은 존재들의 말만 잘 듣고 따라가면 되기에 기독교인들에게는 너무나 편리한 인생이 된다.
반대로 불교는 리(理)의 정신을 인정하지 않고 기(氣)라는 물질적 양태만 인정하기에 어떤 식으로든 이 현실에서 진리를 찾아야만 한다.
그러니 불교인들은 필사적인 구도의 길을 찾아야 하는데 짧은 인생으로는 현상계의 모든 기(氣)의 연기적 변화태를 경험할 수는 없으니 그 대안으로 나온 것이 진리는 자신안에 다 갖추어져 있으니 깨달음을 얻으라는 것으로 대표적인 형태가 선불교라 본다.
팔만대장경과 같은 방대한 불교의 서적은 필사적인 구도의 길을 찾아가던 많은 선승들의 노력의 결실이 된다.
한마디로 불교는 너무나 진지하게 인생을 본다는 것이고 이와 반대로 기독교는 어떻게 살든 너와 나는 모두 죄인들이라 보기에 너무나 인생을 가볍게 본다.
그러니 구약 신약을 다 합쳐도 불가의 서적에 비한다면 그 양적인 면에서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나게 된다.
이들 두 종교인들의 보편적인 인생에 대한 시각도 그 정도의 차이라고 본다.
하여간 기독교와 불교는 진리를 찾는 방식이 극과 극으로 전혀 다른 것 같아도 극과 극은 통한다는 것으로 부디즘이 서양인들에게 파고들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가 된다고 본다.
따라서 서양인들은 맛보기 힘든 반대의 무엇이 불가에는 있기에 지금의 서양인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수 천 년을 통해 쌓여온 불가의 지혜라 보며 특히 한국의 선불교라 본다.
그리고 이 들 종교보다 비교적 늦게 나타난 것이 유교인데 정신과 물질의 양 측면을 같이 검토하면서도 정신과 물질을 하나로 볼 것인가 아니면 둘로 볼 것인가를 두고 피터지게 논쟁을 벌린 것이 리기일원(理氣一原)론과 리기이원(理氣二原)론이 된다.
리기일원론으로 우주를 본다면 태어날때는 모두가 평등하나 자신의 노력에 따라 인생은 달라진다는 민주주의사상이 나오는 기본바탕이 되고 리기이원론으로 우주를 본다면 모두는 태어나면서부터 차별화되기에 어떻게 인생을 살든 귀천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신분계급사상이 나오는 기본바탕이 된다.
조선은 철저한 신분계급사회였기에 민주주의 사상이 싹 틀 수 있는 이론적 바탕은 마련되어 있었으나 현실화되지는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조선말 동학도들이 보여준 흔적은 양반계급들이 몰락하는 틈을 타고 나타난 리기일원론을 바탕으로 싹튼 한국식 민주주의의 한 형태였다고 본다.
그 싹이 제대로만 피었어도 분단과 같은 비극은 없었을 텐데 너무나 아쉽다.
하여간 지금의 지구촌에서 가장 특이한 곳이 한국인데 전 세계문명의 쓰래기통이라고 외국인들에게 불릴만큼 거의 모든 문명적 형태가 한국땅에 몰려있다는 것으로 각자가 가진 너무나 강한 개성들로 인해 서로 융합되지 못하고 대치하고 있는 국면이다보니 외국인들에게는 당연히 문명의 쓰래기통으로 보일지도 모르나 이는 쓰래기통으로 만 보았기에 그렇지 만약에 용광로로 본다면 언제든 불길만 당겨지면 각자의 개성들을 녹이고 하나로 융화시키는 뜨거운 용광로의 역할을 다할 것이라 본다.
그때에 세계인들은 이 한국땅을 주목할 것이라 보는데 21세기 세계문명의 대변혁을 이끌어낼 정신적 리더로서의 역할을 한국이 충분히 해 낼 수 있을 것이라 예측해 본다.
최근들어 그런 조짐들을 사회 곳곳에서 나는 보았다.
지난 글에서 갑(甲)자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다가 옆길로 샜는데 한 주제에 집중해야 의사전달이 원활하게 되나 쓰다보니 그렇게 된것 같으니 양해를 구한다.
갑(甲)자는 전(田)자와 비슷한 의미이나 전(田)자가 씨앗이나 열매와 같은 리(理)의 상태로만 있는 생명을 의미한다면 갑(甲)자는 딱딱한 껍질을 깨고 씨앗에서 처음으로 리화(理和)되어 있던 정보가 기화(氣和) 되어 물질적 양태로 발아하는 형상을 본 뜬 글자로 천간과 관련짔는다면 초봄과 관련시킬 수 있다고 본다.
옥편에서는 갑(甲)자를 씨앗에서 싹이트는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라 하는데 이는 농사와 관련되어 농경을 해보지 못한 사람들의 견해이지 농사를 지어본 사람들은 식물의 씨앗에서 떡잎이 생겨난 후 처음으로 생겨나는 것은 뿌리라는 것을 잘 안다.
즉 식물의 씨앗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떡잎은 뿌리도 아니고 싹도 아닌 중간형태로 뿌리라고 할 수도 없고 잎이라고 할 수도 없는 상태다.
따라서 이를 뿌리나 싹으로 볼 수는 없는데 떡잎에서 처음으로 생겨나는 것이 뿌리임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우리밥상에 일상적인 밥반찬으로 자주올라오는 콩나물이다.
여러분이 보기에 콩나물의 떡잎에서 길게 자라나오는 것이 뿌리같은가 싹 같은가?
콩나물을 밥반찬으로 자주 접하는 한국인들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서 그렇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갑(甲)자가 딱딱한 껍질을 깨고 싹이나오는 모습을 본 뜬 글자라는 옥편의 자원풀이가 모순임을 간파할 수 있다.
따라서 전(田)자와 다르게 (ㅁ)의 아래 밖으로 (ㅣ)를 내려그려 갑(甲)자로 쓴 것은 식물이 뿌리를 내리는 형상을 본 뜬 글자로 아직 뚜렷하게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생명활동이 보이지 않게 뿌리내리고 있는 상태를 나타내는 문자라 본다.
이와 반대의 의미로 (ㅁ)의 밖으로 (ㅣ)를 위로그려 초목이 싹을 트는 형상을 본 뜬 글자로 말미암을 유(由)가 있다고 본다.
봄이 완연하게 나타난 상태를 나타내는 문자로 쓸 수 있다고 보는데 무언가 원인이 있었기에 결과가 나타난다는 의미로 말미암을 유(由)자를 현재 쓰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봄이 깊어져 초목이 싹을 티우고 꽃을 피우는 결과를 볼 수 있다는 것은 그 이전에 초목이 뿌리를 내린 원인이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것으로 보편적으로 초목은 뿌리를 내리지 않고는 자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대지아래로 초목이 뿌리를 내린 원인이 있었기에 싹이라는 결과를 볼 수 있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문자가 유(由)자라 본다.
이런 뜻으로 쓰이는 한자용어로 유래(由來), 유서(由緖), 리유(理由) 등이 있다고 본다.
전(田)에서 갑(甲)으로 간다음 다음 단계로 진행되는 초목의 상태를 나타내는 문자가 신(申)자로 보는데 옥편에서는 무언가를 편다는 펼 신, 원숭이 신, 아홉 번 째 지지(地支)라고 되어 있다.
초목이 뿌리내리고 싹을 튀우고 나면 왕성하게 성장을 하게 되니 봄을 지나 여름으로 넘어가면서 초목은 맹렬한 속도로 성장하게 된다.
따라서 펼 신으로 그 뜻을 쓰는 것은 가능하나 원숭이 신으로 쓰는 것은 좀 억지가 있다고 보는데 겨울을 지나 봄, 여름, 가을로 가며 초목이 성장하는 모습은 너무나 신비롭고 오묘하다.
그렇기에 자연이 부리는 재주는 황홀하기까지 한데 동물중에서 잔재주가 뛰어난 것이 원숭이니 억지로 같다 붙인다면 원숭이 신으로 쓸 수는 있으나 이 문자가 만들어지는 원리를 알고 써야 문자적 왜곡을 막을 수 있다.
천간(天干)이 삼계와 만물의 수직적 관계를 통해 변화하는 순환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지지(地支)는 너와 내가 상대적 관계로 부딪치며 변화하는 인간의 심리적인 의식과 사회적인 인간문명의 순환상태를 나타내는 것인데 지지(地支)에서 지(支)라는 인간문명과 관련된 것이 신(申)으로 인간문명이 뿌리내리고 싹을 티운다음 초목이 왕성하게 자라는 여름과 같이 화려하게 분화하며 최고조로 변화하는 상태를 나타내는 문자가 신(申)이 된다.
오늘날의 현대문명이 이와 같은 상태로 보면 되는데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상태를 나타내는 문자가 호랑이 유(酉)자로 닭 유로 읽어서는 안된다고 전에 설명했었다.
동서를 막론하고 나타나는 예언형태들이 나오는 근본배경이 지지(地支)라고 보는데 오늘날 천간(天干)과 지지(地支)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고 엉뚱하게 육십갑자라는 력이나 사주팔자 같은 것으로만 연관시켜 쓰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하다.
지지(地支)는 아마 가장 오래된 예언서라고 이해하면 되리라 보는데 구세주나 미륵과 같은 개별적인 존재와 관련된 것이 지(地)이고 인간문명과 관련된 것이 지(支)라고 이해하면 되리라 본다.
ㅡ<천간(天干)과 지지(地支)가 각기 다른문자로 표기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는 것으로 한자가 만들어지는 원리와 그 뜻을 제대로 모르니 천간(天干)과 지지(地支)속에 담긴 핵심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고 본다.>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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