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파란 1호(2016년 봄호)
편집부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B6 / 360쪽
2016년 3월 1일 발간
정가 15,000원
ISSN 2466-1481
바코드 9772466148008 61
신간 소개
<계간 파란> 1호가 2016년 3월 1일,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이하 ‘(주)파란’으로 약칭)’에서 발간되었다. <계간 파란>은 연 4회 발간 예정인 문학 관련 정기 간행물로, 이미 여러 매체들을 통해 독자들께 약속드린 바와 같이 기존의 문예지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선보인다. 즉 <계간 파란>은 매호 ‘이슈(issue)’와 ‘신작시’ 두 가지 코너로만 짜인 단행본에 준하는 체제로 간행된다. 이처럼 계간지라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을 다양한 코너들을 과감히 떨쳐 버리고 단일 이슈와 신작시로만 지면을 기획한 까닭은, 지금-여기 한국시의 근본적인 화두이자 가장 긴급한 문제일 수 있을 그 어떤 이슈를 설정하고 탐구함으로써 그것의 구도와 흐름과 비전을 다른 방향으로 전환시킬 ‘파란’을 창출하고자 해서이다.
그 첫 번째 이슈는 ‘사건들’이다. <계간 파란> 1호의 편집진이 첫 번째 이슈로 ‘사건들’을 선택한 까닭은 한국 현대시사를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시각과 새로운 문제틀에 입각하여 다시 조명하고자 뜻해서이다. 즉 <계간 파란> 1호의 편집진은 알랭 바디유(Alain Badiou)와 질 들뢰즈(Gilles Deleuze)가 제안한 독법에 어깨를 나누어 지금까지 우리 앞에 제출되었던 이런저런 ‘문학사’ 혹은 ‘시사(詩史)’라는 이름표가 붙었던 출간물들의 세계관과 역사관, 시간관을 폐지하고, 더 나아가 그것들이 형성해 왔던 의미소들을 해체, 재구성하고자 ‘사건들’이라는 제하에 11분의 글을 모셨다.(다음 단락은 그 글들의 대강이다.) 그리고 미리 말하자면 이러한 작업은 앞으로 <계간 파란>을 통해 지속될 것이다. 알랭 바디유의 말처럼 진리를 형성하는 과정은 계속적이고 내재적인 단절의 그것이기 때문이다.
● 이찬은 ‘사건’으로서의 한국 현대시사의 구성 가능성의 참조점으로 알랭 바디유와 질 들뢰즈의 논의들 가운데 그 핵심만을 솜씨 있게 선별하여 제시하고 있다.
● 노춘기는 ‘관동대진재’라는 실제 사건과 그 사건 이후 김소월의 안타까운 시력(詩歷)에 대해 실증적 자료들을 토대로 기술하고 있다.
● 장석원은 살아생전 남긴 단 한 권의 시집으로 한국 현대시사의 앞자리를 차지한 한용운의 시를 통해 현대시의 출발점이 실은 산문시였다는 사실을 지면에 새겨 넣는다.
● 이근화는 정지용의 당시 번역 작업과 절창 「유리창」의 창작 간의 미묘한 교감을 들려주고 있다.
● 장철환은 한국 현대시사에서 다양한 의미의 분기의 첫 발생지로 이상을 지목한다.
● 박민규는 한국전쟁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 처한 임화의 그 전후 사정을 세밀히 그려 보인다.
● 조강석은 부정적 세계에 연루된 주체가 그 사실을 수락하고 마침내 극복하는 치열한 도정을 김수영을 통해 드라마틱하게 구성하고 있다.
● 고봉준은 사건적 지위로서의 창비의 출현에 앞서 당시의 여러 맥락들과 그 조건들을 하나하나 다시 개켜 세움으로써 현재 한국 문단이 잊고 있는 어떤 진리들을 다시금 일깨운다.
● 이경수는 이성복, 황지우, 김정환, 최승자 네 시인을 꼼꼼하게 다시 읽음으로써 광주의 상흔을 딛고 그들이 이후 어떻게 타자에 대한 윤리 곧 ‘사랑’으로 진입하는지를 한 땀 한 땀 적고 있다.
● 한래희는 박노해의 시들을 소환하여 ‘불온한’ 문학을 꿈꾸는 이들에게 ‘몫이 없는 자들’의 공간 창출과 체제와의 ‘불화’가 왜 끝나지 않는 ‘영원한 과업’이어야 하는지를 논변한다.
● 박상수는 이천년대의 사건이라 칭할 수 있을 황병승의 시집의 출현이 가능할 수 있었던, 그러나 결코 그 누구에 의해서도 주목받지 못했을 어느 한밤의 이야기를 그 특유의 따사로운 시적 문체로 진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 <계간 파란> 1호에는 아직 첫 시집을 발간하지 않은 권민경, 권민자, 김승일, 김정웅, 김종연, 김하늘, 김호성, 류성훈, 박세미, 안웅선, 최원, 최원준, 한인준 등 13명의 신인들의 시가 각각 3편씩 실려 있다. 이들 중 절반 이상은 곧 첫 시집을 발간할 계획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 만큼 이들의 시를 접하는 일은 가깝게는 올해와 내년 그리고 좀 더 멀게는 2010년대 후반기의 시의 지형도를 미리 짐작해 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여름에 발간될 <계간 파란> 2호에는 이들을 포함한 신인들의 시 세계에 대한 평론가와 시인 각 한 분의 글이 게재될 예정이다.
<계간 파란>의 편집진은 상임 편집 위원과 매호 이슈에 따라 위촉한 비상임 편집 위원으로 구성되는데, 이번 호의 편집진은 박상수, 이찬, 이현승, 장석원, 장철환이다. 그리고 <계간 파란>의 여름호의 이슈는 ‘시론’이며, 가을호의 이슈는 ‘들뢰즈’다.
차례
002 권두언 불멸
issue 사건들
012 이 찬 날짜들, 사건들의 현시와 의미들의 계열화
040 노춘기 건질 수 없는 허무 속으로
059 장석원 자유시, 산문시, 현대시—한용운
077 이근화 유리의 안과 밖—“琉璃에 차고 슬픈 것이 어린거린다”(정지용, 「琉璃窓」, 1929년 12월)
094 장철환 「오감도」에 대한 난해, 기타
127 박민규 너 어느 곳에 있(었)느냐—정치의 중상(中傷)과 문학의 중상(重傷)
145 조강석 주전자의 조용한 물 끓는 소리
166 고봉준 ‘창비’라는 사건, 계간지의 탄생
186 이경수 광주의 상흔과 시적 실천의 분기—1980년대 시에 남긴 광주의 흔적과 질문들
215 한래희 <노동의 새벽>과 ‘불온한’ 문학이 되기 위한 조건
238 박상수 훌라후프 돌리는 밤—2005년, 문예중앙 시선의 등장과 어떤 밤에 관한 이야기
poem
262 권민경 편도선의 역사 외 2편
270 권민자 안토르포파지(anthropophagy) 외 2편
278 김승일 적분 외 2편
290 김정웅 포말하다 외 2편
300 김종연 생일 외 2편
308 김하늘 블루 넌 외 2편
315 김호성 고개를 높이 들고 외 2편
322 류성훈 의설(義舌) 외 2편
328 박세미 꾀병 외 2편
334 안웅선 바빌로니아의 달 외 2편
341 최 원 모란 외 2편
348 최원준 나뭇잎을 생각하다 1 외 2편
353 한인준 아 외 2편
권두언
불멸
*
새로운 문학사의 승리. 이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지금-여기의 시에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시도해야 하는가. 문학사는 시의 시작과 종말을, 시인의 시작(詩作)과 작품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 「공무도하가」에서 2016년 1월의 현대시까지 문학사는 연속되고 있는데, 지금 탄생하고 지금 소멸하는 시와 시인이, 실체가 없는 문학사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문학사는 당대의 요구에 따라 끊임없이 재편된다. 고정될 수 없다. 현재의 남・북한 문학사와 미래의 통일문학사가 어떻게 기술될 것인가에 대해 우리는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역사가 문학사를 규정한다. 문학사는 문학으로 기록된 것들을 기억하는 어떤 (역사의 그것과는 같을 수 없는) 형태를 지닌다. 우리는 오늘의 시에 의해 구성되고 있는 현재의 문학사와 미래에 그것을 재구성하려는 의지의 실체를 파악하고 있다. 이후에 기술될 문학사를 관통하는 어떤 힘을 새롭게 바라보려고 한다. 그 힘을 우리는 ‘산문’이 확장시키는 시의 ‘개진’이라고 여긴다. 한국 현대시사에 아로새겨진 산문의 기원과 그 운동의 흐름을 추적한다. 산문과 조응하여 미래의 한국시가 새로운 시사(詩史)를 구성하는 양상은 어떠할 것인가.
문학사의 승리. 이것은 가능하다. 우리는 지금 여기의 시에서 산문을 본다. 그들은 산문과 시의 융합을 시도하고 있다. 문학사는 ‘산문-시’의 운동과 투쟁과 성공과 실패와 만남과 이별을, 시인의 죽음과 부활을 기록할 것이다. 시는 그 모든 것을 포함한다. 시는 그 모든 것을 넘어선다. 시는 그 모든 것과 분별되지 않는다. 시는 시가 아닌 것, 시가 될 수 없는 것을 알지 못한다. 시는 자유이다.
‘사건들’, 그것은 2016년 봄에 우리가 만드는 계간 <파란>의 첫 아젠다다. 이는 우리의 창간호를 단행본에 가까운, 그 어떤 새로운 것으로 출현시키고자 하는 명확한 의지에서 비롯된다. 또한 우리 시대 한국시의 근본적인 화두인 동시에 가장 긴급한 문제일 수 있을 최선의 아젠다를 설정함으로써, 아니, 그것의 현재적 배치와 판도와 방향을 전환시킬 수 있는 파란을 창출하겠다는 뜻을 포함한다. 따라서 저 아젠다는 지금까지 익숙하게 보아 왔던 이런저런 문학사 또는 시사라는 이름표를 붙였던 출간물들의 통념이나 그 지식 체계의 안정성을 따르지 않을 뿐더러, 그것들이 이루어 왔던 기왕의 의미소들을 해체-재구성하겠다는 의지를 제 뒷면에 품는다.
물론 우리가 새롭게 출현시키고자 하는 사건들은 한국 현대시의 역사에 복잡다단하게 주름져 있는 무수한 지층들과 협곡들, 아니, 그 역사적 지력선의 궤적과 동선들에 숨겨져 있을 것이 틀림없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리라. 그러나 저 사건들이 그야말로 사건의 지위와 위상을 갖기 위해서는, 다른 여러 상황들과 배치들을 뒤바꿔 놓을 수 있는 물리적 표면 효과와 정서적 감응 현상들을 반드시 품고 있어야만 한다. 결국 사건들이란 그것이 일어난 날짜들과 상황들에 포함된 신체적・정서적 영향력과 감염력을 가리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와 결합되어 있었던 계절과 기후와 대기의 형세와 사물들의 배치와 정서적 감염력의 강도들을 모두 아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그 모든 현재적 상황들을 지배하고 있는 백과사전적 지식 체계와 그 통념적 안정성의 질서에 구멍을 뚫어 버리면서 도래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저 사건들은 응당 제 자신을 지속적으로 탐색해 나갈 충실성의 주체를 세우는 과정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를 통해 한국 현대시의 그야말로 사건들이, 나아가 다양한 예술적 짜임들이 상호 경쟁하고 해체-재구성을 거듭하면서 스스로 만들어 내는 그 시간적 유효성의 궤적들과 역사의 지력선들이, 우리 눈앞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실감 어린 형상들로 나타날 것이다.
단순하다. 우리는 가능한 일을 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을 상상력이라는 말로 바꿔서 이해하고, 다시 그 상상력에 아픔이나 상처라는 인간의 말을 포함시키고, 다시 ‘같이 아픔’이라는 삶의 의지를 정향시켰다. 따라서 우리는 보편성이라는 말을 수용의 넓이로 개별성이라는 말을 인식의 깊이로 이해했으며, 우리는 진심이라는 말을 무용하게 생각하고, 최선이라는 말의 공허를 내려다보았으며, 의문이라는 막막함의 편에 선 것이다. ‘그때도’ 지금처럼 가능한 꿈을 꾸었을 것이고, 얼마간 그것은 뼈아픈 후회의 보충물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당연하거나 더 나은 어떤 것을 위한 추구가 거절되는 완벽한 폐허가, 그러므로 근대인들이 만나고자 했던 심연이다. 끝에 도달하지 않으면 시작을 볼 수 없는 아이러니, 어떤 것도 새롭지 않기 때문에 폐허로 걸어 들어가야만 했던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작은 의미에 매달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시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먼지가 우주를 품는 것. 그것은 본질 추구적이지만 이념이 아니고, 구체와 사실의 형식이지만 구원이고, 연대기 속에서 완성되지만 완성의 순간이 곧 개방의 순간이므로 탈역사적이다. 인간의 역사이지만 불멸인, 사건은 존재다. 존재를 규정하는 모든 억압이 부서지는 심연의 순간, 존재가 사건이다.
1.
바로 턱밑까지 왔다.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눈의 약점이 아니라 두려움에서 비롯한 정신의 혼미 때문이다. 분연히 일어서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분분히 흩어질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을 바로 보지 못하는 자의 비애다. 우리는 항상 전진할 것이다. ‘전진’이란 책의 표지에 붙박인 사어가 아님을 믿는다.
2.
‘상전벽해’란 말이 있다. 지금 우리 문단의 지형에 대한 얘기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이 대지가 아니라면, 일엽편주를 타고 창해를 건너기를 바라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노아의 방주가 아니더라도 제 스스로 풍랑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바람을 탓할 수는 없지 않은가. 지금은 파랑의 높이와 방향을 가늠할 때이다.
바람과 파도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그 결에 몸을 싣는 유연이 필요하리라. 일렁이는 파도 속에서라도 흔들림 없이 정주하기란 수월치 않다. 자기 나침반은 주위의 자장에 동조하고 극점에서 망동한다. 자북이 아니라 진북에 정향되어 있어야만 한다. 팽이처럼 온몸으로 도는 자만이 엄정함으로 전진할 수 있다. ‘자이로컴퍼스’로부터 회전체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3.
항행은 두려운 것이다. 허나 아름다운 것이기도 하다.
현기증과 멀미는 ‘시’와 ‘사건들’로부터 출항하는 자들이 견뎌야 할 몫이다.
나머지는 불안일 뿐이다. 불안을 떨치는 유일한 방도는 생리의 무두질에 있다.
나상의 면목을 보라. 오로지 울력하는 형안이다.
품새가 이런 식이라면, 일의 결과를 따져 물을 필요도 없겠다.
‘파란’과 함께하는 모든 이에게 감사할 뿐이다.
그의 시와 글에 경의를 표한다.
책 속으로
‘날짜들’. 그것은 이 책이 현시하려는 ‘사건들’의 중핵을 이룬다. 또한 이 둘이 서로를 감싸면서 불러일으키는 사유의 벡터는 한국 현대시의 역사를 기왕의 것들과 전혀 다른 문제틀에 입각하여 탐사하려는 우리의 기획을 암시한다. 우리는 한국 현대시의 역사에서 어떤 사건들이 일어난 날짜들을 찾아내려 할 뿐더러, 그 시공간적 구체성이 뿜어낸 고유한 감각적 울림들과 더불어 그 사후적 효과들을 함께 기록하고자 한다. 이는 사건들이 일어난 바로 그 순간, 그 날짜들에 담긴 신체적 공명 현상과 정서적 감염의 힘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떤 사건이 이후 발생한 다른 사건들과 접속되고 결합되면서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어떤 의미 계열의 매듭과 그 시간적 유효성의 궤적을 에두르는 것이기도 하다. ―이찬
대진재 당시에도, 그 직후에도, 심지어 해방 후에 조선인에 의한 증언이나 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당대에 강력하게 이루어진 통제의 효과에 더하여 이후의 역사적 무관심이 초래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관동대진재는 그 자체로서도 참혹한 것이지만, 소월뿐만 아니라 당대의 누구에 의해서도 차마 말해질 수 없었던 대진재는 그 ‘말해서는 안 된다’는 외적・내적 검열의 측면에서도 심각한 트라우마를 당대의 조선인과 지식인들에게 남겼다. 그것은 한마디로 ‘거대한 절망’이라고 말해져야 할 것이었다. 동경대진재의 계엄군 총사령관이 조선 총독이 되는 동안, 동경과 조선에서 소월이 맞닥뜨렸던 일본 제국의 실상, 식민지 치하에서의 조선의 미래에 관한 그 절망은 그의 마지막 무대였던 구성에서 고통스럽게 재확인되고 있었다. ―노춘기
산문은 (서정)시의 적이 아니다. 시의 형식 지표는 리듬이 아니다. 현대시의 정해진 형식은 없다. 현대시는 자유시이다. 자유시이기 때문에 현대시이다. (중략) 한국의 현대시는 ‘자유시-산문시’로 출발한다. 산문시만이 자유시이고 현대시라는 말이 아니다. 산문시가 현대시의 출발점이었다는 현대시사의 ‘팩트’가 중요하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 산문시라는 것, 그리하여 한국 현대시사에서, 특히 1920년대의 시사에서 산문시를 쓴 한용운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이러한 사실이 우리에게는 소중하다. ―장석원
정지용의 「유리창」은 이미 우리 문학의 교과서가 된 지 오래다. 「窓た曇ゐ息」과 “Whispers of Heavenly Death”가 먼저 씌어졌다고 해서 「유리창」을 모방이나 표절이라고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일본어 시 창작과 영문 시 번역을 오가며 정지용이 섬세하게 고르고 벼린 조선어가 조선적 서정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은 정지용이 당대 시대적 흐름과 조건 속에서 번역을 통해 자신의 언어를 구축해 나간 시인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정지용의 일본어 시와 산문, 영문 번역 시를 읽다 보면 텍스트의 언어를 바꾸는 일 말고도 감각과 리듬, 소재와 비유 등의 다양한 차원에서 ‘번역’을 실감하게 된다. ―이근화
「시 제1호」의 독해의 관건은 시의 상징적 의미의 발견이나 근대 문명에 대한 시적 주체의 ‘공포’의 발견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확정 불가능성을 「오감도」 내부로 끌어들였다는 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난해성이 의미의 부재가 아니라, 의미의 분기의 다양성에서 비롯함을 암시한다. 즉 「오감도」의 난해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의미가 확정 불가능하기 때문인 것이다. 「오감도」는 다양한 의미의 분기를 하나의 공간 속에서 동시적으로 인정하는 텍스트이며, 그것이 사건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러한 인정으로부터 시의 해석에 대한 기존의 인식 체계를 재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성은 ‘아해들’에 의한, ‘아해들’에 대한 당시의 다른 시편들과의 차별성을 보여 준다. ―장철환
특히 (임화의) 시 「너 어느 곳에 있느냐」는 패배주의와 염전 사상의 독소를 전파하는 작품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에 이른다. 장형준과 류만에 의하면, 제5차 전원회의가 끝난 직후인 1953년 설날(또는 3월) 무렵에 「너 어느 곳에 있느냐」가 어느 학교에서 여학생에 의해 낭독된 적이 있는데 그때 교실의 분위기가 무거우리 만치 숙연해졌다고 한다. 길고 긴 전쟁에 따른 피로와 상처, 고통을 감내하고 있던 일반 대중이 딸의 행방과 안위를 묻는 이 시의 본원적 부성애에 깊이 공명한 탓이겠지만, 적을 향한 견결한 증오심과 영웅적 투쟁, 승리에의 낙관만을 작품으로 요구하고 있던 당시 북문예총 당국자들에게 이 시의 비애와 우수가 지닌 정서적 감염력은 실로 전장에 패배주의와 허무주의를 확산시킬 수 있는 반동적 독소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박민규
김수영이 영화 「25시」를 가족과 함께 관람한 뒤에 쓴 산문 「삼동 유감」에는 김수영의 1960년대 시문학 연구에 있어 핵심적 사안이 될 수 있는 문제의식과 해법이 담겨 있다. 문제의식의 핵심은 주체와 대면하고 타락하고 부정한 세계를 어떻게 타기할 것인가가 아니라 타락과 부정에 연루된 주체를 포유하고 있는 세계와 어떻게 동귀어진하고 그로부터 어떻게 환골탈태를 감행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연루되어 “마비”된 주체를 포유하고 있는 부정적 현실의 전복 가능성이 문제의 핵심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영화 「25시」는 김수영에게 두 가지 시계(視界)를 허락한다. 첫째, 개개인의 의지 너머에서 작동하면서 주체를 무력화시키는 거대한 힘이 작동하는 세계를 다시 상기한 이의 시계, 둘째, 바로 그런 세계 안에서 안온한 자신을 재귀적으로 바라보는 이의 시계가 그것이다. ―조강석
<창작과 비평>을 주도한 사람들은 ‘주변적’ 존재가 아니라 사실상 ‘외부적’ 존재에 가까웠다. 실제로 백낙청과 염무웅은 문단의 흐름이나 질서에 밝지 못했다. (중략) 그들은 문단이라는 제도 속에서 길러진 비평가가 아니었기에 문협정통파에게 부채 의식이 없었고, 창작자는 물론 국문학 전공자가 아니었기에 당대의 비평가들과의 관계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문인협회에 소속된 내부적 존재가 아니었기에 문단의 주도권을 놓고 벌이는 지리멸렬한 싸움과 다른 방식의 싸움을 도모할 수 있었다. ―고봉준
바깥의 적이 선명해 보이는 시대에 대개 우리는 모든 악이 바깥의 적으로부터 기원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런 까닭에 악의 절멸에 모든 것을 걸게 된다. 하지만 바깥의 악에 대한 인식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내 안의 악의 잠재성에 대한 인식이다.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되는 일은 언제 어디서든 벌어질 수 있고, 치열한 자기 인식과 반성 없이는 누구도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중략)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모두 폐허”이며 “젊은 시절, 내가 자청한 고난도/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뼈아픈 후회」)음을 인정하는 황지우의 “뼈아픈 후회”가 겨냥하는 바도 바로 이 지점이 아닐까 싶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그 지독한 허무를 직시하고 견디고 건너는 데서부터 1980년대 문학의 가능성은 다시 발현될 것이다. 그 궁극이 향하는 것이 ‘사랑’이고, 그것은 결국 타자에 대한 윤리를 포함하는 문제임을 이 글에서 살펴본 1980년대의 시인들은 선구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1980년대의 시가 던진 질문들은 오늘의 우리 시가 나아갈 자리를 살피는 데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경수
박노해의 시가 다른 무엇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특이성을 가진 ‘사건’으로 기억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기존의 체제 속에서 ‘몫이 없는 자’의 공간, 즉 공백의 공간을 만들고 ‘몫이 없는 자’를 기존 체제에 대한 보충으로 기입함으로써 이를 부정하는 논리와 맞설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중략) ‘불온한’ 문학을 꿈꾸는 이들에게 ‘몫이 없는 자들’의 공간 창출과 체제와의 ‘불화’는 끝나지 않는 ‘영원한 과업’이(어야 한)다. 기존 체제의 논리로 셈해지지 않는 자는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고, 보충된 자들을 이해관계를 가진 특정 세력과 동일시하는 순간 더 이상의 ‘불화’는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래희
어떤 밤. 훌라후프를 돌리며 아직 출간되지 않은 시집의 원고를 읽는 사람이 있다. 몸의 감각을 깨우는 훌라후프의 움직임과 밤의 정적. 형광등 불빛과 활자의 되살아남. 무엇보다 정신이 예민해지는 시간. 원래 ‘검은 바지의 밤’으로 결정되어 있었던 시집 원고였다. 직장에서 하루 종일 하는 일이 바로 원고를 읽고 교정보는 일일 텐데, 그날도 종일 시인들과 통화하거나 회사 회의에 참석했을 테고 퇴근 후에는 시인, 작가, 평론가들과 어울리다가 늦게 귀가했을 텐데, 그대로 편히 잠이 들면 될 것을 출간을 앞둔 시인의 원고를 다시 읽는 밤이라니. 그러나 잠은 점점 멀리 달아나고 그녀(김민정)는 부대끼는 속을 진정시키며 원고를 읽다가 문득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을 받는다. 시집에 가장 어울릴 것 같은 제목을 발견한 것이다.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새벽 세 시가 넘어 전화를 거는 편집자와 그 전화를 받은 시인의 얼굴. (중략) 불꽃이 튕기듯 각성이 이루어지고 세상에 처음 선보이는 낯선 언어들이 제 이름을 찾아갈 때, 그리하여 마침내 “여장남자 시코쿠”라는 제목이 결정되었을 때, 저 멀리서 날은 희미하게 밝아 오고 2000년대 한국시의 사건은 바로 그렇게 탄생하였다. ―박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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