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위해, 바깥을 향해 너를 위해 돌아가야 하는 시간
주영중 시인의 두 번째 신작 시집 『생환하라, 음화』가 2018년 4월 30일,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에서 발간되었다. 주영중 시인은 1968년 서울에서 출생했으며, 2007년 『현대시』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결코 안녕인 세계』가, 저서로 『현대 시론의 역학적 구도』가 있다. 현재 대구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낭시, 블랑쇼 등의 철학자들이 통찰한 것처럼, 인간은 타자와 온전히 공유할 수 없는 생명과 내면을 지녔음에도 바깥으로 벌어져 타자와 더불어 외존(外存)하는 존재이다. 이를 반영하듯 인간이 만든 표현과 소통의 방법들도 예외 없이 ‘바깥’을 향한 방향성을 갖는다. 그런데 주영중은 바깥의 방향성이 타자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날카롭게 간파한다. ‘바깥을 향하는 존재의 윤리’는 주영중이 탐구하는 시적 과제의 핵심으로, 이번 시집에서 그는 다양한 층위에서 바깥을 향해 범람하는 인간의 삶의 실상을 냉정하게 직시한다. 그동안 우리 시가 ‘바깥(타자, 외부, 저곳, 미래 등을 함축하는)’에 부여해 온 혁명과 구원과 윤리 등의 지위를 다시 생각해 보는 것, ‘바깥’이 갖고 있는 여러 층위를 엄밀히 구별해 보는 것, ‘바깥’을 자칫 신화화할 수 있는 위험을 경계하는 것 등은 주영중이 현재 관심을 갖는 시적 과제인 것으로 보인다.
시 「청보리의 밤」은 김수영이 「사랑의 변주곡」에서 예언한 “복사씨와 살구씨가/한 번은 이렇게/사랑에 미쳐 날뛸 날”인 ‘아들의 시간’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다. “사랑에 미쳐 날뛸” ‘아들의 시간’은 태풍의 속도와 “사랑의 밀림”의 요동 등에서 보듯 폭발적인 범람의 형태를 띤다. 주영중은 “사랑을 위해, 바깥을 향해/너를 위해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매번 실패하는 사랑, 사랑들”과 ‘나’의 사라짐을 전제한다는 점을 덧붙인다. 다른 것과 다른 것 사이를 이어 주고 온전히 ‘사라지는 매개자’에서 주영중은 삶의 형식, 존재의 형식, 사랑의 형식, 혁명의 형식, 시의 형식 등에 가장 어울리는 형상을 본다. 프레데릭 제임슨이 베버를 통해 개념화했고 지젝 등이 역사의 전환기를 설명하며 차용한 ‘사라지는 매개자’는 대립과 대립 사이를 이으며 새 시대에 적합한 표상과 형식을 제시하고 사라지는 존재・개념・표상 등을 의미한다. 주영중은 ‘사라지는 매개자’가 사라짐과 없음 그 자체로서 세계의 재구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사랑’과 그 동의어인 ‘혁명’은 ‘사라지는 매개자’들이 수행하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행위에 앞서 존재론적인 행위임을 읽어 낸다.(이상 김수이 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빛과 어둠의 이중주”(「코끼리 시간 여행법」)를 연주하는 자의 손을 보라. “깊이가 없는 빛으로 채워진 살갗”(「견갑의수」)이란 대체 얼마나 어두운 “시간의 빛”(「하트 에이스」)을 함축하는가? 어둠과 어둠의 이중주에서 “빛의 울렁임”(「청보리의 밤」)이 일고, 빛과 빛의 이중주에서 “날카로운 어둠”(「잔혹 투명 구슬」)이 스밀 때, 시인은 종신토록 그 빛과 어둠을 노래하고, 춤을 추고, 마침내 쓰러지며 시를 쓴다.
모든 것이 시가 되리라는 믿음을 뒤로하고,
모든 것이 시가 될 수 없다는 절망도 뒤로한 채,
비계(飛階)의 위태에 직립의 아슬을 더하여 시를 빚는 자,
“죽음과 삶에는 이음매가 없”(「원숭이 가면」)다는 사실 앞에서, “입의 기울기”(「생체-나무」)가 온전히 생의 물매가 되는 순간이 있다. 그 기울어진 틈으로 오해와 타락과 분노와 통한의 말들이 한없이 토설된다. 그건 “파멸의 동심원”(「암점」)에서 솟구치는 형적 없는 춤의 리듬. 그 리듬에 기대어 “나를 움직이는 파동들”(「한밤의 파레이돌리아」)에 혼신의 언어를 내어 맡길 때, 시간의 암점에서 태동하는 것은 모든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시다.
그러니 언어의 작두 위에 선 자가 채비할 것은 미래의 운산이 아니다. 절체(絶體)의 혼절은 이미 아닌 것이다. 빛과 어둠, 희망과 절망, 삶과 죽음 사이의 대위법이 리듬을 타고 있다면,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큰 호흡법”(「청보리의 밤」)이 필요한 밤이라면, 지금이 그때이다. 모든 시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장철환(문학평론가)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사랑을 발견하겠다”(김수영, 「사랑의 변주곡」). 김수영이 생활에 대한 치열한 반성을 바탕으로 생활의 ‘욕망’을 ‘사랑’과 ‘혁명’으로 변주한 것은 “눈을 떴다 감는 기술”, 즉 주체의 시선을 계속 갱신하면서 세계를 재발견하는 방법을 통해서였다. “타인의 시간이 입을 벌린다”(「빈집의 침입」). “문득 고유명사가 사라지고/발끝마다 맑은 물이 밟히는/가끔씩 뼈 부러지는 소리 들리는//열린 공간으로 비상하는 새들의 악몽/얼음의 암판들이 밀어 올린 융기의 시간”(「얼음 장미의 계곡」). 반면, 주영중은 ‘존재의 범람’이라는 차원에서 생활의 폭력성을 ‘사랑’으로 변주하고자 하는데, “너를 위해/침묵하며 다가가”고 “멈췄다가 다시 요동치는” 자기 변혁의 과정은 아름다운 것이자 끔찍한 것임을 강조한다. 그는 자신의 앞에 입을 벌리고 있는 “타인의 시간”에 참여하는 일, 즉 사랑과 바깥을 향해 “열린 공간으로 비상하는” 시간이 “감동적인” 시간이자 “악몽의 시간”이라고 말한다. 자기 존재의 범람이 생활과 생존을 위해 타자에게 가하는 폭력이 아닌, 타자에게 돌아가는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나’의 안과 바깥이 뒤집히는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다른’ 움직임들에 대해 기대와 함께 불편하고 두려운 감정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부작용을 동반하지 않는 작용은 없다.
―김수이(문학평론가, 해설 중에서)
저자 약력
주영중
1968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2007년 <현대시>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결코 안녕인 세계> <생환하라, 음화>가, 저서로 <현대 시론의 역학적 구도>가 있다.
현재 대구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시인의 말
너무나 너다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생체-나무 13
청보리의 밤 15
실종 18
뼈의 기하학 20
엔드게임 22
원숭이 가면 24
의자의 정치학 26
李箱은 왜 호랑이 가죽을 행복의 상징이라 부르는가 28
沒年 31
제2부
꽃의 광인 37
태양 프로펠러 38
탁발 40
날아가는 계단 42
치르치르미치르 43
아이들의 음화 44
잔혹 투명 구슬 46
원룸 47
깃을 날리며 48
금니 속에 비친 풍경 50
견갑의수 52
길의 표정 54
아파트 경비원 J 씨의 팝업북 56
죽음은 발견되어야 한다 58
제3부
한밤의 파레이돌리아 61
최초의 발작 64
대낮에 누가 울지 66
쌍둥이 성좌 67
유리 심장 70
무저갱 72
피와 검은 고양이 74
암점 76
生時夢 78
얼음 장미의 계곡 82
제4부
채석강 87
그림자가 겹치다 88
바람에 적다 89
고양이의 추 90
老翁이 간다 92
베란다 동백 94
발산대중사우나 95
빈집의 침입 96
백색 오토바이 98
코끼리 시간 여행법 100
하트 에이스 102
혀 속의 혀 104
종신 106
하얀 명령 107
가마우지의 여름 나기 110
다시, 파랑 112
해설
김수이 생활과 사랑 사이, 사라지는 매개자들 114
시집 속의 시 세 편
생체-나무
당신 생각은 불법이야, 살인적 리듬이 숨 쉬는 곳
당신의 광장에는 내일이 없지
幻影, 여름아
얼어 버린 물방울이 고요하게 폭발한다
도시 끝에서, 한강철교 너머에서
장마전선을 끌어올리며 우는 자귀나무
진앙지는 바로 나였다
거리의 속살 사이로 파고드는 질풍 같은 리듬
생활을 잊은 듯 질주할 것
리듬이 바뀌는 순간, 구피의 꼬리 같은
악몽의 시간으로 진입할 것
생환하라, 陰畵
생체-나무가 흔들리는 속도에 대해
꽃의 카오스에 대해 생각한다
분노는 겨우 바깥에서 터지는 꽃, 용납할 수 없는 자귀 꽃의 슬픔이 오늘의 술잔 속에서, 어진 사람의 입에서 혹은 묻지 마 살인자의 칼끝에서 터진다
리듬을 앓는 눈썹과 내 입의 기울기, 운명의 창밖으로 날카로운 나무들이 이동한다
바람이 구름을 밀어내듯
초록의 잎들이 비밀을 누설하고 있다
조문받는 느낌이랄까, 갑갑한 발로부터 이륙하라
도시 상공에 구멍을 뚫는 처녀-새의 울음
불을 옮기는 역린
생활의 언명을 거스르는 태풍처럼
오렌지가 피워 내는 곰팡이들
녹색의 포자들이 지구의 리듬으로 날아가고
생활이 알리바이를 앓는다 ***
沒年
광장에 서리 내린다
응결된 서릿발,
내려야 한다
무당벌레 한 마리, 뒤집힌 육체
고개 든 개미들
썩은 살이 흘러내린다
광장이 넓어지고
죽은 광장이 살아나고 있다
대지의 裂開
숨은 지각판이 요동친다
여진이 계속되고
본진을 기다리는 날들
축이 살짝 기우는 지각변동의 11월
투명한 햇빛에
훤히 드러나는 살
검은 피의 더러운 생리를 배운다
신경과 근육과 살갗이 뒤집혀
안이 바깥이 되고, 바깥이 안이 된다
최상부의 치부가 밑바닥의 생피가 되어
말단까지 흘러내린다
허깨비를 지키기 위해 움직이는 허깨비들
허깨비를 깨기 위해 움직이는 허깨비들
우스꽝스러운 사태를 바라보는
유모차 속 천진난만한 아이들
거짓말 같은 불편한 사실이 존재했다
설마 존재했다, 뒤통수를 맞았지
타오르던 불의 흔적들
촛농이 광장을 뒤덮는다
민중은 탓할 수 없지
재야 학자에게서 흘러나오는 냉철한 탄식
과연 그런가
붉은 고추가 투명해지는 계절
닫혔다 잠시 열리는
囊中之錐의 세계
카오스는 투명하게 드러날 수 있는가
보이지 않는 유령들이 일어선다
그래, 우리는 유령이었다
시간을 돌리려거든 서둘러라
불안과 원시와 분노의 날들
모든 아침에 떨어져 뒹구는 햇빛
행복한 아침입니다
미소 가득한 날 되시기 바랍니다
승무원 목소리에 얹히는
햇빛 강렬한 추운 아침
그런 날입니다, 참 처연한 아침입니다
오늘의 하늘은 죽었군
우리에게도 절박한 타락이 있었다고 고백하자
칼과 칼이 입속에서 돌고 있다
젖은 혀를 열고 새가 날아오른다
죽은 언어에 각주를 단다
죽은 언어와 나의 요설을 향해 제를 지낸다
몰년사해몰년사해
沒年死骸沒年死骸 ***
한밤의 파레이돌리아
죽은 벌레가 살아 있는 벌레를 끌고 간다
기어가는 벌레의 음산한 모반
멀리 어둠 속에서
입이 없는 광대가 도달한다
표류자, 당신이 꿈꾸면 보여 줄게
광대가 말한다
우리의 미래는 가볍고
우리는 조용히 넘치지
나는 광대가 빠진 이로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호흡을 뱉자
빗속으로 번지는 캘리그라피
머릿속에서
차가운 도마뱀들이
글씨를 쓰는 것 같아
외로움의 틈 속에서 피어나는
하얀 꿈들을 보여 주지
중력을 잃은 머리 위의 바위,
구름 위에서는 바다가 물결치지
그가 한 발 다가서자
슬픔의 냄새가 훅 끼친다
내 뼈에 새겨지는 알 수 없는 문자들
바위의 최초의 뿌리를 바라보게
죽음의 잎들 사이로
습한 바람이 지나는 걸 느낄 수 있지
검은 새라 말하자, 비상의 흔적 속에
음악 없는 밤이 찾아온다
죽은 사람의 사진에서 수염이 자라고
죽은 사람에게서 전화가 오는 밤
나를 움직이는 파동들
오늘은 불편한 융기
암판들이 밀어 올린 산 위에서
썩은 것들을 빨아올려
생명이, 생명이 되듯
죽은 자들이 살아나기 전에
파문이 시작되기 전에
스스로 쫓겨나고 스스로를 쫓아내게
우리는 내일에 취해
헐거워진 생활의 살갗을 잊고
태양이 사라진 쪽으로
얼굴 아닌 얼굴로
변화무쌍한 표정으로, 오늘은
불편한 융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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