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훈 평론가가 언급하듯 “이용임의 시적 상상력은 세상으로부터 하찮게 여겨졌거나, 가혹하게 버려진 것들을 주워다가 무언가와 결합시킴으로써 새로운 습성(의미)을 부여”하며 “연민과 공감에서 비롯한 시인의 연금술적인 상상력의 자장(磁場)은 한없이 낮게 가라앉아 웅크리고 있는 고독한 삶을 향해 다가간다.” 이용임의 푸른 말들은 낡고 누추한 노년의 몸이거나 아이와 같은 연약한 육신일수록 더 잘 흡착한다. 그렇게 낮고 낮은 몸들에 스민 말들은 “‘흐르지 않는 혈관에/갇혀 있는’(「작약」) 푸른빛을 발산하며 특유의 무늬를 새롭게 형성해 나간다. 그런데 이것은 이따금 기이한 반응을 유발하기도 하는데, 마치 ‘죽지 않는 벌레’(「친근한 사물들」)가 심장 속으로 파고들어 기생하는 것처럼, 평온했던 일상의 매순간마다 지속적으로 요동치는 낯선 감각이자, 기묘한 증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 ‘기묘함’이야말로 이용임 시인이 직조해낸 시의 고유한 아름다움이며, 추(醜)하고 병든 세계를 전복시킬 수 있는 열쇠가 될 것이다.
작품 속으로
자다 깨니 심장이 간지러워서
뒤적여보니 다족류 벌레가 있더라
(…)
차마 죽일 수가 없어 유리그릇에 넣고
매일 피 한 방울을 먹이며 키웠다
피가 진득한 밤이면
유난히 입맛을 다시는 벌레가 귀여워서
한두 방울 더 주기도 했다
벌레는 자라고 나는 마르는
어느 부모 자식 같은 신파가 한 계절,
자다 깨니 심장이 간지러워서
뒤적여보니 삭은 피가 우수수 쏟아지더라
(…)
벌레는 자라고
스멀거리는 감각만 오래 남아
기면증을 앓았다
자다 깨니 심장이 간지러워서
—「당신이라는 의외」부분
사람들은 알까 몰라 살면서도 몇 번씩
죽음을 건너는 걸
경계 없이 몸을 잃는 자발성
사람들은 알까 몰라 이토록 본격적인
자살을
무관의 임사 체험을
잠시 죽으러 갑니다 인사도 없이 깜빡,
어머 나 잠시 졸았나 봐 잠시 죽었나 봐 잠시
다른 생을 기웃거리고 왔나 봐
—「오수」부분
빛나는 것들은
모두 땅속에 있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애인은
죽은 애인이라고
춤추는 일들은
모두 지문이 없지
속이 빈 새들이 날아가는
창문은 소경과 귀머거리의 시간
순결한 걸음으로
가요 정오는
살인의 시간
자정은 사랑의 시간
독이 든 우유를 들고
계단을 올라요
(…)
정오는 은닉의 시간
자정은 발각의 시간
장갑을 끼고
총알을 닦고
찬장을 열고
독약을 타고
산책은 언제나
우발적 엇갈림
—「칠링」전문
서시(序詩)
아름답고 상냥한
누군가 이국어로 쓴 시를
현관 앞에 두고 간다
읽을 수 없는 시는 아름답다
어느 계절의 여행처럼
시는 휴일도 없이 온다
아무렇지도 않게 부드럽다
누군가 이국어로 쓴 시를
현관 앞에 두고 간다 매일,
매일 매일
문 너머 풍경은 여전히 일상인데
시는 읽을 수 없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눈과 입을 꿰맨
향기로운 시체를 안고
천 년을 살았다는 어느 왕처럼
나는 아침마다 시를 받고
계단을 내려가
마른 꽃나무 사이로 걸어간다
시인의 말을 대신하여
2020년 3월
이용임
시인 소개
1976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다. 200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엘리펀트맨」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 『안개주의보』, 산문집 『당신을 기억하는 슬픈 버릇이 있다』를 냈다.
추천사
이용임의 시집 속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곳에서 흘러나오는 나직나직한 노랫소리가 들린다. 신음 같기도 여린 비명 같기도 한 그 노래를 따라가면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속 세계가 보인다. 그 속에 한 여자가 “피투성이 시계덩어리 심장 그게 나야”, “저녁 종소리를 마시고 잉태한…”(「시계의 집」)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저녁 종소리는 실체가 없는데 그걸 마시고 잉태된 사람이란 과연 어떤 사람일까? 있는 사람일까? 없는 사람일까? 존재와 비존재 사이 유령처럼 살아가는 사람? 그게 바로 여자라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이 시집에는 상처투성이 자궁, 물속에 갇힌 아이들, 피 흘리는 심장 등 피학적이고 절망적인 약자(특히 여성)의 이미지가 많다. 물과 피와 심장, 이 세 이미지들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은 자궁이 아닌가? 그것은 여성성의 상징이며 존재 발현의 원형적 공간이기도 하다. 많은 문학 작품 속에서 그것은 우주의 상징적 이미지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시 속에 나타난 그곳은 지금 피투성이 상처투성이로 신음하고 있다. 곰곰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라 해도 좋을 그곳을 시인은 “흰 그림자에 몸을 먹힌 귀신이 너울을 쓰고 기슭에 앉아 분내 나는 시간을 건너가”(「봄」)듯 가야 한다고, 그래야 봄에 닿을 수 있다고 슬프고도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다.
- 이경림 시인
[차례]
1부 여자 혹은 자궁이 꾸는 꿈의 기록
언젠가, 어디선가, 누군가
시계의 집
물의 공방
스미듯 번지듯
서정적 심장
유리의 집
천국이라는 이정표
남이
비1
비2
언제든, 무덤
봄
휴식시간
사월
사천
눈
2부 연금술 혹은 사랑이라는 악마의 해부도
피아노
포옹
맨발 당신이라는 의외
달콤쌉싸름한 심장
연리지
당신, 이라는 말
자운영
노래의 뼈
등의 감정
3부 기억 그리고 나비의 푸른 혈관
척후
봄
친근한 사물들
고유명사
해파리
령
작약
오수
당신을 위한 기도
발가락의 여행
구름수집가
한없이 투명한
4부 창 아래 별이 지나가는 새벽
소년, 소녀
십이월의 눈 무의미의 창
여름
산책
유월
그대여 고독한 골목에
그대는 모르죠
적란운
안녕, 부다페스트
안구건조증
아름다움은 조용히
칠링
풍경수집가
우리는
다시,
해설
푸른 피를 알았다/앓았다 —정재훈(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