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떨어질 때 웃는다 - 최한나 시집
문예바다 기획시선집3
1995년 첫 시집 『저 홀로 타오르는 촛불 하나』, 2011년 제2시집 『밥이 그립다』를 출간한 이후 10년이 넘도록 침묵하고 있던 최한나 시인이 세 번째 시집을 내놓았다. 생활에 밀착해서 길어 올린 시인의 시편들은 시가 가질 수 있는 미학과 시가 가져야 할 미덕을 아우르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최한나 시인의 광활한 시세계는 그가 시작 활동을 전개함에 있어 얼마나 정치하고도 정밀한 사유를 견지하는지 결과로서 보여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1995년 첫 시집 『저 홀로 타오르는 촛불 하나』를 출간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2011년 두 번째 시집 『밥이 그립다』를 발표했고, 2014년 월간 『시와표현』에 「달력공장이 불타고」 외 4편 신인상 수상으로 재등단하여 조용한 詩 속에 광야를 산다.
詩人의 말1화물열차가 지나간다미끼는 뒤쪽에 있다달력공장이 불타고백야행숨맛닭들이 사라지고세기말왕년은 다 거짓말창문 밖이 떠나고 있다철든 사람전봇대 위의 사내봄날봄날의 터널이상한 구슬날다, 도마그 많던 광장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오래된 밥상2고래캔 플라워발치의자가 운다크로키금식못들이 옮겨 다녔다바로 눕다빈방과 산다가위여름을 빨다구름다리 위에서 길을 묻다어떤 자국엄마의 소설나를 잃어버리다폭염3어떤 교통사고따끔한 가족밥상아픈 옷꼬리를 달래다雨曜日좌측별내시경워킹맘 프로젝트새끼줄그리운 방종옆모습을 고치다옆방에 침대가 산다쯩이십 분의 위로꽃비빔밥폐점 삼십 분 전4우산과 날개 사이에 후회가 산다수수 빗자루우아한 방꽃은 떨어질 때 웃는다일회용 날개옷걸이가 사라졌다간격성냥 한 개비풍선論死角의 중독저수지 목장이쁜이네 곱창이 맛있는 이유돌 속에는 고래가 산다복실이마지막 보시동서울터미널상생해설 | 이상하고 삭막한 세상에 바쳐지는 아름다운 시 세계 …… 최세라(시인)
최한나의 시는 비린내 나는 삶의 현장을 웬만큼은 비켜 와서 관조하거나, 흔히 시가 형성되는 거리라는 그 시간들을 보내 놓고 안개를 헤집어 추억하는 잔잔한 서정이기엔, 그 스스로가 온몸을 들어 끌어가야 하는 가열 찬 현장을 살고 있으므로, 내용들이 치열하고 또한 어느 한 찰나 잘 벼린 칼날 같은 깨달음의 시선이 휘익 휘익 꽂히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 까닭으로 최한나의 시의 동력은, “간밤의 편두통과 대출금 남은 아파트, 외상값들을 싣고 시동을 걸고 있는, 날마다 아침을 출발하는 편도뿐인 화물열차”(「화물열차가 지나간다」)이며, 그럴지라도 비켜설 길 없는 부조리하고 허무한 삶의 정면들 앞에 일어나 마주서는, 싱싱한 리얼리티라 말할 수 있겠다.- 안영희(시인)최한나 시인이 시를 쓰는 방법은 모범적이지만 도달하기 어렵다. 생활에 밀착해서 길어 올린 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그는 삶을 통찰한다. 그리고 시에 디테일을 입힌다. 또다시 삶을 경험하고 시에 마법과 같은 서사를 통과시킨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진정한 시인이 된다. 우리는 그의 시적 작업을 통해 자신의 현존재에 이르는 한 사람을 상상할 수 있다. 이를테면 세계를 이루는 공동 존재 안에서 가장 미세한 떨림을 포착하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의 그러한 시적 포착 혹은 작업은 세계로부터 등 돌린 자의 고독과 불안에서 오기보다는 시대적 공통감각을 통해서 온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보편성을 획득한다. 그의 시적 작업은 정확히 이곳에 위치한다.시인이 가진 사유의 눈은 사물과 인간과 세계를 꿰뚫고 그의 표현은 적확하다. 시적 이력에 마침표가 없는 시인, 광대한 시공간을 종이에 스미게 만들 수 있는 시인, 그러면서도 위트와 사랑을 잃지 않는 시인으로서의 다음 시편들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최세라(시인), 해설 「이상하고 삭막한 세상에 바쳐지는 아름다운 시 세계」 중에서찻주전자가 제 머리 신나게 들썩인다하고픈 말들을 휘휘 저어 가며낮게 낮게 우린다이 초록행성에서의 살이가 그려낸나이테를 딛고 저녁으로 건너가야 할 여기,내 자리인 것 같으나 분명 내 것 아니다언젠가 도래할 노을의 시절,그 또한 내 것 아니리라남은 오후를 채워야 할 일이란자리를 정리하고 놓아주고 비우며온전한 나로 남는 일차향기가 오후를 물들인다석양마저 관통할 빛 한 줄기 심장에 스민다감사함이 끓어올라 뜨거운 오후다남은 찻잎, 마저 넣는다.- 「詩人의 말」이삿짐을 싸다가 ?부엌 한편에 걸려 있던 밥상을 꺼내 닦는다?뜨거운 냄비에 날개가 다 타 버린 원앙이 안쓰럽다?고단한 살림 이야기 들어주느라 귀가 허옇게 닳았다바래고 긁힌 상처들만 배가 부르다지붕이 낮아서 마음도 낮아지던 변두리 단칸방설익은 밥에 등 다 까진 고등어구이 올려놓고철대문 밖 지친 발자국 소리에 귀 기울이던 시간들첫아이 돌잡이에 환호하던 박수소리도아이의 재롱에 깔깔거리던 웃음꽃도 좋,았,다인형 눈을 붙이다 엎드려 잠이 들면요정들이 꿈의 궁전으로 데려다주기도 하던 밥상솜씨 없는 내 삶을 다시 세우듯 상을 펴 본다네 식구를 저 바다 건너까지 무사히 태워다 줄방주가 아직, 여기에 있다- 「오래된 밥상」 전문집게벌레 한 마리안방에 바로 누워 있다넓은 안방을 한 점으로 독차지하고 있다아무도 선뜻 다가가려 하지 않는한 점을 휴지로 싸서 버린다당신도 저 안방에서반듯하게 바로 누운 적 있었다그때도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모두가 주저했었다마지막에 가서야가슴 펴고 독차지하고 있던 안방긴 밭고랑을 천천히 기던한평생 해가 뜨고 해가 지던 구릉이방바닥에 반듯이 펴지자평온한 잠을 데리고 일몰이 찾아왔다눈을 뜨고 손을 내밀 것도 같은데,방문 밖에서 기웃거리던두 눈이 시큰거리기도 했던가젊은 날의 등에 업혀 깔깔거렸던 기억이두 발로 서서 바들바들 떨었었던가한 번도 반듯하게 펴진 것을 본 적이 없다간지럽게 등 긁어 준 기억 가물가물하다등에 가두어 온 당신의 속울음이휘발된 그날 이후쓸모없는 햇빛만 지쳐 가는아무도 뜯어 먹지 않는 고랑마다잡풀만 무성하다- 「바로 눕다」 전문엄마의 소설이 갈등구조를 지난다 점점 구부정해지는 구술의 책 당신이 주장하던 열 권 중 이미 그 열 권을 넘긴 지 오래다 지지부진한 저술은 접어 두고 오늘도 아랫목 구술이 한창이다뼈대는 한결같고 오자투성이에 띄어쓰기도 엉망인 구술원고 이십 페이지쯤에 반드시 등장하는 말, 그땐 참 꽃시절이었지 나비처럼 날아댕겼어 유똥저고리에 꽃분홍치마를 떨쳐입고 나가면 동네 총각들이 얼음이 되어 버렸다고 그래서 할아버진 엄마를 중학교엘 안 보냈다고, 그래도 춘향전부터 톨스토이를 수십 번이나 읽었노라고,열다섯엔 빨치산 소굴을 삼십 리 길이나 단숨에 달려가 신고했다는 페이지를 넘길 땐 습관이 되어 버린 박수와 감탄사를 새로운 듯 목청껏 복습해 드려야 한다 콩쿠르에 나가 양은밥솥을 타 온 날엔 머리카락이 싹둑싹둑 잘려 나갔다는, 침 튀기는 가위소리가 웃음고개를 오르락거리지만 기타쟁이 동네오빠와 야반도주만 성공했어도 나 같은 것은 오늘날 등장할 수 없었다는 대목에선 아찔해지는 나의 연기도 점점 무르익어 간다얼굴 한 번 못 본 채 혼사를 치른 새신랑이 유학 떠나고 시어머니와 어린 시동생들 등에 업고 살았다는 새댁시절에 한숨이 집중된 듯도 하지만 입가의 잔주름에 번지는 수줍음이 간지럽게 읽히기도 한다존재하지 않는 한 권의 걸어 다니는 소설책, 이젠 근육질이 점점 사라져 가는 골방서재가 코를 골다가 잠꼬대 속에서도 집필을 한다 골다공 속으로 숨어 버린 젊은 날들은 기승전결도 잊어버린 지 오래, 점점 심줄이 질겨져 가는 저 화법. 에필로그를 쓰기 위해 새벽부터 가래 끓는 기침으로 활자들을 가다듬는다 아직은 과거형 이야기만 지지부진, 절정은 언제 넘으려는지 에필로그가 나는 두렵다- 「엄마의 소설」 전문어릴 적 할머니는 닭 모이를 줄 때한 줌 휙, 마당에 뿌렸다닭은 마당을 쪼아 먹었다우리 집에서 존재하던 그 누구보다 넓은 마당 밥상을 차지하고마당을 주워 먹고 뒤뚱거리는 닭먹느냐 먹히느냐는 밥상에 따라 결정되었다다리가 달린 밥상은맨바닥의 밥그릇들이 키운 것들을 먹었다상추며 열무의 밥상인 파릇파릇 텃밭에지렁이 몇 마리 캐 먹으려닭의 발들이 무참히 헤집어 댄 날이면텃밭 밥상은 한 뼘의 한숨이 자라 있었다혼자 밥 차려 먹는 날들이 많다귀찮을 때는 밥그릇만 들고맨바닥에 쭈그려 앉아 몇 술 저장할 때도 있다그러다 드는 생각은어릴 때 키우던 그 밥그릇들이다흰 머리카락 듬성듬성 돋는시간이 차려 준 밥상을 들여다본다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전화기와노크하지 않는 달팽이관과무심한 망막이 언젠가는 나를 다 쪼아 먹어 버릴 것 같아주방 선반에서 먼지 둘러쓴 밥상을 내린다집 안에서 소리 내는 것들은 기계들뿐밥상에 한 벌 수저를 소리 내어 놓는다갑자기 밥상 관절이 시큰거린다- 「밥상」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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