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향과 기억들 사이- 김순례 산문집
(도서출판 상상인)
책 소개

『오래된 향과 기억들 사이』는 지나간 시간을 되짚으며, 그 안에 남아 있는 내면의 온기를 다시 느끼며 쓴 책이다. 그렇다고 김순례 작가는 기억을 애써 미화하지 않는다. 사라졌다고 믿었던 순간들이 어느 날 문득 되돌아올 때, 그 기억이 머물다 간 자리에 함께 머물러본다. 그러는 사이 지나간 시간은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오늘의 삶을 다시 묻는 조용한 질문이 된다.
이 산문집의 1부는 계절과 기억의 자리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바람, 빛, 그리움 같은 익숙한 풍경들이 작가의 내면을 통과하며 새롭게 살아난다. 봄은 오래 견딘 뒤에야 받아들이게 되는 생명의 기척이고, 여름은 자신을 단련하는 흔들림의 자리다. 가을은 오래된 온도가 스며드는 계절이며, 겨울은 비워진 자리에 무엇이 남아 있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시간이다. 작가는 자연의 변화 속에서 삶의 속도와 마음의 방향을 읽어낸다. 그래서 기억 속의 지난 계절들은 한 사람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다시 피어나는 시간의 흔적으로 남는다.
이 산문집이 지닌 큰 미덕은 일상의 사소한 장면에서 삶의 깊은 의미를 발견하는 데 있다. 김장, 바람 소리, 개구리울음, 노을빛, 웃음, 오래된 노트북, 가족의 손길 같은 장면들은 작가의 문장을 통해 조용하지만 큰 울림을 얻는다. 특히 엄마와 아버지, 남편과 아이들, 반려동물과 화초를 바라보는 글들에는 돌봄과 미안함, 사랑과 회복의 감정이 함께 스며 있다. 작가는 돌봄을 일방적인 헌신으로만 보지 않는다. 돌본다고 믿었던 존재에게 도리어 위로받고, 붙들고 있다고 생각했던 관계 속에서 자신이 붙들리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 깨달음은 과장되지 않아서 더 깊은 의미로 다가온다.
『오래된 향과 기억들 사이』는 추억을 다룬 산문집이지만 감상에만 머물지 않는다. 책의 후반으로 갈수록 작가의 시선은 개인의 기억에서 사회와 타자를 향한 질문으로 넓어진다. 침묵은 언제 책임이 되는가? 선의는 어디까지 선의로 남을 수 있는가? 편견과 오만은 어떻게 우리 안에 자리 잡는가? 묻지 않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이 작가의 산문을 한층 더 무게 있게 만든다. 개인의 체험에서 출발한 글이 삶의 태도와 윤리의 문제로 확장되는 순간, 이 책은 따뜻한 회고록을 넘어 성찰적 수상록의 품격을 얻는다.
김순례 작가의 문장은 차분하고 부드럽다. 그러나 그 부드러움 안에는 힘이 있다. 그 힘은 오랜 시간 마음속에 눌러두었던 감정들을 성급히 해석하지 않고, 충분히 바라본 뒤에야 문장으로 옮기는 작가의 태도에서 나온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 보면 독자는 작가의 기억을 따라가다가 어느새 자신의 기억 앞에 서게 된다. 잊었다고 생각한 사람, 무심히 지나쳐온 계절, 다 말하지 못한 마음, 뒤늦게 이해하게 된 가족의 얼굴이 조용히 떠오르게 될 것이다.
『오래된 향과 기억들 사이』는 특별한 사건을 내세워 호기심을 끌거나 익숙한 감상에 의거하여 독자들을 붙잡거나 하지는 않는다. 대신 많은 경험과 함께 살아온 사람이 자기 삶의 순간들을 정직하게 더듬으며 얻은 낮고 깊은 통찰을 독자에게 건넨다. 이 책의 산문들은 삶을 결론으로 몰아가지 않는다. 다만 오래된 향처럼 남아 있는 기억들 사이를 천천히 거닐며, 우리가 잊고 지낸 마음 하나를 다시 바라보게 한다. 지나온 시간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어떤 기억은 오늘의 우리를 여전히 조용히 살리고 있다고 말해주는 책이다.
작가의 말
어떤 기억은, 시간보다 오래 머문다.
살아오며 많은 것들이 지나갔지만,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어떤 기억은 속절없이 희미해졌고, 어떤 감정은 여전히 처음 그 자리에 고여 있었다. 이 글들은 그처럼 남아 있는 마음들을 다시 바라보는 시간 속에서 쓰였다.
이미 오래전에 지나갔다고 믿었던 순간들이 어느 날 문득 발치에 닿을 때가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억지로 붙잡기보다 그저 오래 바라보려 했다. 명쾌하게 이해하려 애쓰기보다, 그 기억이 머물다 간 자리에 함께 머물러보려 했다. 그 시간의 결을 더듬다 보니 기억은 어느새 향기가 되어 돌아왔고, 그 기척들은 다시 삶의 질문이 되었다.
이 책이 특별한 답이 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오랫동안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던 바람이었으나, 이 기록을 남기는 일은 처음과도 같은 망설임과 설렘을 동반했다. 누군가에게는 늦은 걸음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그 시간을 지나야만 닿을 수 있는 자리였다. 그 시간의 결을 따라, 나는 비로소 문장을 이어왔다.
그 사이에서, 미처 건네지 못했던 마음들이 비로소 자리를 얻었다.
책장을 넘기는 동안, 잠시 자신의 시간으로 돌아가 지나온 마음 하나를 가만히 떠올려보는 시간이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쩌면 이 기록들은 어떤 결론에 이르기보다, 오래된 향처럼 남아 있는 기억들 사이를 천천히 거닌다. 스쳐가는 바람은 때로 곱고 때로 거칠지만, 그 흐름을 오래 바라보는 일 속에서만 남겨지는 어떤 여운을 나는 여전히 믿는다.
2026년 5월 김순례
책 속으로
다만 예전처럼 채우지 못한 것에 조급해 하기보다는, 채워야 할 것과 비워야 할 것을 조금씩 구분하게 되었을 뿐이다.
세상이 내게 부여한 이름표를 하나씩 떼어내고, 내 안의 울림을 따라 나라는 사람의 원형을 찾아가는 길. 나는 이제 그 길 위에 서 있다. _「그 밤, 돌아온 자리」 부분
벚꽃의 짧은 순간도 아쉽지 않다. 꽃이 지고 난 뒤 찾아올 푸른 잎들이 겨울의 긴 기억을 덮어줄 것을 알기에, 나는 계절의 순환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겨울이 다시 찾아오더라도, 그다음에는 반드시 새로운 봄이 올 것임을 믿는다. 이제, 그 믿음의 무게를 딛고 계절의 첫 문 앞에 겸허히 서 있다. _「봄의 기척, 다시 피어나는 자리」 부분
내가 여름을 더 이상 ‘견뎌야 하는 계절’이 아니라, 과정을 받아들이며 스스로를 단련하는 계절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나의 삶 또한 그렇게 한 계절씩 익어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름은 여전히 쉽지 않고, 여전히 벅차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나는 조금씩 길을 찾고 있다. 견디는 마음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그 흔들림의 자리에서. _「여름, 흔들림의 자리에서」 부분
가을이 오면 나는 또다시 그 오래된 향과 기억들 사이를 천천히 건너간다. 무엇이 그리움이고 무엇이 아쉬움인지 끝내 분간되지 않지만, 그 모호함조차 내게는 가을이다. 아마 올해 가을도 그렇게, 조용히 지나가겠지. 그래도 가을이 오면, 처음처럼 좋다. _「가을빛 틈에서 -가을, 오래된 온도가 스며드는 계절」 부분
이제 나에게 웃음은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표정이 아닌, 소란한 세계에서 잠시 물러나 가장 솔직한 나에게로 돌아오는 길목이기를.
그래서 주름 사이로 배어 나오는 그 솔직한 웃음이, 결국 내가 나를 받아들이기로 한 가장 조용한 고백이 되기를 바란다. _「웃음이 지나간 자리」 부분
이제 나는 개미의 속도로 걷는 법을 배운다. 조금 느려도, 타인의 박수가 없어도 괜찮다. 찢어진 잎을 꿰매던 큰어머님의 마음으로 내 상처를 돌보고, 마당 꽃들에게 안부를 묻던 엄마의 목소리로 내 하루를 채우는 것. 그것만으로도 내 삶은 충분히 단단하고 따뜻하다. _「머물 수 있는 시선」 부분
숨을 고르고 자세를 바로잡아 보아도 가라앉지 않던 것은, 몸이 아니라 그 시간에 스쳐 간 말들이 오래도록 마음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나를 가장 오래 붙잡고 있던 것은 아픔과 실패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위에 덧씌워졌던 수많은 말들이었다. _「편견과 오만」 부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말을 아끼는 사람이 되었는지 생각했다. 정치와 사회를 삶의 바깥에 두는 것이 나를 지키는 방식이라 믿어온 시간들. 복잡한 문제에 발을 들이지 않고 그저 하루를 무사히 건너는 것이 성숙한 태도라고 여겼던 습관들. _「침묵은 언제 책임이 되는가」 부분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질문을 남기는 일.
균형이 무너졌는지 확인하되,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잃지 않는 일.
그것이 내가 현장에서 배운, 가장 느리고도 조심스러운 책임의 방식이다. _「묻지 않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부분
오랫동안 멈춰 있던 내면이 비로소 살아 있다고, 다시 시작해도 좋다고—조용히 신호를 보내오는 듯했다.
여전히 서툴고, 때로는 스스로를 의심한다. 그럼에도 예전처럼 나를 단단히 묶어두지는 않는다. 조금은 어긋나고 부족해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줄 여유가 생겼다. _「내 안의 거리를 지나며」 부분
마당에는 커다란 목련나무가 있었다. 이른 봄이면 눈부시게 하얀 꽃송이가 마당을 가득 채웠지만, 나는 그 찬란함을 온전히 마주하는 일이 늘 버거웠다. 초봄의 변덕스러운 기온에 휘청거리던 꽃송이는, 그 계절의 경계를 다정하게 품어내지 못하던 내 청춘의 흔들림과 겹쳐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활짝 피었다가 이내 땅에 나동그라져 시들어가던 모습은 유난히 서글픈 풍경으로 남았다.
그 시절의 나는 늘 마음 한쪽이 소란스러웠다. _「바람은 그렇게 추억이 된다」 부분
차례

초록을 전하며
1부 지나온 날들의 기척
그 밤, 돌아온 자리/ 봄의 기척, 다시 피어나는 자리/ 여름, 흔들림의 자리에서/
가을빛 틈에서/ 겨울, 비워진 자리에 남은 것들/ 바람은 그렇게 추억이 된다/
그리움의 결/ 한 발짝 물러선 자리/ 웃음이 지나간 자리/ 빛이 먼저 닿던 자리
2부 곁에 머무는 마음
마음을 건너온 생명/ 남겨진 삶의 온도/ 다시 품게 되는 마음/ 머물지 못한 생명들/
경계에 서 있는 돌봄/ 머물 수 있는 시선/ 헐거워진 자리/ 엄마라는 이름으로/
오래된 피로/ 우리는 어디까지
3부 남겨진 질문들
소음과 침묵 사이/ 닿지 못한 말들/ 선의의 경계/ 편견과 오만/ 그 선택의 자리에서/
의식의 자리에서/ 침묵은 언제 책임이 되는가/ 바람이 돌아오는 자리/
묻지 않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그날의 미소로 남아/ 바람이 닿는 자리에서/
내 안의 거리를 지나며
해설 _ 세월의 미덕과 경륜의 언어
김종회(문학평론가, 전 경희대 교수)
해설 중에서
김순례의 첫 산문집 『오래된 향과 기억들 사이』는 그야말로 깔끔하고 단단한 외양을 가졌다. 우선 각기의 글 첫 줄을 시작하면서부터 어느 한 곳 빈틈이 없는 정제된 문장을 만나게 된다. 더욱이 그렇게 구성된 글의 문면文面이 딱딱하거나 건조하지 않고, 순후한 감성과 정감을 불러오는 특성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그 가운데 담고 있는 의미의 축적이 살아온 세월의 경험을 반영하는 듯 삶의 문리文理를 일깨우고 있다.
어느 한 사람이 자신의 일상 가운데 언제나 생명에 대한 깊은 경외감을 갖고 살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 ‘생명’의 존재 양식이 너무 광범위하게 확장되어 있는 것이기에 그렇다. 그런데 스스로의 삶을 소박하고 조촐하면서도 품격 있게 형상화하는 수필은, 여기에 선명한 답안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생명을 향한 진정성이 제유법적으로 제시될 때, 그 많은 설명의 언어들을 건너뛸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작가가 수필을 쓰는 일은, 그저 심중의 여러 감상을 글로 바꾸어 보이는 문학적 기능이 아니다. 그는 글을 통하여 지금 여기에 이른 자신의 인생 전반을 조망하고 반추하며, 또 반성하고 향후의 길을 찾는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수필은 그의 인생 독본이며 삶에 대한 사용 설명서이며 예측 못 할 운명과 만나는 비장의 무기다. 그러므로 그의 글쓰기 사전事前에 사소한 일상의 일은 그 배면에 숨은 진실들로 인하여 강력한 조력자가 된다. 그와 같은 작은 일의 구체성은, 어느덧 일관성과 보편성을 가진 삶의 법칙으로 증강된다. -김종회(문학평론가, 전 경희대 교수)
작가 약력
김순례
전북 정읍 출생. 문학을 공부하고, 삶의 현장에서 사람과 시간을 마주해왔다.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현대문학을 전공하고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경희대학교 휴마니타스칼리지 강사, 경북전문대학교 겸임교수를 지냈다. 여성 서사와 근대 사회 변동 속 문학 연구를 이어왔으며, 지나간 시간 속에 남아 있는 감정과 기억의 결을 더듬는 산문을 쓰며, 단편소설집 출간을 준비하고 있다. 『오래된 향과 기억들 사이로』는 그 첫 번째 기록이다.
srkim889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