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박정현 시인의 『당신이란 페이지를 넘기는 중입니다』는 곡진한 전언과 같은 시집이다. 자본주의가 모든 인간적인 것을 수치화하고, 환금성이 없는 예술을 도태를 넘어 절명에 이르게 하는 ‘지금, 여기’ 문학장文學場의 현실에서 낮고 깊은 눈길로 세계를 응시하고 자신의 기억을 끌어올려 서정적 미학의 건축물을 부려놓는다. 그의 시는 심미적 감식안을 통해 비극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존재론적 원적原籍이 어디에 있는지를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현대라는 위험의 내밀성을 돌파하고 “말해지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머물지 못하리라”는 말라르메의 말처럼 그는 경험과 기억을 삶의 기저로 재현하며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어둠을 밝히는 잔잔한 빛의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때문에 그의 첫 시집은 ‘마음의 작품herzwerk’ 탐구하려는 지난한 시적 행보의 소산이라 할 것이다.
시인은 하늘 전체, 곧 우주를 하나의 수은주로 유비한다. 물방울이 눈이 되어 은색 별로 반짝여 이 세상을 별천지로 만드는 풍광의 서술은 “은빛으로 변한 아이의 옷”과 같이 순수한 하나의 절경을 구축한다. 바로 그러한 “점별”들의 연대가 “부서질 듯 흔들리는 큰 선”이 된다는 시적 인식은 시인이 다다른 정신의 층위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무명하나 유명이며 무위하나 운동하는 도의 현현이 “저마다 자리 잡고” 시집 전체에 빛나고 있는 것이다. _ 해설(전형철 시인, 연성대 교수) 중에서
시집 속의 시 두 편
엽서의 속도
너는 이미 다녀갔는데
다녀가겠다는 엽서가 이제야 당도했다
파사석탑과 아유타국 공주가
합장하고 있는 380₩ 우표가 붙어 있었다
선납 일반통상 $50은 바람신의 노여움을
기어이 뚫겠다는 의지의 속도?
다녀간 후 다녀간다는 소식으로
너에게 닿고 싶어졌다
네가 앞질러버릴 너의 다음 엽서의
여정은 시작되었고
네가 다녀간 후 다녀가겠다는
엽서를 나는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알렉스프레거의 ‘Big West’는
너의 속도로 읽어야 했다
아무려면 어때요 그냥 쇠주나 한잔해요
삼남이라고요 거긴 지금 눈 천지일 것인데
설원을 뒤에 두고 혹한의 진부령 계곡을 찾으신 이유라도 있는지
날 잡고 보니 눈 내렸던 것일 테죠
여긴 아직 눈 소식도 없고 내걸린 지 보름 남짓한
퉁퉁 언 태들뿐 당신이 생각했던 눈 덮인
고즈넉한 덕장의 풍경은 영 아닐 것이오
보름만 당겼어도 쇠주 내음 풍기는 덕걸이 사내와도
일면식 할 수 있었을 것이고 보름만 늦췄어도 눈에 덮인
30일 태라도 보았을 터인데 애썼던 바가 아쉽게 되었군요
그렇다고 실망할 것까진 없지요 어차피 삶은 깜냥으로 세상을 보거나
그만큼의 바탕에서 상상을 이어가기 때문이지요
보아하니 눈이 가늘어서 무슨 의미를 캐내려는 듯하신데
맞아요 나는 환생을 꿈꾸는 15일 태에 지나지 않아요
석 달간을 더 얼었다 녹았다 해야 조건을 충족할 수 있지요
먹태 목태로 그칠 수도 있다는 것도 잘 알지요 이왕
진부령을 넘어온 이상 황태로 거듭나고자 늘 갈구하지요
사진이요 그렇지 않아도 홑셔츠 차림의 깡마른 덕장 주가 나타나서
선심 쓰듯 몇 번의 셔터질에 내외간 동반 사진도 몇 컷 건질 것이니
조바심치지 않아도 될 듯하고요 배경에 입 벌리고 하늘을 우러른 언 태들이
바로 환생을 꿈꾸는 15일 태들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길
혹시 알아요 풀리지 않는 난제의 밤 쓴 쇠주와
환생한 내가 당신을 마주하고 있을지도
차례
1부
소나기 후둑이고 지나가면 어쩌면
엽서의 속도 19
풍경 2 20
그 바람과 함께 떠날 거야 22
또 다른 당신 24
앙와신전장*을 읽다 26
아버지를 싸도는 시 28
어느 인연이 이 아침을 깨워 30
장다리꽃 활짝 피었다 32
바람의 지문 33
첫눈이 올 때마다 돋는 아버지의 발자국 34
지평선 36
무딘 경계를 만지며 38
마흔아홉 개의 기도와 백팔 개의 꽃을 놓으며 39
꽃과 눈의 연대 40
무릎으로 읽는 세상 41
2부
검은 실과 하얀 실의 구분이 모호해질 때
지치지 않고 흐르는 유래 45
경전을 끌었던 흑소의 여정을 밟으며 46
자작나무 순례 48
계절마다 주고 간 나이테를 품고 50
아무려면 어때요 그냥 쇠주나 한잔해요 52
당신의 국경은 안녕한가요 54
멀구슬나무 아래서 56
금 밖과 안 58
지금 당신이란 페이지를 넘기는 중입니다 60
저 순하고 둥두름한 이랑 61
거리치기 63
알고 봉께 64
밤나무는 발자국 소릴 먹고 산다 66
미혹 68
볕바라기 69
3부
가지 못한 길은 들어서기 어려운 입구를 가지고 있다
통점 73
눈이 나려요, 짐작하셨겠지만 74
돈키호테 기사님 76
세상과 맞추는 안도의 틈 78
달등 사이를 걷다 80
가시 하나가 뿌리를 내렸나 보다 82
물집 84
바람과 말은 같은 종족 85
서러움이 창만큼 환하다 86
오얏나무로 이어지는 길 87
느린 시간의 기억 88
바다를 파는 사내 90
형은 이젠 숭어를 잡지 않는다 92
사월이 질 때 꽃그림자 피고 94
껍질에 대한 공상 95
4부
밤의 가장 깊은 곳까지 다다르기도 하고
공덕 99
쉬이 연관되지 않는 어휘 100
얼마간은 돌같이 살아가야겠다 102
석결명이 가지런히 잎사귀를 접자 104
강박주의자들의 자유 106
시온에서 내리는 눈 108
울음의 기류 109
그녀의 웃음 빛깔을 귀로 보았다 110
누대를 지나올 그 후의 일 112
나는 지금 그때의 아버지다운지 114
새들은 어떻게 믿을 수 있었을까 116
꽃눈 흐드러진 봄밤 117
때 늦은 풀을 매며 118
다시 백련을 잇는 계절 120
해설 _ 우로보로스Ouroboros, 한 사제司祭의 유비론 123
전형철(시인, 연성대 교수)
저자 약력
박정현
전남 영암 출생
2019년 직지신인문학상 수상
2019년 『불교와문학』 등단
2023년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창작기금 수혜
시집 『당신이란 페이지를 넘기는 중입니다』
poet0730@hanmail.net
당신이란 페이지를 넘기는 중입니다
박정현 시집
상상인 시인선 064 | 2024년 12월 13일 발간 | 정가 12,000원 | 128*205 | 138쪽
ISBN 979-11-93093-79-5(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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