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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소개
임서원 시인의 시집 『어제는 사랑했고 오늘은 모르겠다』는 제20회 지리산문학상 수상작이다. 이 시집은 일상의 감각을 극도로 예민하게 끌어올려, 몸·사물·날씨·기억이 서로의 경계선을 무화시키는 순간들을 포착한 시의 지도다. 이 지도에서 시인은 서정의 ‘주인공’을 앞세우지 않는다. 대신 기우는 컵의 수면, 달그락거리는 막대사탕, 뒤집힌 무당벌레, 민달팽이의 진행 방향 같은 것들이 발화의 자리를 점유한다. 생생한 감각적 언어는 촉각과 미각, 점성과 온도를 전면에 내세우며, 설명하는 주체보다 먼저 “아욱의 쓴맛과 풋내”, “이가 막대사탕과 부딪히는 소리”, “메타세쿼이아가 줄지어 오는 기류”가 세계를 서술한다. 이때 세계는 하나의 장면으로 굳지 않고 늘 미끄러지고 흔들리며, 독자를 향한다. 그래서 이 시집에 등장하는 2인칭의 호칭 ‘너’는 위로나 명령의 대상이 아니라, 독자를 감각의 현장으로 호출하는 광섬유 같은 통로다.
가령 「타로」에서 “당신”은 다리 하나씩을 버리며 앞으로 가는 존재다. 소멸과 진행이 같은 동사로 설명되는 세계에서 결손은 결핍이 아니라 이동의 기술이다. 민달팽이가 다리를 버렸다는 은유는 살아남기 위해 신체를 재배열하는 생존의 문법이자, 그 자체로 재생의 기록이다.
이 시집을 관통하는 건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시계가 재는 양적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어떤 순간이 임계에 도달해 주체의 언어가 가능해지는 질적 시간이 시편들 사이를 관통한다. 「일기예보 알고리즘」에서 날씨는 복사·붙여넣기 되는 데이터처럼 보이지만, 그 틈으로 “그 사람이라는 단어”가 대량 유입되면서 적절한 시간이 열린다. 일정한 흐름을 따라가던 일상이 미세한 감정의 기류 하나로 급격히 지금 여기의 순간으로 변조되는 장면이다. 「2월 29일」의 윤일閏日은 이 카이로스의 극치다. 달력의 여분 같던 하루가 유년의 공복과 모성의 말, 성장판과 커튼의 그림자가 겹쳐지는 결정적 순간의 공간으로 재구성된다. 시인은 시간을 소비하지 않고 포착한다. 도래하는 순간을 민감하게 붙잡아 배치하는 기술, 이것이 임서원의 언어가 지닌 섬세한 시작술이다.
이 시작술은 주방과 부엌, 골목과 골짜기, 택배 상자와 서랍처럼 사적이고 협소한 장소에서 특히 돋보인다. 「아욱」에서 시인은 한 묶음의 푸른 잎을 치대며 “미끈거리는 눈물 같은 것”을 빼는 동작을 통해 자기 돌봄의 역설을 드러낸다. 「연습 중」에서는 ‘책의 페이지’와 ‘아궁이의 불’이 겹쳐지며, 이야기의 질주와 삶의 조리調理가 한 장면에서 공명한다. “마차 타는 냄새”라는 표현은 페이지와 난로, 아침과 단락을 한 번에 묶는 촉각적 은유가 되어, 임서원 시인 특유의 섬세한 감각이 어떻게 시적 비유로 전환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임서원 시인 특유의 시간 개념과 감각은 이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촛불 연습」에서 선명하게 확인된다. 이 시에서 사랑은 “어제에 머물러 있게 깨우지 않”는 선택이며, 골짜기의 빛은 도착하지 못한 채 덤불로 우거진다. 하지만 시인은 촛불 하나로 시간을 역류해 어제에 도착하고, 마른 덤불에 불을 붙인 뒤 오늘로 돌아온다. 여기서 ‘연습’은 회귀의 의식이 아니라, 타자의 부재를 견디는 내공의 수련이다.
언어적 차원에서 보자면, 임서원의 시는 눈·물·살·바람·상자·커튼·사탕·알약처럼 발음과 촉각이 가까운 명사를 선호하고, 그 명사들을 미세한 동작어(흔들리다, 밀리다, 붙들다, 스며들다)와 결합해 장면을 만든다. 이 결합의 리듬은 ‘설명’이 아니라 ‘도착’에 가깝다. 독자는 이해하기 전에 먼저 만지고, 알기 전에 먼저 감응한다. 제20회 지리산문학상이 주목한 것은 바로 이 감각의 섬세함 그리고 순간을 언어로 전환해 오늘을 다시 쓰는 시의 힘일 것이다.
추천사
성찰에는 힘이 있다. 성찰은 살피고 또 살피는 일이기에 그 자체로 근원적인 질문이자 시적인 자기반성이 된다. 좋은 시에는 좋은 성찰이 있기 마련이다.
임서원의 시는 성찰의 힘이 두드러진다. 때로는 화분에 대해 때로는 나방에 대해 혹은 단추에 대해 시인은 자신만의 성찰을 설계한다. 성찰은 ‘잘 고독한’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임서원은 ‘잘 고독’할 줄 알기에 뛰어난 성찰을 해낸다. 그의 시가 한 줄 한 줄 힘을 갖는 이유다.
그는 성찰의 고수답게 나직하게 읊조린다. “혼자 크는 것이 피곤하진 않다”고. _허연(시인)
‘적당히’는 늘 어렵다. 그것은 뜨뜻미지근한 타협이 아니라, 언제든 추락할 수 있는 외줄타기에 가깝다. 수시로 바람이 불어오는 외줄 위에서 가까스로 균형 잡기. 그래서 우리는 적당히 사랑하고 또 살아가는 데 번번이 실패하며, 언제나 모자라거나 넘치는 감정에 출렁인다. “적당한 어른은 어렵군요”(「어제처럼」)라는 고백처럼, 임서원의 시는 그 불가능한 균형을 더듬는다. 어제는 분명 사랑이었지만, 오늘은 알 수 없는 마음. 어제와 오늘, 사랑과 불안 사이에서 나부끼는 삶을 시로 붙잡는다. 흔들리되 쓰러지지는 않는 언어로 지은 그 시는 우리 마음속에 누름돌같이 오래 머문다. _이현호(시인)
시인의 말
어떤 문장에서 당신을 본 것 같아
그 단락에 머무느라 도무지 안 뵈었군요
이러고도 사랑이야?
시집 속으로
무슨 일은 만드는 게 아니고 생기는 거예요 몇 세기째 벽을 오르는 이끼가 산 채로 죽어버리는 기술을 익히듯 양손에 든 눈깔사탕과 함께 사라지세요 지금요
-「타로」 부분
할머니는 과자가 다 타기 전에 가자 해요
어제로 뛰어내리자 해요
나는 갈 수 없고
할머니는 혼자 어제로 갔어요
너무 어른이 되면 그런다는데
적당한 어른은 어렵군요
-「어제처럼」 부분
아무튼 우리는 불구야
포개진 채 서로를 닫아걸고 조여오는 올가미를
꽃대로 착각하는
그러니 말라가는 환호 그쯤에서 툭, 떨어지자 우리
-「목련 유전자」 부분
오늘은 어때?
나의 어제를 알고 있는 너는
거미가 앵두나무에 다 올라가면 앵두는 익는 거야
-「앵두의 기분」 부분
첫 줄은 바람이 정해주는 대로
창틀에서였다 죽은 나방 주위에 나방의 가루가 있었다 밖으로 빠져나가는 방법이다
-「거미의 도시」 부분
그해 찢어진 책 틈으로 모두 뛰쳐나왔다
태어날 때부터 애먹인 애들은 뒷장으로
내 앞에 있던 애들은 어디로 갔을까
접혀 있는 페이지는
무슨 일이 있었구나 싶고
-「연습 중」 부분
슬프다고 말하면 벌판이 의심스럽고 의심스러운 네가 먼저 잘 가 얘기했고 나는 초식동물처럼 뛰어갈 만했어
-「뿔 」 부분
낯선 것들은 모두 양 떼처럼 닮아 있어
닮은 것들은 조금 열린 창문보다 무서워
-「양 떼들의 밤 」 부분
코스모스에서 벗어난 가을은 모여서 거의 흔들립니다 죄는 여럿이 나눠 가지면 됩니다 다행히 편의점 시계는 자주 멈춰서 무엇인가 버리기 적당합니다
-「 빌려 온 도시」 부분
오래전 엄마는 포도 알맹이처럼 울컥 빠져나갔다
흥건해진 집에서 살색 크레파스를 쥐면
조금 후의 내가 보이고
내가 아는 사람들은 다 어디 있을까
-「빈집」 부분
어제 잠든 너를 어제에 머물러 있게 깨우지 않았다
어제는 사랑했고 오늘은 모르겠다
-「촛불 연습」 부분
미리 쓴 일기장에 비가 내린다
지우려 문지르다 뜯겨진 나, 는 삼인칭입니다
-「13월」 부분
어떻게 우는지 생각났어요
숲이 몸을 털고 일어선다
눈 달린 것들이 모두 눈 덮인 무덤가에서 졸고 있다
-「눈 덮인 무덤은 춘곤증이다」 부분
네가 말했지
사랑도 야생이라고
-「야생」 부분
날씨를 복사해서 붙여 넣기 했다
네가 딸려 왔다
너를 따라온 것들
-「일기예보 알고리즘」 부분
뒤집어쓴 이불을 조금 들춰보면
절뚝절뚝 방안을 돌아다니는 누군가
그렇게 자꾸 부르지 마세요 나는 이미 잠들었어요
처음부터 내 입을 오리지 않은 당신
-「종이 인형」 부분
오늘 밤 바람에 달그락거리다가 절벽을 열 거야 가여운 우리 그렇게 우리에 갇혀
-「주관적인 저녁 바다」 부분
거리는 어두운 쪽으로 돌아눕습니다 이보다 더 스산한 것들은 가짜입니다 하품을 합니다 하품은 무슨 슬픈 일이나 되는 것처럼 눈물이 나기도 합니다
-「사각」 부분
죽음으로 다 자란 인간들은 이제 곧 쏟아져 내릴 것이다
씨앗과 열매는 헤어지기 알맞다
-「늦가을」 부분
책장 주위로 날아다니는 날파리들은 선명하고 가벼워라 하염없이 선명해서 거짓 같은 사이는
어두운 곳에서 더 잘 외워졌다
그렇게 빈 공간을 한 마리 짐승처럼 어르고 달래 뿔로 자라는 자식들아
-「플라스틱」 부분
녹은 심장을 따라가는 눈송이처럼요 걱정 마요 엄마의 을씨년스러운 한때가 쏟아진 언덕입니다 나는 언덕 밑으로 잘 스미는 중입니다
-「잘 지내요」 부분
차례
1부 나의 어제를 알고 있는 너는
타로/ 어제처럼/ 앵두의 기분/ 거미의 도시/ 아욱/ 연습 중/ 비탈을 쥔다/
피규어/ 뿔/ 기울어진 일요일/ 목련 유전자/ 안개꽃
2부 낯선 것들은 모두 양 떼처럼 닮아 있어
빌려 온 도시/ 양 떼들의 밤/ 사춘기/ 저녁의 달력/ 빈집/ 촛불 연습/ 13월/
동물성/ 꽃무릇/ 누군가의 거울/ 2월 29일/ 눈 덮인 무덤은 춘곤증이다/ 야생
3부 캄캄한 구멍 속으로 달아나 혼자 고백할 때
어른/ 아무렇지 않게/ 일기예보 알고리즘/ 응달을 읽고 잠든 날 / 콩 벌레/
어떤 계절/ 비탈/ 화자/ 종이 인형/ 우리 밥 먹자/ 캥거루가 온다/
주관적인 저녁 바다/ 비비안
4부 나를 부를 때 다른 이름을 불러도 내가 대답했다
지하 정원/ 우리들 여름/ 불면/ 사각/ 오래된 안녕/ 식물성/ 유전/
어쩌면 숲/ 밤의 보도블록/ 플라스틱/ 그렇게 수선화/ 늦가을/ 잘 지내요
해설 _ 검은 상처의 블루스
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 명예교수)
해설 중에서
검은 상처의 블루스
―임서원 시집 『어제는 사랑했고 오늘은 모르겠다』 읽기
이 글의 제목을 “검은 상처의 블루스”라 붙인 이유가 있다. 여기에서 ‘블루스’는 ‘어떤 슬픈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 임서원은 그 중심을 애써 가리고 있지만, 이 시집엔 눈물의 깊은 수원水源이 있고, 이 시집은 그것에 대한 상징적 기억이고 기록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슬픔의 샘은 ‘검은 상처’라 이야기할 만큼 깊고 아프다. 임서원은 그 아픔을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그려낸다. 그의 시들은 낭만적 서정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시들은 감성적이지만 감성 자체를 진실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밀란 쿤데라가 한 인터뷰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백치』에 대하여 “감정 자체가 가치가 되고 진실이 되는 그 분위기”를 참기가 너무 힘들었다고 고백한 것처럼, 임서원은 눈물의 원천에 대하여 이야기하지만 그런 감정이 자신의 시를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는 겹겹의 은유로 상처를 에워쌈으로써 상처가 날-목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예비한다. -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 명예교수)
저자 약력
임서원
2015년 『서정시학』 등단
시집 『어제는 사랑했고 오늘은 모르겠다』
2024년 아르코 문학 창작산실 발표지원금 수혜
제20회 지리산문학상 수상
lsa223@naver.com
임서원 시집 어제는 사랑했고 오늘은 모르겠다 (제20회 지리산문학상 수상집)
상상인 기획시선 8 | 2025년 10월 1일 발간 | 정가 12,000원 | 128*205 | 130쪽
ISBN 979-11-7490-013-5(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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