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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소개
염민숙 시인의 『밤은 너무 많거나 너무 적어』는 생활의 감각으로 밤의 얼굴들을 끌어올리는 시집이다. 거창한 이념이나 추상적 어휘 대신, 손에 잡히는 사물과 장면들, 이를테면 어항 속 새우, 실비니아 쿠쿠라타, 냉면집 면수, 페스츄리 반죽, 초록색 앵무새, 침대, 의자와 그네, 눈사람, 산수유 길 등을 통해 삶의 모순과 부조리를 조용히 드러낸다. 이 시집이 보여준 이런 예리한 감각과 깊이 있는 윤리적 통찰이야말로 제6회 선경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이유가 아닐까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시집의 첫인상은 무엇보다 생활 감각이다. 시들은 거의 언제나 일상의 구체적인 장면에서 출발한다. 「페스츄리 만들기」에서 화자는 “날이 차가우면 페스츄리를 만들어요”라고 말하며, 차가운 볼, 차가운 물, 찬 밀가루, 차가운 버터와 밀대의 감촉을 세밀하게 그린다. 반죽을 접고 펴고 다시 접는 반복 동작은 주방의 한 장면처럼 평범하지만, 곧 사랑과 관계의 풍경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따뜻한 오해」 역시 평양냉면집 면수라는 아주 구체적인 소재에서 출발한다. “면수는 냉면 사리를 삶은 물이다/평양냉면집에서는 주전자에 면수를 담아 준다” 같은 문장은 거의 설명문에 가깝지만, 면수를 마시라는 엄마의 말, 최루탄 냄새가 가득했던 어느 시절, 핀란드로 이민 간 친구의 기억이 겹쳐지면서 장면은 서서히 변형된다. 그리하여 평양냉면집 주전자에 면수를 담아 먼 곳으로 보내고 싶다고 말한다. 생활 세계의 작은 사물 하나가 부재와 이별의 감정을 극명하게 떠올리게 하는 방식이 특징이다.
시편들은 도처에서 사회적 부조리를 들춰 보여준다. 특히 불평등의 문제는 표제시이기도 한 「짧은 잠」에서 선명하게 묘사된다. 이 시는 어항 위에 떠 있는 수초 실비니아 쿠쿠라타와 그 아래에 숨은 작은 새우들을 통해 삶은 공평하지 않다는 사실을 비유적으로 드러낸다. “누구에게나 밤은 너무 많거나 너무 적어”라는 문장은, 이 시집의 제목이자 시인이 바라보는 세계 인식의 핵심을 담고 있다. 밤, 즉 쉼과 어둠, 고독과 회복의 시간이 누구에게는 지나치게 길어 우울과 고립을 낳고, 누구에게는 터무니없이 짧아 숨 고를 틈조차 주지 않는 현실. 빛과 그늘, 잠과 노동은 결코 균등하게 나누어지지 않는다.
관계의 폭력성 또한 이 시집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다. 「뱀과 침대」에서 한 사람이 침대를 건너가는 모습은 “길을 다 건너지 못한 뱀”의 형상으로 제시된다. 침대는 사랑과 휴식의 장소인 동시에, 낯선 체취와 잔존하는 기억, 반복된 관계의 이력들이 스며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기린처럼」에서 화자는 “기린처럼 싸워 우리는/수컷 기린처럼 온몸으로 싸워”라고 말하며, 기린, 영양, 하마, 체체파리 같은 동물들의 행동을 빌려 인간관계 속의 전투적 면모를 형상화한다.
사랑 또한 이 시집에서 온전한 결합보다는 늘 비껴 나 있거나 삐걱거리는 상태에 가깝다. 「페스츄리 만들기」에서 사랑은 겹겹이 감싸고 둘러싸는 “페스츄리 사랑”이다. 「설희」에서는 피와 딸기잼, 흰 밤과 어머니들의 계보가 겹쳐진다. “당신과 나 단일 민족이라고 자랑하지 말자”라는 문장은 혈연, 피, 민족과 같은 말들이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얼마나 쉽게 폭력과 배제를 정당화하는가를 비틀어 보여준다. 사랑은 이 시집에서, 피와 순수성의 신화를 벗겨내고 나면, 여러 겹의 침묵과 포기의 합으로 남는다.
특히 이 시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시어의 어조이다. 염민숙의 시는 자주 청유형과 존대어로 끝맺는다. “의자에 앉아요”, “손을 담가요”, “손 내밀지 말아요”, “차가운 밀대로 밀어요”, “그럴 일이 없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같은 문장들은, 겉으로는 상대를 배려하고 조심스럽게 이끄는 말투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 속 상황은 결코 평화롭지 않다. 이 시집에서의 청유형과 존대어는, 상대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예의가 아니라, 끝내 좁혀지지 않는 거리, 소통 부재를 감싸는 얇은 막처럼 작동한다. 정중하게 말을 건네고, 다정하게 부탁하고, 조심스럽게 제안할수록, 인물들은 서로에게 닿지 못하고 제각각의 밤으로 밀려난다. 그래서 『밤은 너무 많거나 너무 적어』를 읽는 경험은, 다정한 말투를 통해 오히려 고립과 단절을 더 명료하게 체감하게 되는 특이한 독서 경험이기도 하다.
제6회 선경문학상을 받은 이 시집은, 화려한 수사를 앞세우지 않고 생활의 언어로 세계의 모순을 직시한다는 점에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을 정직하게 증언하는 시집이다. 공평하지 않은 세계에서, 각자의 짧거나 너무 긴 밤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밤은 너무 많거나 너무 적어』는 조용하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말을 건다. 다정한 존대어로, 그러나 결코 안이한 희망을 주지 않는 태도로, 시집은 말한다, 밤은 누구에게나 너무 많거나 너무 적을지 모르지만, 그 밤을 바라보는 새로운 감각만큼은, 함께 나눌 수 있다고.
시인의 말
저어새가
갯바닥을 젓듯
문장의 바닥을 저었다
때로
칠성장어 같은 문장 하나를
건졌다
시집 속으로
젖은 머리로 풍경을 물들이는 당신 어떤 눈동자로 어떤 꽃 한 다발로 물들였기에 나는 뜨거워지는지 빨갛게 세계의 한 귀퉁이를 태우는 당신
-「안개」 부분
이불에 체취를 남기는 사람은 얼마나 많은 침대를 넘어왔을까
낯선 향을 악물고 놓지 않는 이불을 들고 뒤돌아보면
-「뱀과 침대」 부분
사랑이 보인다는 말을 믿어요
유리 화병의 유리꽃이 피어나고 있어요
속이 보이지 않는 유리는 믿기지 않아요
유리라는 믿음을 깨니까요
-「유리 전시관에서」 부분
사랑을 여러 겹 두르면 우리 사랑은 두툼해져요
부서진 사랑 몇 개쯤은 털어버려도 괜찮아요
-「페스츄리 만들기」 부분
우리는 흰 길을 수혈받았어요 흰 길은 눈에 띄지 않는 창백한 길이죠
창백한 길을 가다 보면 창백한 사람이 보이고 창백한 사랑이 보여요 흰 손이 흰 손을 잡으면 오래 서 있을 수 있어요
-「수혈 」 부분
오래된 감각을 환기하는 사이였을까 우리는 서로 구원이었을까 몸을 넘어 영혼까지 적시는 구원을 바랐던 것일까 우리 얼굴의 반은 선글라스인 것처럼 몸과 영혼 중 무엇의 구원을 바랐던 것일까
-「밀회 2」 부분
나는 죄를 분별하는 사람
횃대를 치우며 괜찮다는 앵무새를 가둬요
-「초록색 앵무새가 사는 방」 부분
외로움은 폴라티에 붙은 오리털 같아서
스치면 다시 달라붙는 음표라서
귀를 어디에 기대야 하는지 몰랐다
-「음악을 끄는 밤」 부분
어느 밤은 딸기잼같이 말랑해
잼 같은 밤이라고 하면 너무 끈적한가
잼 같은 피가 흐른다고 하면 너무 무서운가
-「설희」 부분
책들을 베고 누우면 다락방은 같은 계절이 반복되는 외국이었다
시외버스가 지나가도 어디로든지 나가고 싶지 않았다
-「나의 다락방」 부분
대바구니가 닳아 어머니도 닳고 오빠도 닳아
산비둘기 쓸어 담던 대바구니에 핏방울 번진다
-「대바구니에 담은 저녁」 부분
이별은 밤 쪽으로 발이 자라는 병이다
지나온 눈길 쪽으로 밤이 자라는 병이다
-「다른 눈」 부분
잼을 넣으려고 빵을 자르는데 빵이 입을 벌려 접시들을 삼킨다
양쪽에 포크를 꽂자!
포크를 다리 삼아 걸어 다닐지도 모른다
-「가장 긴 꿈」 부분
영원에 끌리는 날이다
한 손으로 블루베리를 따서 파는 그녀에게 하루는 얼마나 얇은 층인지
한 사람을 지나쳤는데 깊은 저녁에 들었다 나온 기분이다
-「빛이 머무르는 순간」 부분
나는 물 고인 자리에 너를 놓아준다
오래된 질문으로 다시 자신을 증명하는 이 세계에
-「증명」 부분
천 일 동안 쌓인 꿈에 밥을 먹이며
차곡차곡 벽돌로 쌓는 도서 목록입니다
-「필독 도서」 부분
책을 읽는 여자에게 물을 내주었다
책에서 돌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책 속의 이야기가 없었던 것처럼
-「무거운 책」 부분
차례
1부 새는 발효된 그 밤을 자꾸 물어와
뱀과 침대/ 루페/ 킹크랩/ 검은 닭/ 유리 전시관에서/ 페스츄리 만들기/
양철 방패/ 이인삼각/ 안개/ 수혈/ 밀회 1/ 밀회 2
2부 건반과 건반 사이에 오래 누워
푸른 밧줄/ 초록색 앵무새가 사는 방/ 애도/ 뜨거운 시/ 공기압/ 음악을 끄는 밤/
응시/ 따뜻한 오해/ 홍천강에서/ 증식하는 집/ 마지막 병동/ 야적장/ 짧은 잠
3부 길이 하나였다면 4월이 더 쉬웠을까
금잔화가 피는 정육점/ 설희/ 모퉁이의 감정/ 길에 쓴 가사/ 스노우볼 새우/
나의 다락방/ 고도에서/ 저녁 9시/ 대바구니에 담은 저녁/ 다른 눈/
겨울엔 유자차가 좋다/ 과일 가게/ 가장 긴 꿈
4부 그녀를 뒤돌아보는 동안 하루가 지났다
빛이 머무르는 순간/ 컵에 손잡이가 있는 이유/ 증명/ 방학/ 필독 도서/ 꽃시절/
의자와 그네/ 윈드아이 카페/ 캠핑/ 음/ 우리는 기린처럼/ 돌이 움직인 날/ 무거운 책
해설 _ 증식하는 감각
고광식(문학평론가)
해설 중에서
시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때,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 우리는 감각으로 타인에게 다가가지만, 감각으로 고립을 선택하기도 한다. 염민숙의 시에서 이 미세한 힘의 충돌과 뒤틀림의 세계는 삶을 이해하기 위한 표현으로 나타난다.
염민숙 시인의 감각은 끊임없이 증식하는 중이다. 감각은 자아와 타자 사이를 지나 부조리의 세계를 확인하기까지 증식을 거듭한다. 감각은 타자에 다가갈 때마다 여러 사물을 관통한다. 시인은 그렇게 증식된 감각으로 현상 안쪽을 살피는 데 성공한다. 그러므로 염민숙 시인은 자아에서 타자로, 그 너머의 세계로 시적 진술을 끊임없이 펼쳐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사물을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며 다양한 형태로 만든다. _고광식(문학평론가)
작가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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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민숙
2015년 머니투데이 신춘문예
시집 『시라시』 『오늘을 여는 건 여기까지』 『밤은 너무 많거나 너무 적어』
제6회 선경문학상 수상
yms2030@hanmail.net
염민숙 시집 밤은 너무 많거나 너무 적어
제6회 선경문학상 수상집
상상인 기획시선 9 | 지은이 염민숙 | 2025년 11월 24일 발간 | 정가 12,000원 | 128*205 | 148쪽
ISBN 979-11-7490-028-9(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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