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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이태희의 디카시집 『푸른 책에 밑줄 긋다』는 제목처럼, 하늘과 땅, 계절과 사물 위에 밑줄을 그어 나가는 한 시인의 섬세한 시선의 기록이다. 먼 산의 흰 눈과 호수의 오리, 물가의 진달래가 한 화면 안에서 ‘봄 마중’을 하는 첫 장면에서부터, 백록담의 장엄함과 겨울나무의 고독, 봄을 기다리는 얼음의 시간에 이르기까지, 시집은 봄‧여름‧가을‧겨울의 4부 구성으로 짜여 있어 한 해의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존재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이 디카시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시간의 변화와 계절에 따른 자연의 모습이 얼마나 세밀하게 포착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다. 봄의 호수에는 오리의 자맥질과 물가의 진달래가 설렘을 전하고, 여름의 지리산 고사목은 “몸으로 살아온 백 년, 혼으로 살아갈 천 년”이라는 문장과 함께 시간을 초월한 생명의 단단한 숨을 들려준다. 가을에는 비·바람·햇살·구름이 지나간 자리의 빛깔이 ‘가을이 눕는다’는 장면으로 응축되고, 겨울에 이르면 잎도 열매도 떠나보낸 ‘겨울나무’가 봄을 기다리기보다 “푸르고 투명한 창공 속으로/내 고독의 뿌리를 뻗”는 존재로 서 있다.
디카시의 효과는 무엇보다 구체적 사물의 개념화를 통한 사유의 확장에서 비롯된다. 이 시집에서 연꽃, 모과, 붓꽃, 태양 흑점, 신호등, 심지어 사마귀와 그림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단순한 피사체가 아니라, 존재와 관계, 시간과 기억을 사유하게 만드는 개념의 장으로 확장된다. 반대로, 추상적 언어로 흘러가기 쉬운 개념들을 다시 사물의 피부와 질감으로 불러내는 대목도 인상적이다. ‘하늘은 책이다’에서 시인은 “푸른 책에 흰 밑줄 긋는다/시나브로 지워진다”고 말하며, 누구나 올려다보는 하늘을 ‘만인의 책’이라는 개념의 장으로 옮겨놓는다. 그러나 곧 “수수만년 읽어도 닳지 않는다”는 표현을 통해, 닳아 없어지지 않는 푸른 종이의 촉감을 떠올리게 한다. 이처럼 개념은 사물의 구체성을 떠난 추상이 아니라, 다시 구체의 감각 속으로 되돌아가 독자의 몸에 각인되는 경험으로 완성된다.
이런 경험은 이태희 시인이 찍은 사진의 품격이 있어 가능한 일이다. 호수의 잔물결과 먼 산의 설경, 모과의 표면을 타고 흐르는 빛, 달을 닮았으나 “이것은 초승달이 아니다”라며 다른 상상력을 촉발하는 형상, 녹색과 적색의 신호등이 만들어내는 밤 풍경까지, 화면 구도와 노출, 색감은 대체로 차분하면서도 또렷하다. 주제와 상관없는 군더더기를 지워내고, 꼭 필요한 사물 몇 가지만 남겨 놓은 화면은 시의 언어와 자연스럽게 호응하며 서로를 비춰준다. 사진의 질적 우수성은 단지 선명한 해상도나 기술적인 완성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적 발화를 준비하고 뒷받침하는 미묘한 거리감과 여백, 빛의 깊이에서 드러난다. 이 덕분에 독자는 먼저 사진을 ‘본’ 뒤, 곧이어 시를 ‘읽는’ 것이 아니라, 사진과 시를 동시에 ‘겪는’ 경험을 하게 된다.
『푸른 책에 밑줄 긋다』는 우리 일상의 풍경 속에 이미 놓여 있었으나 제대로 읽히지 못했던 수많은 장면에 밑줄을 그어 주는 시집이다. 멀리 있는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곁에 있는 사물과 계절, 빛과 그림자에 천천히 밑줄을 긋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나는 지금 무엇을 기다리는가, 무엇을 비워야 덜 흔들릴 것인가, 어떤 어둠을 품은 밝음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사계절을 순환하는 이 디카시집은 독자에게 거창한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갈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가 매일 지나치는 길 위에 조용히 밑줄을 그어 두고, 언젠가 그 밑줄 위로 각자의 문장을 써 내려가 보라고 권하고 있는 듯하다.
작가의 말
두 번째 디카시집을 펴낸다
두 해 동안 금요일마다 인터넷 신문에 올렸던 작품에서 골랐다
매일 사진 찍는 일은 일상이 되었고
매주 디카시 올리는 일은 소확행이 되었다
디카시는 세상이라는 책에 밑줄 긋는 작업이다
수수만년 읽어도 닳지 않는 책 속으로 오늘도 떠난다
2025년 가을에
이태희
디카시집 속으로
장자의 꿈
꽃인가 나비인가
씨앗인가 열매인가
꿈인가 생시인가
미망의 길 위에
신기루 같은 생
해를 기다리는 마음
무엇이 우리를 줄 세우는가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떠오르는 해는 하나지만
기다리는 해는 수천수만이다
비행운
막막한 허공을 날아본 적이 있는가
빽빽한 숲을 헤쳐본 적이 있는가
열사의 사막을 횡단한 적이 있는가
망망대해 건너본 적이 있는가
그대 온몸으로 생애를 건너고 있는가
여름 모과
미상불, 배꼽의 꽃받침도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 너는 풋내를 벗고 향기로워야 한다
햇빛 달빛 견뎌내고 비바람에 씻겨야 한다
무릇 한 시절 그렇게 익어가야 한다
묵언 속에 절차탁마해야 할 나의 디카시!
가을이 눕는다
봄부터 가을까지 얼마나 흔들렸는가
비와 바람과 햇살과 구름의 세월 지나고
떠나야 할 때 떠나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붓꽃
얼마나 많은 붓이 지나야 그림이 완성되는가
얼마나 많은 풍파를 겪어야 꽃으로 피어나는가
차례
1부 봄
봄 마중/ 장자의 꿈/ 얼레지/ 변신/ 무대/ 우듬지/ 경계/ 어떤 방생/ 갈치의 생애/ 달팽이 속도/ 개태사 철확/ 풍금에게/ 예술론/ 해를 기다리는 마음/하늘은 책이다
2부 여름
지리산 고사목/ 괜찮아/ 연꽃을 보다/ 연꽃의 거리/ 방문객/ 허물/ 비행운/
등대는/ 파문/ 폭포/ 돌탑/ 상흔/ 어떤 장례식/ 청개구리 시절/ 여름 모과
3부 가을
가을이 눕는다/ 물든다는 것/ 밤꽃/ 여명의 시간/ 분꽃의 말/ 빈자리/ 붓꽃/
등축제에서/ 맨 뒤의 하늘/ 태양 흑점/ 해와 사마귀/ 외발 서기/ 염소의 아침/
모과 향은 어디에서 오는가 1/ 모과 향은 어디에서 오는가 2
4부 겨울
백록담에 올라/ 설악을 바라보며/ 겨울나무/ 겨울나무에게/ 길에 관한 생각/
화산을 품다/ 이것은 초승달이 아니다/ 푸른 신호등/ 붉은 신호등/ 돌의 표정/
갈매기 영토/ 동행/ 물방울 명상/ 코스모스 바닷가/ 봄을 기다리며
해설 _ 계절 감각과 활달한 상상력의 대위법
김종회(문학평론가, 한국디카시인협회 회장)
해설 중에서
이태희 시인의 디카시는 우선 사물을 감성적으로 포착하는 솜씨가 돋보이고, 거기에 몇 줄의 시행으로 의미의 깊이를 더하는 기량이 놀랍다. 이 지경에 이르기 위해서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어느 곳에서나 시인으로서의 오감을 열어놓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항차 네 계절의 경관에 순차적으로 카메라의 렌즈를 가져가기 위해서, 시인은 영일 없이 간단 없이 디카시인으로서의 포즈를 유지해야 했을 터이다. 그런데 이 또한 스스로 선택한 운명의 길이자 그 자신에게 속 깊은 기쁨이 아니었겠는가. 바라기로는 계절의 감각과 활달한 상상력의 대위법을 보여준 그의 시 세계가 더욱 화명하고 유암하게 전개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더 넓고 깊은 감상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었으면 한다. -김종회(문학평론가)
작가 약력
이태희
1963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다. 1988년 월간 『동서문학』 부문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했다. 인천대학교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공부하며 석사논문으로 「김수영 시의 화자 연구」, 박사논문으로 「정지용 시의 창작방법 연구」를 썼다. 시집으로 『오래 익은 사랑』(포엠토피아, 2001)이 있고, 2017년 『시와산문작품상을 수상했다.
현재 인천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재직 중이다. 글쓰기와 스토리텔링 과목을 가르치고 있으며, <설향독서회>, <춘천독서회>, <군포독서회> 등의 시민 독서 모임도 진행하고 있다.
첫 디카시집 『꽃 트럭』(애지디카시선 6)을 2023년 10월에 출간했고, 이번 『푸른 책에 밑줄 긋다』는 두 번째 디카시집이다. 한국디카시인협회 운영위원, 《세계디카詩》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mail_hyee1963@hanmail.net
이태희 디카시집 푸른 책에 밑줄 긋다
상상인 디카시집 2 | 2025년 12월 1일 발간 | 정가 14,000원 | 140*190 | 156쪽
ISBN 979-11-7490-030-2(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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