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새 천 년이 시작된지도 상당한
시간이 흘러간 지금 21세기 현대인들에게 가장 불행한 일은 자신의 삶을 만들어 내고 있는 지금의 현대문명이
과연 이대로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하는 판단의 잣대를 찾지 못하고, 통제하기 힘든 상태로
달려가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달리 뾰족한 길이 보이지 않는 현실 때문이라고 본다.
지금의 현대문명이 있기까지 언제부터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판단해볼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과거를
잃어버림으로서 심각한 기억상실의 중증에 걸려 있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는데 현대문명의 더 큰 불행이 있다고 본다.
그 해결책은 결국 상실된 기억을 되살리는 길 밖에 없다고 본다.
기억에서 잊혀진 신화의 역사를 다시 살려내지 못하는 한 해결책은 없다고 본다.
나는 지금 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현대문명이 처한 심각한 문제는 종교와 과학의 분열이라고 본다.
종교는 문명의 질적 성숙을 길러주고 과학은 문명의 양적팽창과 합리성을 주게 된다.
따라서 종교와 과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간문명의 양대 축이건만 서로가 양립하기 힘들만큼 심각한
현재의 대립구도는 신화시대라는 과거를 잃어버린 기억상실 탓으로서 먼 신화시대의 인류의 조상들은 종교와 과학을 분리하지 않았다고 본다.
종교가 없는 과학, 과학이 없는 종교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신화의 역사를 썼다고 본다.
그러나 지금은 종교와 과학은 별개라고 생각하는, 양립이
불가능한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라는, 방관적 입장에서 보고 있다고 본다.
왜 그런가?
모르기 때문이라 본다.
모르면 모른다고 솔직히 말하면 되는데도 다 아는 것처럼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어설픈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종교와 과학의 태도라 본다.
과학을 부정하는 종교나 종교를 부정하는 과학은 절름발이
밖에 안 된다고 본다.
어떻게 과학이라는 합리성이 결여된 종교가 있을 수 있으며 종교라는 질적 뒷받침이 없는 과학이 있을
수 있겠는가?
현대인들은 부정하고 싶을지 모르겠지만 신화의 역사를 만들어 내었던 먼 인류의 조상들보다 훨씬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본다.
의식주라는 기본적인 삶의 조건만 나아졌을 뿐 그 외는 그들보다 더 모르고 더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고 본다.
다른 것은 다 부정할 수 있다 쳐도 최소한 그들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지금의 현대인들 보다는
명확하고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고 본다.
그 증거로서 나는 신화시대의 핵심적 우주론인 "천부경“을
든다.
천부경은 신화시대의 인류역사를 만들어낸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종교적 과학적 결과에서 모아진 우주론적
핵심이자 현대문명이 처한 기억상실의 중증을 치료할 지금으로서는 유일한 처방이라 보기에 천부경은 한민족에게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인류 모두에게 소중한
것임을 꼭 알려주고 싶다.
그것은 인류가 한 가족처럼 소통했던 신화시대에 인류의 먼 조상들이 다 같이 힘을 모아 만들어낸 지혜의
산물이라고 나는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종적, 민족적,
국가적 구분을 떠나 그들의 조상들의 숨결이 배여 있는 천부경은 그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는 인류모두의 것이 될 수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야기를 풀어가다 보면 알겠지만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마야, 수메르, 황하, 등등 인류문명의 발상지에서 나타나는 여러 흔적들에는 천부경의 우주론이 깊숙이 깔려있다고 본다.
특히 수학적 흔적들은 천부경에서 유도되는 원리들이 고스란히 배여 있음을 느낄 것이라 본다.
천부경은 종교와 과학을 함께 아우르는 우주론으로서 이 둘을 연결하는 수단으로서 천부경은 기본적인 기하학과
수학의 원리를 경전의 바탕에 깔고 있다고 본다.
천부경이 81자로 쓰여진 이유도 이러한 원리에 충실했기
때문이라 본다.
따라서 천부경은 고대인들의 시각에서 본 종교와 과학을 아우르는 우주론적 논리를 기하학과 수학적 원리를
바탕에 깔고 고도로 압축해 표현하고 있다고 본다.
이런 천부경의 우주론적 흔적은 각종 종교들의 경전들에도 나타 난다 보는데 성경, 불경, 유교경전, 도교경전
같은 서적들에도 천부경에서 유도돼는 기하학적 원리와 수학적 원리들이 쓰이고 있어 경전의 해석에 결정적 열쇠가 되는 매우 중요한 숫자들과 기하학적
개념들이라 보나 문자에 가려진 숫자와 기하학적 의미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므로 지금은 아무도 신경을 쓰고 있지 않다고 보며 왜 그런 숫자들이
쓰였는지 이해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본다.
또한 이집트의 피라미드, 마야의 유물, 역 등등 이루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인류문명사에 나타난 여러 흔적들에도, 지금의
현대문명 속에도 천부경의 우주론적 원리들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배여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천부경은 인류 모두의 것으로서 참으로 긴 세월을 인내 하면서 어렵게 전승해 오늘날 다시 세상에
전해지게 해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한민족의 것이라고 일방적인 주장을 해서는 안 되리라 본다.
그것보다는 천부경의 우주론을 만들어 내었던 먼 인류의 조상들이 꿈꾸었던 세상이 무엇이었는지를 천부경의
우주론을 통해 알아보고 그 꿈을 지구촌의 사람들이 다 같이 힘을 모아 실천해 나가는 것이 더 중요 하리라 본다.
과학적 합리성이 결여된 종교는 종교적 도그마에 빠지기 쉽고 종교적 믿음이 결여된 과학은 과학적 도그마에
빠지기 쉽다고 본다.
그러므로 동서고금을 통 털어 변함없이 도그마에 빠지지 않고 늘 그대로인 소통의 기준은 기하학과 수학밖에
없다고 본다.
기하학과 수학은 언제나 같은 답을 준다.
이 두 학문이야 말로 진리가 도그마에 빠지지 않게 제대로 후대에 전달되게 해 주는 인류의 지혜 들이라
본다.
따라서 신화시대 때에 만들어진 지금의 현대 기하학과 수학의 바탕이 되는 고대인들의 기하학과 수학적
논리들을 집대성해 설계된 천부경의 우주론을 통해 고대인들의 종교와 과학의 성립원리를 확실히 알아낸다면 신화시대 이후 동·서문명의 여러 민족들의 종교와 과학의 분화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변화하며 오늘날까지 흘러 왔는지를 뚜렷이 비교분석해
볼 수 있으리라 보며 그 문제점 또한 확실하게 짚어 낼 수 있으리라 본다.
그러므로 신화시대로 들어가게 해주는 비밀의 열쇠가 곧 천부경의 우주론임을 깊게 깨달아 소중한 인류의
유산임을 깊게 인식해 주기를 다시 한번 강조 하고자 한다.
철이 들면서 지금까지 지나온 세월은 나에게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돌아보면 이렇게 까지 거창하게 인류문명을 들먹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가끔씩 시를 읽고 사람들과 섞여 열심히 살면 된다는 소박한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돌아보니 그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소통의 방식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느낀 것이다.
왜 그럴까 ?
조금씩, 조금씩 그 해답을 알아가는 과정이 깊어지면서 결국은
여기까지 와버린 것 같다.
새 술은 새 부대라는 성경구절처럼 신화시대라는 기본으로 다시 돌아가 오늘날의 인간문명의 인식의 틀을
아예 통째로 바꾸지 않고서는 아주 사소한 작은 소망조차 제대로 이루어지기 힘든 부질없는 것임을 어느 날 나는 깨달았던 것이다.
그때부터 그 해법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던 세월이 쌓이면서 이루어진 결과가 이 글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한 인간이 소망하고 키워온 꿈을 조심스럽게 꺼내어 적어보는 지나온 세월의 인생의
시라고 생각해 주기를 바래본다.
신화시대 이후 천부경의 우주론으로 통합되어 있던 학문적 기초들이 세계 각 민족들의 학문체계로 분화가
일어나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그 가지들이 전혀 다른 학문적 개념으로 보게 되는 오해가 생겨났다고 보기에 개념적 혼선을 먼저 정리하지 않고서는 이
사람이 전개하는 고대한국학의 논리들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혼선이 있을 수도 있다고 보기에 이점 유의해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동안 먹고 살기 바빠 제대로 집중을 하지 못하고 시간이 나는 대로 틈틈히 적어 놓은 토막글이라
나름으로 대강 간추려 보기는 하나 중복되는 내용도 있을 것이고 읽기에 다소 불편한 부족하거나 틀린 부분도 있을 것이라 보기에 이해를 구하며 개인적으로는
이 글이 한국학의 새로운 길을 모색 해 보는 기초적 바탕이 되기를 바라며 나아가 한국학이 세계학으로 발돋움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이 사람의 견해가 무조건 다 옳다는 식의 억지 주장을 할 생각은 없으니 세부적인 부분만으로
보지 말고 전체적인 관점으로 이 글에 대한 진위 여부를 각자가 판단해 주기를 바란다.
2019, 2. 24.
하심 정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