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활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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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오
영철....................................작성시간15.03.22|조회수89,926
1. 양치 후
양치물을 변기통에 뱉고 10분 후 물을 내리면 신기하게 악취가
사라집니다.
2. 달걀을 삶기 전에 한 시간 정도
방안 온도에 둔 다음, 소금을 조금 넣어
주거나 식초를 몇 방울 넣으면 터지지 않고 잘 삶아집니다.
4. 옷에
볼펜자국이 묻었을 때는 물파스로 싹싹 문질러 주면 볼펜자국이 잘
지워집니다.
5. 돼지고기를 요리할 때 커피 한
숟갈만 넣으면 잡냄새를 말끔히 없애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6. 말라서 딱딱해진 식빵 사이에 새 식빵을 끼워주면 새
식빵처럼 촉촉해집니다.
7. 사과 반쪽을 차 안에 하룻밤 놔두면 차 안에 냄새가 없어집니다.
8. 장미꽃을
화병에 꽂을 때 소다수를 부으면 시들지 않고 오래 갑니다.
9. 옷에 묻은 잉크의 얼룩은 하룻밤 동안 우유에 담가 두었다가 빨면
깨끗이
없어집니다.
10. 더러운 목욕탕은 버터와 고운 소금 그리고 우유를 섞어 닦아주면 새것과
같이 윤이 납니다.
11. 아파트 하수구가 막히면 거친 소금을 한 주먹 집어넣고 뜨거운 물을 부으면
뚫립니다.
12. 삶는 빨래는 삼베주머니에 달걀 껍질을 넣고 삶으면 눈 같이 하얗게 됩니다.
13. 가격표나 상표가 붙어있던
자리에 남아있는 흔적은 먹는 기름으로 닦으면
없어집니다.
14. 양파를 사오면 싻이 나오는데 양파 봉지에 빵
한쪽을 넣어 두면 쉽게 싻이
나지 않습니다.
15. 거울이나 유리를 닦을 때 식초에 젖은 수건으로 닦으면
깨끗해집니다.
16. 색이 바랜 플리스틱 그릇 (화분이나 창문틀)은 버터로 닦아주면 다시 본래
색으로
됩니다.
17. 잘못 붙인 우표를 잘 떼려면 냉각통에 잠시 넣었다 때면 됩니다.
18. 발 저릴 때는 저린 발을
다른 다리 위에 걸치고나서 두 손으로 저린 발의
다섯 발가락을 30초 동안 뒤로 젖히면 사라집니다.
19.
딸꾹질은 혀를 잡아당겨 신경에 자극을 주면 멈추게 됩니다.
20. 변기의 때를 없앨 때는 먹다 남은 콜라를 사용하면 함유된
시트르산이
깨끗하게 해줍니다.
21. 흰색 면양말이 오래 신어 본래의 색을 찾을 수 없을 때는 레몬 껍질을
두어
조각 넣어주면 새하얗게 됩니다.
22. 검은 옷에 묻은 먼지는 스펀지로 닦으면 깨끗해집니다.
24. 청소기에 스타킹을 감싼 후 청소기를 작동시키면 잃어버린 물건을 찾을 수
있습니다.
25. 끓거나 삶는 요리를 할 때에는 냄비 위에 나무 주걱을 올려놓으면 끓어 넘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26. 먹다 남은 과자에 각설탕을 넣어 보관하면 눅눅해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27. 팔꿈치와 무릎이 검게
변했을 때 레몬조각으로 문지르면 깨끗해집니다.
28. 욕실 거울에 김이 서렸을 때 거울에 비누칠을 한 뒤 마른 수건으로 닦아내면
김이 서리지 않습니다.
29. 기름때 묻은 벽지에 맥주를 묻혀 닦아 내면 말끔히 지워집니다.
30.
냉장고에 소주 뚜껑을 열어 넣어 놓으면 냉장고 냄새가 사라집니다.
31. 쓰레기통의 냄새를 제거하고 싶다면 밑바닥에 신문지를
여러 장 겹쳐 깔아
놓으면 냄새가 사라집니다.
32. 보온병에 잘게 부순 달걀 껍질과 물을 넣어 흔들면
보온병이 깨끗해집니다.
33. 김빠진 콜라를 변기통에 붓고 30분 후 물을 내리면 변기 속이 깨끗해집니다.
34. 스마트폰으로 노래를 들을 때 사기그릇에 넣어두면 소리를 크게 들을 수
있습니다.
35. 쌀 안에 고추나 마늘을 넣어두면 쌀벌레가 생기지 않습니다.
36. 손의 잉크가 묻으면 귤껍질로 닦아내
지울 수 있습니다.
37. 숟가락을 뜨거운 물에 담궜다 뺀 후 꿀을 푸면 깔끔하게 퍼집니다.
38. 건전지
수명이 다 되었을 때 망치나 드라이버로 건전지의 옆면을 4~5번
가량 두드리면 다시 작동합니다.
39. 고기를
먹고 체했을 때 파인애플을 먹으면 내려갑니다.
40. 벽에 못을 박을 때 못에 기름칠을 하면 잘
들어갑니다.
첫 신병 휴가를 막노동으로 보낸
군인!..............................이서영
이런
청년이 군면제 받아야 합니다. 아픈 할머니만 남겨두고 입대했던 이준호 이병이 지난 20일
소속 부대의 배려로 특별외출을 나와 서울 보광동
월셋방에서 할머니를 돌봐드리고 있다.
첫 신병 휴가를 막노동으로 보내고 15만원을 벌어 할머니를 병원에 데려갔다. 영양실조와
감기몸살 진단을 내린 의사는 “어쩌다 이 지경이 되도록 놔뒀냐? ”고 혀를 찼다.
휴가 마지막 날 밀린 가스비를 내고 남은 돈을
할머니 손에 쥐어준 준호씨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준호씨는 고교 때부터 가장역할을 했다.
엄마는 준호씨가 9살
때 이혼한 뒤 소식이 끊겼고,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는 3년 전쯤 집을 나갔다.
그래서 학교가 끝나면 패스트 푸드점에서 밤 12시까지
청소를 한 뒤 다음날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신문을 돌렸다. 고등학교를 마치고는 일식집에서 하루 12시간씩 음식을 날랐다.
2년 전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준호씨는 119의 도움을 받아 인근 병원에서 혼자 상을 치렀다.
그는 “할아버지께
밥 한번 사드리지 못한 게 가슴 아파 그때 많이 울었다”고 했다.
그로부터 얼마 안돼 군에 입대하게 된 준호씨는 홀로 남을
할머니를 위해 몇 달간 한푼도 안 쓰고
모은 300만원을 입대하는 날 건넸다. 그 돈을 소식도 없던 아버지가 찾아와 가져가 버리는 바람에
할머니가 난방이 끊긴 방에서 자다 앓아 누운 것이었다.
훈련소에서 훈련 받는 동안에도 그는 할머니 걱정으로 몰래 울다
동기들에게 들켜 놀림을 받기도 했다.
백일휴가를 마친 뒤 ‘나 없는 새 돌아가시면 어쩌나’하는 걱정이 더 심해진 준호씨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신이 소속된 1포병여단 예하 쌍호부대(경기도 파주) 생활관 분대장을 찾아가 사정을 털어놨다.
본부 행정보급관
박종건 상사는 “궂은 일 도맡아 하고 예의바른 준호에게 그런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에
모두들 놀랐다”고 말했다. 상황이 알려지자 부대
전체가 준호씨를 돕는 데 적극 나섰다. 대대장의 지시로
박 상사와 무선반장은 준호씨 집을 찾아가 할머니를 방문하고, 아버지 주민등록을
지워버리고 할머니에게
매달 15만원의 정부보조금이 지급되도록 했다. 동사무소 사회복지사를 만나 할머니를 잘 돌봐달라는
부탁
도 했다. 지난 20일에는 부대의 배려로 준호씨가 특별외출을 나와 할머니를 몇 시간이나마 함께 지낼 수
있었다.
같은 부대 350명의 장병들이 월급을 쪼개 150만원을 모금해 줬지만, 준호씨가 제대할 때까지 할머니의
월세와
생활비로는 부족했다. 그러다 박 상사가 조선일보·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벌이는 ‘우리이웃―62일
간의 행복나눔’ 기사를 보고 사연을 적어
보냈다. 이에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담당 사회복지사와 연계해
20개월간 월세·생활비 등 모두 840여만원을 할머니에게 지원하기로 했다.
준호씨는 예전에는 남의 도움 받는 것이 싫어 학교 선생님이 용돈을 챙겨줘도 받지 않았지만, 이젠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다.
“제가 어려울 때 받은 사랑을 나중에 더 어려운 이들에게 보답하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
어요." 현재 부대에서는 집안일로 제대(依家事除隊)
등 준호씨를 위한 조처를 찾고 있지만, 준호씨는 되도록
만기로 제대할 생각이다.
"병역의무는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언제 제대를 하든 남보다 몇 배 더
열심히 군생활을 할 거예요.” 준호씨는 일식요리를 밑바닥부터 착실히 배워
요리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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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武亭) 장군 - 조선의용군 총사령관..........................
백발백중 조선의용군 총사령
무정..........................................- 김 성동
조선의용군 8만명
종로행진 계획
“동무들! 오늘 아침에 말씀드릴 것은 금년에 있어서 우리가 응당 하여야 할
생산공장을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문제다.
작년에 생산공장에 참가하여 본
여러 동무들은 다 아시는 바이지만, 우리는 재작년 봄에 이 태항산 청천(淸泉)
저 비탈에 화전을 이루고
600묘나 되는 땅에 붉은 무와 감자 호박을 심고
가을에 도라지를 캐고 도토리를 주었던 탓으로 우리는 양식과 채소 등 곤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많은 도움을 얻게 되었다.
(…)
좋은 양복에 훌륭한 구두를 받쳐 신고 맛나는 음식에 호화한 생활을
지내던
동무들은 이제 와서는 이와 같이 몸에 이가 꾀고 헌옷을 입고 버선 없는 맨발
짚신에 춥고 발시리며 배가 고픈 이 생활로 적을
대항하면서 화전농사까지
하느라고 손바닥이 부르트고, 허리가 아프게 되니 한숨이 저절로 나오면서
마치 그 고생을 이기지 못하는 것같이
보였고, 그 생활을 자각적으로 자연스
럽게하지 못하나, 겉으로 되는 동무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미군과 소련군이
완강하게 막아
중국 산서성 진성현 남쪽에 솟은 태항산(太行山) 중턱에 있는 조선의용군
총사령부 앞 연병장이었다.
1945년 봄 어느 날. 해방 돐 기념으로 펴낸 <애국
투사 연설집>에 나오는 무정 장군의
목소리다.
<1945년 봄 태항산에서 호소함>
“이 태항산 바윗돌 벼랑가에 덤불 속으로
슬렁슬렁 그냥 다니면서 도라지를 캐는
때에, 저기서는 도라지 도라지 태항산 비탈에 옥도라지 한두 뿌리만 캐어도
의용군 식량이
되누나-
여기서는 ‘도라지 도라지 강원도 금강산에 백도라지!’ 이와 같이 산허리와 산등
에서 울려나오는 도라지 타령으로 우리는 저
산의 도라지를 다 캐내고 저 산에
도토리를 몇 알 남지 못하고 다 주워 메었으며 그야말로 가죽나무 밑에서 기다
리는 도토리 한 알 밤
나는 것이 우리 고국에서 기다리는 그 누구를 만나는 것
보다 기쁨이 못하지 않았고, 보기만 하면 얼른 손을 뻗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도토리 한 알을 우리 주머니에 집어넣는 것이, 즉 우리의 적을 무찌르는
힘이 한 알 분량이
늘어남으로 알았고, 도라지 한 뿌리를 캐서 바구니에 넣으면
일본제국주의자를 반항할 힘이 한 뿌리 분량이 늘어난 줄, 알게 되는고로
작년
봄에 양식 곤란이 우리를 포위하고 산면(山面)에서 쳐들어온 왜적이 우리를 토벌
하는 환경에 우리는 이 도라지와 도토리의 덕을
보았다. (…)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입는 문제와 먹는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게 됨으로
작년보다 고생이 좀 덜하게
되었으니 (…) 우리는 언제든지 어느 모퉁이에서
든지 적에게 총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얼어죽을 각오를 하며 굶어죽을 각오
를
하여야 우리에게는 적을 무찌를 용기가 생길 것이고 방법이 생길 것이며
마침내 적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
혁명자의 최고의 도덕으로 되는 혁명적 우애성을 발휘하여 서로 붙들어 주고
서로 돕는 정신으로 몸이 약한 동무를
많이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맡은 사업을 더 빨리 원만히 힘있게 완성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일본제국주의자를 두드려 부수기 위하여 !
모든 것을 일본제국주의자를 반대하는 데 복종시키자 !
모든 것을 우리 손으로 꾸려나가자
!
무정(武亭, 1904~1951)은 이름부터가 우선 무인 냄새를 짙게 풍긴다. 조국광복을
위한 무장투쟁에 온몸을
바치기로 맹세하고 스스로 지은 이름으로 보이는데,그의
본 이름은 알 길이 없다. 성이 김씨라니 김무정이다.
해방을 맞아 국내로 들어온
날짜도 9월 20일 쯤, 11월 27일쯤, 12월 3일쯤, 12월
말부터 46년 1월쯤까지 여러 가지다.
홍군, 곧
모택동이 거느리는 중국공산당 본부가 있던 연안(延安)을 중심으로 항일
투쟁을 하였으므로, 무정을 비롯하여 김두봉(金枓奉,
1889~1961), 최창익(崔昌益,
1896~1957), 허정숙(許貞淑, 1902~1991), 박일우(朴一禹, 1904~?),
이유민(李維民,
1914~?), 박효삼(朴孝三, 1903~?), 김창만(金昌滿, 1913~?) 들을
‘연안파’라고
부른다.
무정은 해방이 되자 자신이 거느리던 조선의용군 8만 명을 데리고 서울로 들어와
시가행진을
벌일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무장부대를 데리고 들어오는 것을
완강하게 막은 것은 미군이나 소련군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조선이라는
나라를
일본제국주의와 맞서 싸운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개별적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빨치산 출신인
노스님이 말해주던 김명시(金命時) 장군과 함께 한 무정 장군의
종로거리 행진은 조선의용군의 당당한 위용을 인민에게 보여주지 못한 데서
온
울분의 발로로 보인다. 무정이 거느리던 조선의용군이든 김구(金九)가 거느리던
대한광복군이든, 모두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점령군으로 왔음을 밝힌 미군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해방군으로 왔다는 붉은
군대 또한 마찬가지였으니, 조선독립군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국방군이든 인민군이든 다 같은 한민족 군대니 서로 합쳐 인민의 행복을 위한
군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무정의 생각이었다. 무엇보다도 순정(純正)한 군인
으로 이른바 정치감각이 무디었던 무정의 좌절은 필연적인 운명이었을 지도
모른다.
압록강 포사격 시범서 백발백중
“만약 스탈린그라드 작전에서 무정 같은 장군이 있었다면 세계
2차대전이
조금은 빨리 끝났을 것이다.” 무정이 압록강 밑 용암포 앞바다에서 포격 시범을
보였을 때 쏘는대로 백발백중하는 포사격
솜씨를 보고, 소련 군사고문관이 한
말이다.
포병이 알아야 할 복잡한 고등수학은 몰랐지만 오로지 실전에 의한
경험만
으로, 그런 신기에 가까운 솜씨를 보였다는 장군이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930년대 좌익운동의 신화였던
이재유(李載裕, 1905~1944), 보천보대첩의
김일성(金日成, 1912~1994) 장군과 함께 온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혁명전사
가운데 하나로 꼽힌 장군이다.
.......................함북 경성(鏡城)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중앙고등보통학교에 다니다가 그만두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보정군관학교
포병과를 나왔다. 1934년부터 비롯된 368일에 이르는 2만5000리 9654킬로
홍군 대장정에 함께 하였는데, 산맥
18개를 넘고 24개 강을 건너는 죽음의
행군이었다. 거기다가 국민당 장개석군의 악랄하고 끈질긴 추격과 굶주림과
추위, 그리고 온몸을
빨아들이는 늪지와 독충과도 싸워야 하는 고난의 행군
이었다.
팔로군 작전과장을 거쳐 팔로군에서 맨처음 창건된 포병연대
연대장이 되었다.
1942년 11월 태항산 근거지에서 문을 연 화북조선청년학교 교장을 맡았고,해방
당시에는 조선의용군 총사령 겸
독립동맹 집행위원이 되었다.
“호랑이 같았지요?”
“뭐가?”
“무정이 장군 말씀예요.
그렇게
유명한 백발백중 장군이라면 장대한 체수에 인상도 험악했겠지요.”
이 중생이 말하였을 때 빨치산 출신 그 늙은 스님은 머리를 저었다.
“천만에.
그렇지 않아. 훌쩍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하고 엄장 큰 체수가 장수감인 것은
맞지만, 상호는 그렇지 않아. 멋지게 기른
콧수염에 위엄 있는 얼굴이었지만
뭐랄까, 사천왕이 아니라 그저 마음씨 좋은 삼촌 같은 인상이야.” 무정과 만난
적이 있던
최태환(崔泰煥, 1929~ )도 비슷한 증언을 하였다.
박혜강이 간추린 <젊은 혁명가의 초상>에
나온다.
“나는 무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가 호랑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
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막상
그를 대하고 보니 마음씨 좋은 시골 아저씨를
만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인상인 무정이 정말로 팔로군이었을까?
어떻게 수많은
전투를 치루어왔을까 하는 의심이 들게 될 정도였다.”
6·25 때 제2군단장으로 참전
1948년
평양사범대학에 다녔던 이가 한 하숙방에 있던 무정 장군 친조카한테
들었다는 말이다. 1972년 나온 <남북의 대화>에
나온다.
“그는 간혹 ‘삼촌은 원래는 공산주의자가 아닌데 독립운동 하러 중국에 들어갔
다가, 어떻게 연안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저렇게 됐다’고 변명하기도 했습니다.
그 친구 말에 의하면 무정은 김일성의 독재와 횡포를 몹시 미워해 술을 마시면
폭음을
하고, 그렇게 취해서 들어오면 김일성 욕을 마구 퍼붓고 불평을 한다는
거예요. 무정은 그후 6·25동란의 패전 책임을 김일성에게
뒤집어씌우는 바람에
1951년 숙청당합니다만.”
비슷한 이야기는 최태환 수기에도 나온다. “당시 무정은 김일성과
앙숙이라는
소문이 나돌았었다. 그러나 표면화되어 나타난 권력의 갈등은 엿보이지 않았다.
무정은 호탕한 성격과 순수한 군인의 기풍을
보여주고 있어서,초창기의 북한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기도 했다.
‘무정 장군은 만주에서 많은
전투를 치르는 동안 말을 너무 많이 탔기 때문에
머리가 앞뒤로 움직이는 거야’라고 나름대로 추측을 하기도 했다. 그런 이야기
는무정의
과거 행적을 높게 평가하는 것에서 연유된 것이었다.”
6·25 때는 총사령관이 될 것이라는 예상과 다르게 제2군단장으로
참전하였고,
9월 인민군 후퇴 때 수도(평양) 방위사령관이 되었다. 그러다가 12월 압록강변
만포 별오리에서 열린 조선로동당
정기대회에서 불법살인과 명령불복종 들과
같은 혐의로 처형될 지경에 놓인 것을 팔로군 출신 옛 중국 전우들이 구해주어
중국으로 갔다고
한다. 1951년 7월쯤 간 것으로 되어 있지만, 분명한 것은 알 수
없다. 문득 자취가 사라져버린 대부분 남로당 출신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무정
또한 행적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장군과 같은 연안파로 ‘조국해방전쟁’에 나섰던 최태환 말이다.
전북 순창
회문산과 운장산에서 빨치산 투쟁을 한 사람이다.
‘외팔이부대장’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였던 인민군 중좌 출신 증언으로, 무정
말이다.
“나는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싸웠다. 만약 조국의 독립을 침해
하고 간섭하는 자가 있으면, 나는 대포를 쏘아 묵사발을 만들 것이다.
그가
공산주의자일지라도 말이다.”
남로당과 마찬가지로 남에서도 북에서도 무질러 없애버린 연안파이다. 가새표
쳐버린
연안파가 우리 겨레 해방운동사에서 하였던 구실은 무엇이었을까?
박헌영과 마찬가지로 남/북에서 함께 버림받은 무정 장군 생애를
되살려내는데
이 글이 하나의 실마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항일투쟁사 ‘3김 장군’으로
불리다
“대한 사람 대한으로…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나는 이런 "국가"를
들을 때마다 의분을 금치 못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잘 보호해서 우리 삼천만이
40년의 노예생활을 하였더란 말인가?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믿는 것은 오직
나의
팔과 다리 그리고 삼천만의 합심 단결 뿐이다.
독립을 위하여서는 하나밖에 안 남은 한쪽 다리마저 서슴지 않고 바칠
결심이다.
저 압록강 건너 만주 벌판에는 우리 인민의 군대 8만 조선의용군이 한때도 쉬지
않고 총을 닦고 칼을 갈며 3천리 국토를
노리고 있다. 조선의 인민을 또다시 신식
노예의 구렁텅이로 집어 넣으려는 친일파 민족반역자 그리고 그들을 덮고 있는
극악반동분자들의
날개를 쳐부수려고 시기 도래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8만 의용군은 건재, 호가장 전투의 용사 김학철씨 이야기’
<조선인민보> 1946년
3월 19일 치에 실려 있는 김학철 말이다.
말 밑에는 다음과 같은 편집자 감상이 달려 있다.
‘피를 토하는 듯 불타오르는
분노를 억제 못하고 눈물로 부르짖는 사람은 저 호가장 전투에서 세계에 그 용맹
을 떨친 우리 의용군 투사
척각(隻脚, 외다리) 김학철 용사다.’
...................................김원봉 · 김일성과
함께 꼽아...............................
‘호가장 전투’라는 것은, 1941년 12월 12일
조선의용군이 치룬 항일전투 가운데
가장 치열했던 싸움을 말한다. 김세광 대장 이하 29명의 조선의용군 무장선전대
가 화북 석가장에서
가까운 원씨현 호가장(胡家莊) 마을에서 민중대회를 마치고
규율에 따라 즉시 떠나려던 계획을 바꿔 하룻밤 머무를
때였다.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난 안도감과 주민들 열렬한 환영에 들떠 먼거리 보초병을
세우지 않고 잠자리에 들려는데,
왜병이 호가장 마을을 둘러쌌다.마을을 완전히
둘러싸고 쳐들어오는 왜병 숫자는 500명이었다. 29명과 500명. 절망적인
상황이
었다.
그러나 박철동(朴喆東) 대원이 왜병 포위망을 앞장서 뚫어 열고 마을 뒷산 꼭대기
로 올라갔다.
29명 전원이 최후를 결의하고 싸우는데 급보에 접한 팔로군이 달려
왔다.왜병은 물러갔고 싸움은 멈추었다. 이 싸움에서 제2분대장 손일봉,
왕현순
(王賢淳), 한청도(韓淸道), 이만갑(李萬甲), 박철동이 전사하였다.그리고 김학철
(金學鐵) 대원이 왜병에게 붙잡혀 나가사키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8·15와 함께
감옥에서 나왔지만 그때 싸움에서 입은 총상으로 한쪽 다리를 잃게 되었다.
불과
29명으로 500명을 상대하여 영웅적으로 싸워낸 이 전투를 높이 평가한
중국공산당에서는 기관지 <해방일보>에 ‘추도 조선의용군
희생동지 특간’이라는
제목으로 추도특집을 싣고 중국인의 귀감으로 삼고자 소학교 교과서에 올렸다.
<조선인민보> 1946년
7월 10일치에 실린 김학철의 부르짖음을 들어보자.
.......................“조선민족은 양개 진영으로
나뉘었다.
항일진영과 조일(助日)진영, 혁명진영과 반동진영, 구국진영과 매국진영, 이렇게
싸웠다. 독립동맹은 항일진영
주력 가운데의 하나다. 조선의용군은 그의 행동부대다.
동맹은 머리고 군은 손발이다. 조선의용군의 역사는 항일투쟁의 역사다.
피로써
멱감고 포성의 자장가를 들으며 그리고 굳었다.10월 10일 중국 전야(戰野)
에 산재한 해외 조선혁명 세력은 뭉치어 항일투쟁의
정궤(正軌)에 올랐다.
이곳은 화북(華北), 명칭은 독립동맹. 해외 20여 년 결속을 지은 마지막 장면이었다.
학병 ·
지원병 등 동족의 피를 흘리는 것만도 서럽거늘, 하물며 그것을 부추키고 그것을
노래하는 민족의 양심을 잃어버린 도배가 있었음에랴.
매국멸족의 파렴치한이 있었음에랴.”
제국주의에 의한 세계분할 책동에 따라 ‘해방당한’ 조국에 목발 짚고 돌아온 김학철은
미군정을 등에 업고 일제 때와 똑같이 지배세력으로 군림하는 친일민족반역자들에게
분노하지만, 그에게는 힘이 없다. 함께 싸워줄
조선의용군 동지들도 없고 무엇보다도
무정 장군이 없다. 북조선에 개인 자격으로 들어갔다는데, 동만주 항일빨치산 출신들
에게 밀리고
있다는 소문만 들려온다.
1916년 북강원도 원산에서 태어난 김학철은 황포군관학교를 나와 조선의용군에 들어갔다.
그는
태항산에서 중공 팔로군과 함께 항일 무장투쟁을 벌였던 체험을 소설로 쓴 작가였다.
1930년대 북간도를 중심으로 벌어진 항일 무장투쟁을
다룬 장편 3부작 <혜란강아 말하라>
와 태항산 투쟁사를 전기문학 형식으로 그려낸 <항전별곡>을 펴내었던 그는 혼란한
서울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연변으로 건너간다.
그러나 문화혁명이 일어나면서 ‘반동작가’로 몰려 10년간 감옥살이를 하여야만
했고,
4인방이 몰락한 다음에야 다시 붓을 잡아 혁명성장소설인 <격정시대>를 써낸다.
얼마 전에 돌아간 그의 유언은
“화장하여 원산 앞바다에 뿌려달라”는 것이었다.
“1929년경 중공군이 국민군과 싸울 적에 무정 장군이 전사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져서,
당시 상해에 있던 우리 조선 동지들은 그를 추도하며 애도하였다.
그러나 그후 천진에 있을 때, 학병기피로서
그곳(同地)에 들어와 활동하던 젊은 동무의
연락으로 무정 장군 전사의 소식은 낭설임을 알고 연안에 가서 무정 장군을 만나 그후부터
다시 함께 일을 하게 되었다.”
만주벌판에서 말달리던 여장군 김명시(金命時, 1907~?)
말이다.<해방일보> 1945년 12월
28일치에 실려 있다.
‘해방투쟁의 혈투사, 화북서 온 여투사 김명시 회견기’라는
제목인데, 김명시를 가리켜
‘여장군’이라고 하였다.
‘조선의용군 총사령인 무정 장군에 직속한 여장군으로서 손에 총을 들고, 산에서
들에서
전쟁터(戰塵)에 묻혀서 남성 동지와 함께 민족해방의 항일의용군의 전선에 용감히 싸워온
조선의 커다란 자랑인’ 김명시 여장군은
말한다.
“무정 장군은 우리가 소식을 모르고 있는 동안 팔로군에 가담하여, 장태준(張泰俊), 양영(梁榮)
두 동지와
함께 저 유명한 팔로군의 서금(瑞金)에서 연안(延安)까지 2만5000리 행군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세 동무는 모두 사단장이었다. 그러나
도중에 양영 장군은 장강 연안에서,
장태준 장군은 복건성에서 전사하고, 세 장군 중 무정 장군 한 분만 연안에 오게
되었다.
무정 장군은 연안에 와서 중공군의 포병단을 창설하고 그 단장으로서 위대한 중국혁명에
끝까지 참가하여 활약하였는데,
모택동 동무도 중국 군인 몇백 명보다도 무정 장군 같은
군인 한 사람이 귀하다고 말하였다.
무정 장군은 7·7북지사변 직후
반일항전을 목표로 조선의용군 편성에 착수하여 연안에
군정대학을 창설하고 일본군진을 탈주하여 우리 의용군에 들어오기를 희망하는 조선학병,
지원병, 강제응모병, 군속 등을 적구(賊區) 또는 근거지에 있는 우리의 지하조직을 통하여
이 군정학교에 흡수하여 실천적으로
교양하며 군사적으로 훈련하여 의용군에 편입하였는데,
이때 김원봉(金元鳳)씨 부하 20명도 연안으로 들어오니 이 의용군에 들어오게
되었다.
또한 이때 조선여성동맹의 선봉이었던 허정숙(許貞淑) 동무도 연안 군정대학에서 교무를
보고 있었다. 이리하여 8·15
당시까지 우리 조선의용군의 수는 OO여 명에 달하였다.
그리고 금년에 들어와서 나날이 변하는 세계정세에 비추어서, 이 정세에 가장 적절한
전략과 투쟁방침을 결정하며, 일본의 패망이 머지 않다는 판단으로서 의용군을 거느리고
조선에 들어가 일제와 싸워 이들을 모조리
소탕할 계획과 조선독립의 노선과 방침을 결정하기
위하여 국치 기념일인 오는 8월 29일을 기하여, 조선독립동맹 제3차 전체대회를 연안에서
열기로 결정되어 각지의 대표 동지들은 속속 연안으로 모여들게 되었다.”
독립동맹 결정에 따라 그 손발인 조선의용군 선발대가,
걸음걸이도 씩씩한 강철 대오를 짓고
압록강을 건넜을 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환영의 꽃다발이 아니라 무장해제였다.
남쪽에서
미군정사령부가 대한광복군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소련군정사령부
또한 조선의용군을 인정하지 않았다.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성원들이 개인 자격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이른바 연안파에서 세웠던 조선신민당 또한 1946년 8월
북조선로동당과 합당하여 독립동맹
주석 김두봉이 위원장을 맡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연안파가 동만주 항일빨치산을 중심으로
한 갑산파에
흡수통합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갑산파(甲山派) 핵심은 소련 제2
극동전선 소속 88정찰여단 김일성부대
80명이었다.
..................................김학철 투쟁 체험 소설로
담아
항일투쟁사에서 조선인민이 꼽아주었던 ‘장군’ 세 사람이 있으니, 김원봉 장군과 무정 장군과
김일성
장군이다.홍범도 장군과 김좌진 장군이 있지만 그들 투쟁은 봉오동대첩과 청산리대첩
이후 이어지지 않았고, 김원봉, 무정, 김일성 3김
장군만이 조선인민의 희망이었다.그런데 한
김만 살아남았고, 두 김은 역사무대에서 사라져버렸다.
1949년 평양에서 간행된
<조선민족해방투쟁사>와 1953년 발간된 <조선신민주주의혁명사>
에까지 나오던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항일투쟁사는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가열차게 저항하던 독립동맹 부주석 최창익(崔昌益, 1896~1957)이 56년 ‘8월 종파사건’으로
숙청되고, 주석 김두봉(金枓奉, 1889~1962)이 1958년 3월 ‘종파분자’로 지목되어 쫓겨나면서
사라져버린다. 조선의용군
8만 병력이 평양에 들어갈 수 있었다면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8만 명이 과장된 것이라면 8000명이라고 해도 좋다. 남북 조선
정치 지도자 가운데 훈련된
무장병력을 거느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역사에서 가정은 쓸데없는 것이지만 외다리 조선
의용단원 김학철이
안타까워 했던 까닭이 바로 이 대목 아니었을까?
반공이데올로기로 철갑을 두른 남쪽에서도 그들의 빛나는 항일투쟁사는 지워져
버리었으니,
중음신(中陰身)이 되어버린 조선의용군들이다.
김원봉 장군 한테는 ‘소자산계급적 기회주의자이며 개인
영웅주의자’라는 딱지를, 무정 장군
한테는 ‘불법 살인과 명령 불복종’ 분자라는 낙인을 찍었다.
6·25 때 중공군이 썼던
것으로 유명한 것이 ‘인해전술’이었다. 꽹과리를 쳐대며 끊임없이 밀고
들어오는 ‘자살특공대’ 앞에 대책이 없는 미군이었다고 하는데,빨치산
출신 스님한테 들은
이야기는 다른 것이다. 수류탄 한 발씩만 쥐고 사람의 바다를 이루어 밀고 들어왔던 것은,
중공군이 아니라
조선의용군이었다는 것. 수만 명의 조선의용군에 위험을 느꼈던 중국공산당과
조선로동당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는 것.무정 장군이 돌아간
것이 1951년이라고 되어 있는데,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중국공산당 문서보관소에 있을 ‘무정 장군 파일’은
언제 공개될 것인가? <- 2008 11/11, 11/18 위클리경향 799호, 800호>
조선독립동맹 지도부가
1945년 12월 평양에서 찍은 사진.앞줄 오른쪽 두 번째가 무정 장군이며
그 다음이 김두봉 장군이다. <웅진지식하우스
제공>
이을형의 ‘법과 정의’…제국 고조선<14>-서국(徐國)과
불이지국(弗離支國)
BC 1000~400년, 대 고조선 전성기 ‘제후국도 황금기’
서국, 황제국 지위까지 누려…대륙 주역 한민족 동이계(東夷系)가 화하계(華夏系) 지배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 기사입력 2015-08-01 20:3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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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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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며-역사 거짓꾸미기를
막은
고고학(考古學)
필자는 지난 1968년 일본에 유학해 일본이 낳은 세계적 법학자로 일본의 헌법과 노동법을 기초한 마쓰오가
사부로(松岡三郞) 교수의 연구실에서 선생의 지도 밑에 8년간 수학하고 1978년 학위를 취득했다. 그후 너무
건강이 좋지 않아
건강을 조금이나마 회복하고 귀국하려고 1년을 더 머물렀다. 이 기간 중 일본을 더 알려고
그동안 가보지 못한 곳을 찾은 일이 있다.
우선 사는 곳에서 가까운 우에노 공원(上野公園)안에 있는 우에노 박물관(上野博物館)을 보는 기회를 가졌다.
박물관 안에서 필자는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우리나라 고대 유물들을 우연히 볼 수 있었다. 동경에서의 박물관
(上野博物館)은 처음
보는데, 그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그곳에는 발굴지(發掘地)와 연도가 안 쓰인 분명
하지 않은 눈에 익은 우리의 삼국시대 기왓장 따위의
유물들이 많이 있었다. 그 때 느낌은 이 유물들이 일본의
고대유물로 둔갑해서 내놓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필자는 그 이듬해
귀국해서 지금 까지도 그
유물이 언젠가는 일본의 고대 야마토(大和)시대나 그 이전의 것으로 둔갑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일본은 우리 유물을 둔갑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중국과 일본은 고대부터 우리역사를 뒤집고
역사를 구성하고 있기에 그들이
내세우는 역사가 진실과는 다르게 거꾸로 뒤집고 조작하는 일은 쉽게 될 것
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들은 우리역사 뒤집기를 8세기 초부터
해 왔다.
지금 일본은 562년 신라에 망한 가야(伽倻)의 분국(分國)이며 식민지인 일본에 세워진 임나(任那)가 4세기
후반에 야마토(大和)에 복속된 양 되살리고 있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숨길 수 없다. 일본에는 양심적인
학자들도 있기에 이들도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믿는 이가 없어 교과서에서도 다루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아베신죠(安倍晋三)가 다시 일본수상이 되면서
독도영유권을 비롯해서 위안부강제연행 들도
부정하며 침략을 정당화하려고 임나(任那) 역사마저 거짓꾸미고 있다. 미나마 일본부(任那日本府)가
4세기
중엽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역사 거짓꾸미기를 작정하고 팔을 걷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끝이지 않고 경남창녕에서 출토된 금제왕관을 비롯해 용무늬 고리자루칼과 새날개모양의 관꾸미게
등
주로 4세기~6세기에 걸쳐 출토됐던 유물 8개의 출토장소를 창녕이 아닌 임나(任那)로 적고 있다. 그러나
이 유물을 보관하고 있는
동경국립박물관은 출토지역을 한국 창녕이라고 하고 있음에도 삼국시대의 우리
유물까지도 임나(任那)유물이라고 억지 춘향을 만들고 우기며
일본문화청의 누리집에 적는 만행을 다시
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고고학을 좀 더 분명히 정립해야 할 까닭이다. 고고학(考古學)은 문헌이
없는 시대의
역사를 뚜렷하게 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를 분명히 비추는 일은 중국과 일본의 역사 거짓꾸미기를
원천 봉쇄할
수 있는 일이다. 이에 이번 글도 계속해서 고조선 후국(侯國)에 대한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살펴
보고자 한다.
1천년 지속 우리민족 서국(徐國), 중국 36~50여국 조공 받으며 ‘황제국 지위’
누려
사학자들의 대다수 통설에 의하면 우리 조상의 주류는 북 몽골족에 속하는 종족으로 알타이어족의 말을 쓰는
사람들이다. 신채호 선생은 “조선이나 만주, 몽골, 터키 등은 수천 년 전에는 같은 혈족이었다”며 “중국의 한족
(漢族)을 조선족과
동족으로 볼 수 없다”고 했다. 또 몽골족은 오랜 옛날 우리와 같은 조상의 후손일수는 있지만
연대의 선후로 보아 조선족이 몽골족에 속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이런 우리 조상들을 중국인은 인방(人方),
동인(東人), 혹은 동이(東夷)에 속하는 종족이라 하고 숙신국(肅愼國)
또는 예맥족(濊貊族)이라고 일컬었다.
그런데 어떤 종족이 언제 어디서 왔는지 지금 와서 뚜렷히 알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 조상들이
치수법
(治水法), 맥궁(貊弓), 단궁(檀弓)이라는 기록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활 같은 앞선(先行)문화를 지니고 중국
한족에 앞서
우리 한민족이 먼저 중국에 살면서(先住) 대륙을 지배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중국의 한족과는 말(語系)이나 먹는 음식이 다룰 뿐 아니라 다른 문화전통을 가진 선진민족이다.
고조선 지역의 청동기문화 시작이 중국 황하유역보다 수백 년 앞선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동양미술 학자 죤
코벨(Jon Carter Covell(1910~1996) 또한 “조선 한족(韓族)이 동아시아에 정착한 연대는
현재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앞섰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 문화가 일찍부터 중국과 다르다는
것을 바라보고 일제가 단군을 전설화한 것과는 정반대로 단군의
존재를 인정했다. “한민족 그 문화가 중국
것이 아니고 독특하다. 단군은 단군이다”고 코벨은 지적했다. 그 지적은 우리 고대사를 오랫동안
연구한
결과에서 나온 것으로 그의 주장이 옳다.
단군조선은 서기전 2333년쯤부터 2천년 넘게 존속하는 동안 추, 맥, 예, 진번, 임둔, 발, 직신(또는
숙신)양이,
양주, 유, 청구, 고구려, 고죽, 옥저, 시라(尸羅), 진(辰) 등 부족연맹체적 성격으로 형성돼 있었다.
고대
양자강 회하지역에 조선인이 많은 제후국(諸侯國)을 건설했다. 그 중에 산동, 산서, 하북 발해안,
하남성 동부, 강소성 북부, 안휘성
동북 각 지방의 고조선계열 소국들은 크게 융성했다. 중국의 문헌인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을 보면 서기전 1000년경
산동, 회(淮), 대(岱)지방의 서언(徐偃)이
세운 서국(徐國)은 매우 강성하여 1천년을 누리면서 중국의 36~50여국의 조공을 받았으며
마치 황제를
자칭하면서 주(周)의 수도를 치려고 황하상류까지 올라갔다. 이에 주(周)의 목왕(穆)王)이 그 세력의
치성을
두려워하여 동방제후를 나누어주고 서언왕(徐偃王)이라고 했다.(後漢書, 卷東85)외
또한 불이지국 같은 정복국가들 뿐만 아니라 예맥 같은 강성한 나라는 한나라도 그 위력에 굴복했다.
이처럼
우리 한민족이 강한 제후국들의 위상으로 중국 대륙을 지배했음을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이 때의
동이족이 조선족임을 신채호 선생도 지적하며
이 지역에서 매우 강성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고조선 제후국
불이지(弗離支)…직예(直隸), 산동(山東), 산서(山西) 지역 정복·지배
고조선시대는 중국이 거짓꾸민 역사기술이 너무 차이가 난다. 예컨대 예맥은 후(候), 읍(邑), 군(君)이라는
3부족이 연합해 통치했는데 한무제(漢武帝)가 예맥의 강성함을 약화시키려고 많은 재물로 군(君)이라는
부족 남려(南閭)를 매수한 후
창해군(倉海郡)을 설치했다가 1년 반 만에 철수했다. 이는 한족(漢族)이
무력으로 우리 민족인 예맥에 맞서지 못한 것을 가리킨다. 또한
한(漢)나라가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으나
26년만에 진번·임둔 2군을 빼앗고 현토군도 대부분 빼앗았다. 이는 고조선 후국(侯國)도 중국
한족을 지배한
것을 고증한다고 하겠다. 그리고 중국고사(中國古史)는 읍루(挹婁), 물길(勿吉), 말갈(靺鞨), 여진(女眞),
실위(室韋)도 동이족(東夷族)이라 적고 동이(東夷)가 100여 나라로 분립했다고 적었다.(晉書斠注 卷三, 帝紀, 第三)
신채호 선생은 고조선 연구에서 서기전 10세기경부터 그 후 대략 5~600년 동안은 단군조선(大 檀君朝鮮)의
전성시대로 보았다. 수문비고(修文備考)에 고죽국(孤竹國-지금의 영평부·永平府)은 조선종(朝鮮種)이라
한 바 백이(伯夷)
숙제(叔齊)형제는 고죽국의 왕자로서 왕위를 헌신짝 같이 버리고 지나(支那)의 주(周-
지금의 협서성·陜西省)에 떠돌아다니(遊歷)다가
주무왕(周武王)에 대해 격렬히 평화론(非戰論)을 주장했다.
그 때 양자강 회하(淮河) 유역에 조선인이 많이 이주(移植)하여 다수 작은
왕국을 건설하더니 서언왕(徐偃王)
이 그 중에 빼어나서(崛起) 인의(仁義)를 행하니 지나(支那) 36나라가 조공했다고 신채호 선생은
고증했다.
이는 조선의 본국과 정치적 관계가 없는 식민 중 호걸들의 기록이다.
서기전 5~6세기경에 불이지(弗離支)란 자가 조선의 병(兵)을 거느리고(率) 지금의 직예(直隸), 산서(山西),
산동(山東) 들의 성(省)을 정복하고 대현(代縣)부근에 나라(國)를 세워(建)자기 이름(名)으로 나라이름(國名)을
삼아
불이지(弗離支)라고 했다. 주서(周書)에 ‘불이지(弗離支)’와 사기(史記)에 ‘이지(離支)’가 모두 ‘불이지국
(弗離支國)’을 가리킨
것이다. 불이지(弗離支)가 그 정복하는 지방을 그 성 곧 불(弗)의 소리로 땅이름을 지었다.
요서의 ‘비여(肥如)’, 산동의
‘부역(鳧繹)’, 산서의 ‘비이(卑耳)’(관자·管子에 보임)가 다 ‘불’을 옮긴(譯) 것이다.
상고에 요동반도와 산동반도가 맛닿아(聯陸) 1개의 큰 호수(大湖)가 있었는데, ‘발해(渤海)’의 ‘발(渤)’도
소리가 ‘불’이요 또한 불이지(弗離支)가 준 이름이다. 불이지(弗離支)가 산동을 정복한 뒤에 조선의 유(狖),
초(貂),
고(孤), 리(狸) 등 털(毛裘)과 베를 수출하여 발해를 중심으로 한 산업이 진흥했다는 기록이 있다.
(申采浩, 朝鮮上古史, 改訂版 丹齋
申采浩全集 상권, P87~88) 이것은 고조선과 정치적 관계를 갖고 있던
불이지(弗離支)가 직예(直隸), 산동(山東), 산서(山西)
지방을 정복해 ‘불이지(弗離支)’ 또는 ‘불령지(弗令支)’
라고 부르던 나라를 세우고 이 지방을 다스렸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이번 글은 최태영 ‘한국고대사’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신채호 짓고
·박기봉 옮긴 ‘조선상고사’, 신용하 ‘고조선의 통치체제’, 고조선학회 ‘고조선 연구 제1호’, 윤내현
‘한국열국사
연구’, 윤내현·박선희·하문식이 함께지은 ‘고조선의 강역을 말한다’,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송부웅 ‘한민족의 대륙역사’, 김부식 ‘삼국사기’,
임승국 옮기고 설명한
‘환단고기’, 김세환 ‘고조선역사답사기’ ‘동남아유적지를 찾아서’ ‘노을속의 메아리’,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南帝 ‘命理속의
哲學’, 日本 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張曉 ‘韓國の民族とその步み’, Joseph
Eidelberg 著·中川一夫 譯 ‘大和民族はユダヤ
人だった’,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洪以燮
‘朝鮮民族史觀と日本帝國主義の植民政策’,
高橋 徹 ‘古代への遠近法’ 외 다수서책을 참조·인용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