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는 묻지 않기로 했다 - 손숙영 시집
(상상인 시인선 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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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손숙영 시인은 가만히 정지해 있는 듯이 보이는 세계의 사물들은 기실 어떤 움직임을 묵시적으로 드러내고 있음에 시적 사유를 펼친다. 움직임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이루어진다. 그래서 움직임에 대한 사유는 시간에 대한 사유를 부른다. 시인은 일곱 편으로 이루어진 「함묵含默」 연작에서, ‘함묵’하는 세계의 사물들 안으로부터 시간의 흐름을 읽어낸다. 이 연작시 모두에는 ‘고네이베루’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시인이 밝혀놓은 주에 따르면, 고네이베루는 지금은 사라진 횡성의 섬강 길 잠수교라고 한다. 즉 사라진 다리를 시인은 부제로 단 것이다. 시를 통해 그 다리를 부활시키려는 시인의 의도는 무엇일까.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라진 무엇과 현재를 잇고자 하려는 의도 아니겠는가.
「그 여름 삽화」에서 손숙영 시인의 서정을 형성하는 근저를 보여주는 시로 보인다. 그의 서정을 이루는 것은 무엇인가. 많은 서정 시인들처럼 삶의 언저리와 사랑에 관련된 아픔이다. 하지만 같은 아픔이라고 하더라도, 그 아픔의 특질은 사람마다 다르며 그 절절한 정도도 차이가 있다. 시의 경우, 사랑의 아픔이 어떻게 독특하게 이미지화되고 있는지, 그 이미지가 어떤 강렬함으로 독자에게 시적 감동을 주는지가 문제가 된다. 위의 시 역시 손숙영 시인의 삶과 사랑은 어떤 이미지로 제시되고 있는지, 그 이미지가 함축하여 담고 있는 시인의 마음이 주목된다.
여전히 삶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바람은 시인에게 휘몰아쳐 불어온다. 바람이 불어오는 ‘사유事由’는 여전히 해독하기 어렵다. 하지만 시인은, 그 바람 역시 “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에 “상처를 살아내”야 한다고 마음먹는다. 그러면 “성근 바람 부여잡은 나목의 가지 끝”에 햇살이 고일 수 있을 것이라며 말이다. 저 나목은 시인 자신의 객관적 상관물일 터, 이 고이는 햇살에 자신을 ‘조곤히’ 내어주면서 “이유는 묻지 않”고 “언 발목 묻힌 이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겠다고 시인은 결심하고 있다. 이 행로를 따라 손숙영의 시가 앞으로 어떠한 이미지를 형성시켜 우리 앞에 제시할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이성혁(문학평론가) 해설 중에서
시인의 말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오랜 시간 詩 밖을 배회했습니다
시는 나에게 떨치지 못하는 덫이기에 안으로 쌓아둔 시름들을 묶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데 징검돌이 되어 내게로 와 준 시편들,
이제 세상 밖으로 보냅니다
2024년 가을
손숙영
시집 속의 시 두 편
그 여름 삽화
꼬박 한 해를 살던 그때 말입니다
사계절 내내 한자리 지켜준 소나무 세 그루가 반듯하게 섰지요
밭고랑 사이사이 묻어 둔 검정비닐 위로 후드득
장단 맞추던 소낙비,
촉촉한 대지에 스민 보드라운 촉감을 기억합니다
풀잎 사이, 스치는 바람에 잎사귀 뒤집어 팔락이던 평온
빗방울들이 삼경의 종소리에 굴러떨어집니다
새벽을 고르면서
내게 허락된 사랑이란 자주 비틀거리며
형질도 없이 사라지는 기억이거나 구름 같은 거
근압으로 수공에서 밀려나는 것
돌아본 그해 여름,
통점이 가슴을 지그시 누릅니다
시간의 지층이 삐끗했거나 기억의 오류이거나
잘못 연결된 코드처럼
그해 여름은 젖어 있습니다
불완전한 문장들이 고개 숙인 잎새처럼
닫히지 않는 입술처럼
내지리*의 저녁은 읍내행 막차가 떠나며 온다
서산머리에 걸쳐진 노을이
뚝!
넘어가기도 전
내가 먼저 어두워진다
낮 동안 오가던 길손 하나 없는 그 길 위로
어둠이 내린다
산 그림자 덮인 숲은 검고
내지리 골목골목을 어둠은 점령군처럼 장악한다
산보다도 숲보다도
사람들 마음이 먼저 어두워지는 이곳
온종일 뜨락을 오가던 냥냥이도
박스 안에 몸을 동그랗게 말고,
몇 되지 않는 집들의 창에 불빛이 하나둘 켜진다
읍내 번쩍이는 불빛들은 아득히 멀고
내지리 어둠은
숨소리조차 안으로 말려든다
낮 동안 소국은 홀로 벙글고
말 건넬 사람을 찾아 떠나지만
빈 버스 안
떠나는 이도 남겨진 이도 없이
붉게 익은 노을만 재를 넘으며 막 버스는 떠났다
산그늘이 깔리고
추적추적 비가 내리면
나도 같이 저물고
나도 같이 떠나고 싶어진다.
*내지리 : 횡성읍 내지리.
차례
1부 얼마간의 여백
그 여름 삽화 _19
내지리의 저녁은 읍내행 막차가 떠나며 온다 _20
나는 자주 어둠과 동조했다 _22
구상 _24
잃어버린 존재론 _25
붉은 하강 _26
청잣빛 여음 _28
저녁 강가에서 _30
퇴색 _31
난분분 흩날리는 그림 안에서 _32
채색되지 못한 캔버스의 유폐 _34
마른 담쟁이의 초상 _38
유월 숲에 든 소고 1 _39
유월 숲에 든 소고 2 _40
젖은 맨발의 밤 _41
2부 녹아내리다 보면 끝 간 곳 어디쯤 닿겠지
붉은 투영 _47
내안內案 그림자 _48
접힌 날개 _50
봉인된 파열음 _51
비행 소묘 _54
가난한 영혼에게 고함 2 _56
모딜리아니 초상 _58
어설픈 정착 _60
홀로 가는 길 3 _61
불이 되어 버린 별 4 _62
면벽 6 _64
자작나무 다섯 그루 3 _66
자발적 회유 _67
아폴로의 사각지대 _68
그리운 그곳 _69
3부 겨우내 숨죽여 눕는 법을 익혔습니다
숲에 들어 _73
빙주 _74
저녁 강 _76
봄, 숲 _78
유리로 된 방 1 _79
먼바다 _80
석등 _81
서러운 예약 _82
휴 _84일각 _86겨울 강 1 _87
겨울 강 2 _88
강둑 검은 돌 _89
가담 노을길 1 _90
가담 노을 길 2 _91
4부 다시 안개에 가려도
길을 걷다가 5 _95
길을 걷다가 6 _96
다시 안개에 가려도 _97
방백 3 _98
섬 _100
오월, 작약 _101
숲, 자작 _102
함묵 1 _103
함묵 2 _104
함묵 3 _105
함묵 4 _106
함묵 5 _107
함묵 6 _108
함묵 7 _109
버덩 길 휘도는 바람의 사유 _110
해설 _ 사라진 것들을 재생하는 시의 풍경 _113
이성혁(문학평론가)
저자 약력
2016년 『출판과 문학』 모딜리아니 초상 외 4편, 시부문 등단
2018년 순암 안정복문학상 수상
시집 『이유는 묻지 않기로 했다』
현재 한국문인협회 횡성지부 사무국장 및 『횡성문단』 편집주간
환경교육 전문 강사
olivesys419@naver.com
이유는 묻지 않기로 했다
손숙영 시집
상상인 시인선 063 | 2024년 10월 30일 발간 | 정가 12,000원 | 128 *205 | 136쪽
ISBN 979-11-93093-71-9(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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