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한혜영의 시집 『맨드라미 붉은 마당을 맨발로』는 뛰어난 관찰력, 유창한 은유와 비유의 구사, 낯설고 신선한 상상력, 정확한 언어 사용 등은 그녀의 시 세계를 높은 수준으로 이끌어주는 원동력이었다.
시인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면서, 이를 ‘환상’이라 부를 수 있는 특별한 방식으로 구조화한다.
한혜영이 조성하는 시 세계는 일상의 범위를 훌쩍 뛰어넘기도 한다.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걸어 다니는 금강송”이라는 시의 서두는 일반적인 인식의 한계를 파괴한다. ‘식물’로서의 ‘금강송’이 탁 트인 초원에서 스스로 움직인다는 설정은 매우 낯선 것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이어지는 “기하학적 무늬를 가진, 긴 목을 꼿꼿하게 세우고 초원을 떠도는,/나무”라는 어구를 포함한 이 대목을 어떻게 이해하는 게 좋을까? ‘사바나’는 ‘초원’에 대응되고, ‘걸어 다니는’은 ‘긴 목을 세우고 떠도는’으로 치환되며, ‘금강송’은 ‘나무’에 해당한다. 시인은 ‘식물’을 특정한 모양의 ‘동물’로 간주하면서 거침없이 시화詩化하는 셈이다.
현대 사회에는 또 그 이전에도 수많은 전쟁과 죽음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거나 적어도 그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 한혜영은 이를 “무한 반복되는 역사”로서 이해한다. “나는 번번이 파괴에 동참했던 폐허의 전문가였다는 것”이라는 그녀의 진단은 외면하고 싶었던 현실을 날카롭게 가리킨다. 독자들로서는 전쟁의 참상을 확인하면서 “나를 죽인 것은 매번 나였다는 것”이라는 시인의 언급에 공감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지점에서 조금 더 나아가서, 어쩌면 나를 살리는 것도 매번 나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꿈꾸게 된다. _해설(권 온 문학평론가) 중에서
시인의 말
가시덤불 숲에는
해독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늙은 사슴은
길을 잃고 또 잃어버릴 뿐이었다
2024년 겨울
한혜영
시집 속의 시 두 편
부탁
나는 어디에서 온 빗방울입니까
나뭇잎 발코니
허공이 조금은 막막하여
주저앉아
울었던 기억이 나는 듯도 합니다만,
어쩌자고 아직도
마르지 않고 태양을 견딘답니까
스스로를 깨뜨릴 수 없는
물방울을 위해
당신께서는 손가락을 빌려주십시오
닿는 순간 한 채의
눈물 누옥에 갇혀 있던 날개가
폐허를 털고
날아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기린이란 이름으로
아주 오래전,
나는 동물원에 놀러 온 당신의 머리칼을 뜯은 적이 있습니다
심심하기도 했지만
펜스에 기대 사진을 찍고 있는 당신에게서 풍기던
알 수 없는 풀냄새에 끌린 것입니다
낮은 울타리 따위로
당신과 나의 경계를 짓고 싶어 했던
유난히 긴 목을 가진
나를 헤아리지 못한 동물원 측의 불찰도 있었지만요
아무도 몰랐어요 그들은 내가
사육사가 주는 사료 대신에 구름을 먹고 산다는 거
아카시아 숲은 까마득하게 멀었으니까요
나는 밤마다 아카시아나무를 우물거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꽃과 이파리 속에 교묘하게 감추어 둔
가시를 먹는 일이란 묘한 통증과 함께 즐거움이 있었지요
아카시아 숲은 언제나 멀고
혀가 닿을 수 있는 것은 구름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내 목뼈를
끄덕끄덕 밟아가며 천국까지 오를 작정을 했지요
포유류의 일곱 계단으로는
어림없다는 편견을 깨고 싶었습니다
때때로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
슬픔을 배출할 수 있는 긴 통로도 가지고 있었고요
이제야 희미하던 기억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당신에게서 맡은 것이 아카시아 향기였다는 거
당신의 머리칼에 찔린 입술도 한꺼번에 이해가 되는군요
키를 낮춘다고 낮췄으면서
아직도 가시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당신
다시 만난다면 영혼까지 깨끗하게 먹어드릴게요
기린이란 이름으로
차례
1부
나는 흰옷을 걸쳐본 지가 오래된 종려나무
부탁 19
나는 코끼리입니다 20
기린이란 이름으로 22
안개, 그 혼령 24
사바나 금강송 26
겨울을 잃고 나는 28
한 묶음의 연애 30
계단 세 개 32
반추 34
껍질 35
우엉 36
눈사람을 읽었다 38
비밀의 속성 40
불편한 진실 41
봄, 그 짧은 축제 42
2부
비가 상처를 세우면 내 마음에는
손톱자국이 깊어집니다
외줄 전선의 음표들 47
철사는 철사 48
죽음의 노하우 50
구름테일러 51
바다와 주름치마 52
짐승들 54
격랑 56
모래인간들 58
큐브게임 60
문득, 바람 62
비를 헤아리다 64
커서를 믿기로 합니다 66
우리교도들 67
부재중 68
필경사들 70
3부
휘어진 발톱과 달빛에 그을린 어린 늑대의 하울링
압화 75
나비가면 76
푸른 세력들 78
시간이라는 새 80
가족과 가축 82
문득, 불러보는 혁명가 84
팝콘은 튄다 86
배려 88
자가 발효 90
선거는 끝나고 91
단정을 거부하다 92
마지막 패션 94
서쪽이라는 종교 95
집중과 선택 96
문 98
4부
떠돌이는 데려오지도 못하고 얼룩무늬만 입양했으면서
그림자 수행원 103
시니컬한 색깔론 104
굴절의 기록 106
난감해서 쓰는 편지 107
What can I do? 108
검은 잠 110
위험한 습관 112
창문과 풍경들 114
화자 언니 116
때 117
거미의 천년야화 118
비행기들 120
길고도 짧은 눈싸움 122
사슴을 보다 124
폐허 전문가 126
해설 _ 환상과 현실의 조화 또는 균형 129
권 온(문학평론가)
저자 약력
한혜영
1994년 『현대시학』 시 추천. 199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태평양을 다리는 세탁소』 『뱀 잡는 여자』 『올랜도 간다』 『검정사과농장』 『맨드라미 붉은 마당을 맨발로』. 시조집 『뒷모습에 잠깐 빠졌을 뿐입니다』. 동시집 『치과로 간 빨래집게』 등. 미주문학상, 동주해외작가상, 해외풀꽃시인상, 제2회 선경작가상 수상.
ashleyh@hanmail.net
맨드라미 붉은 마당을 맨발로
한혜영 시집
상상인 기획시선 7 | 2024년 11월 30일 발간 | 정가 12,000원 | 128*205 | 152쪽
ISBN 979-11-93093-78-8(03810)
도서출판 상상인 | 등록번호 572-96-00959 | 등록일자 2019년 6월 25일
(06621) 서울시 서초구 서초대로 74길 29, 904호
Tel. 02 747 1367, 010 7371 1871 |Fax. 02 747 1877 | E-mail. ssaangin@hanmail.net
[ⓒ 뉴욕코리아(www.newyorkkorea.net ),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This content has copyright permission from the content owner's book publishing compa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