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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시인은 “마음”을 “흙으로 빚어”진 것으로 본다. 이것은 시인에게 새로운 발견이다. 이 발견은 시인으로 하여금 “뭐든 말할 수 있고” 또 뭐든 “쓸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마음이 불러일으키는 이러한 말과 글의 가능성은 그것이 “흙으로 빚어졌다는” 데서 기인한다. “흙”이란 자연스럽게 그 속으로 무엇이든지 스며들기도 하고 또 나가기도 하는 그런 존재이다. 이것은 “흙”이 막혀 있거나 닫힌 존재가 아니라 열려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시인은 ‘외로움’을 “마음이 식물처럼 걷는다는 말”로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초점은 “식물처럼”에 있다. 시인이 강조하려 한 것은 ‘외로움’이 은폐하고 있는 식물성이다. 식물성의 강조는 ‘외로움’이라는 현상에 대한 자연스러운 들추어냄을 의미한다. 꾸밈이나 거짓이 없는 자연스러움 그 자체로 드러나는 ‘외로움’은 마음의 한 진수를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음이 “식물처럼” 되지 못하면 어떤 일도 온전히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내가 했던 대부분의 연애가 실패로 돌아간 건 태어날 때부터 식물적인 감각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고백은 의미심장한 데가 있다. 마음이 갖추어야 할 “식물적인 감각”의 부재는 단순히 어느 한 부분의 결핍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전체를 온전히 이루게 하는 토대 혹은 바탕에 대한 결핍을 말하는 것이다. 마음이 갖추어야 할 “식물적인 감각”에 대한 시인의 자의식은 시편 곳곳에 드러나 있다.
시인이 찾고자 하는 그 ‘마음의 하얀 뼈’는 마치 ‘흰그늘’을 연상시킨다. 소리꾼이 한을 삭이고 삭여 그늘이 만들어지고, 다시 그 그늘에서 흰빛이 솟구쳐 올라 흰그늘이 만들어지는 경지가 바로 그것이다. 시인이 발견하려는 마음의 하얀 뼈 역시 뼈 때리는 아픔 속에서 만들어진 삶의 윤리성과 미학성이 어우러진 그런 산물로 볼 수 있다. 시가 단순한 미의 산물이 아니라 이러한 삶의 윤리성과의 관계 속에서 탄생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망각할 때가 있다. _해설(이재복 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 중에서
시인의 말
내 마음이 하는 일이다.
돼지와 비를 데리고
걷기.
한 마음이 한 마음에게
가서 우는,
살.
시집 속의 시 두 편
식물복지
개가 산책을 할 때 새는 기도를 한다.
그녀가 말했고 나는 웃었다.
식물처럼
새는 왜 새가 되었는지 개는 왜 개가 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새와 개는 마음이 잘 통할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새와 개 사이에 놓인 커다란 구멍, 누가 돌로 구멍을 막아놓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말을 잘 듣지 않는 커다란 돌처럼 고개를 들어 올리면서
새를 본다. 새는, 개와 잘 놀아줄 것 같다. 이런 생각은 가능하면 하지 않는 게 좋다는 말은 나보다 늙은 배롱나무에게 들었다.
내가 있어도 외로워?
외롭다는 말은 마음이 식물처럼 걷는다는 말!
배롱나무는 너무 자주 머리를 긁는다.
그녀와 내가 개와 새처럼 걷다가 잠시 멈춰 서 있을 때였다. 마음을 내려놓는 순간 죽을 수도 있다고 바람이 말했다. 나는 바람과 말이 잘 통한다. 빌어먹기 딱 좋은 이 말을 나는 그녀에게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했던 대부분의 연애가 실패로 돌아간 건 태어날 때부터 식물적인 감각이 없었기 때문. 나는 그녀 그림자 밑에 발을 넣고 걷다가 여우비를 떠올렸지만,
죽었지.
마음과 마음은 더 이상 마주치지 않을 거예요.
저만치 팔랑팔랑 앞서 걷는 노란 나비를 보고 개가 펄쩍 뛰어오르고
새는 또 기도를 하고, 나는 뒤를 보고 열심히 걸었다.
바람이 오기 전에 잎을 내려놓는
식물처럼
눈사람의 목소리라고 생각할게요
어떤 말은 물을 닮았다. 흐르면서 시작되는
마음의 피부를 만지는 기분
난 왜 이 모양일까? 그녀가 말했을 때 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밤이 된 줄도 몰랐다. 난 왜, 라는 그녀의 말속으로 들어가
빈 화분처럼 앉아 있었다. 마음이 아파하는 소리가
눈송이처럼 잠시 모였다가 흩어졌다.
너무 먼 곳은 아닐 것이다. 눈사람의 일을 대신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있어서 나는, 나보다 더 사랑을
살아보려 했을 것이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 모양은 어떤 모양일까?
막 끓기 시작한 라면 냄비 속에서 가만히
늙고 병든 바람이 무화과나무 잎사귀 만지는 소리를 건져 올리는
그런 밤이 있어서
그녀는 나를 떠나 눈사람이 되고 싶었는지 모른다.
눈과 사람 사이 어디쯤 지옥이 있겠지만 끝내 사랑을 지키는,
그래요. 마음에게도 시간을 좀 줘야 하니까요.
속옷을 빨아 드라이기로 말리듯 건너오는
그녀의 슬픔은 지나치게 겸손해서 마음이 죽어가는
소리도 다 들리는 것 같았다.
눈사람의 목소리라고 생각할게요.
물을 닮은 말은 식물처럼 걷는다. 몸보다 먼저
마음이 하는 일이다. 어디쯤 가고 있을까? 그녀가 했던 말을
오래된 눈송이처럼 다시 만져보는
그런 밤이 있다.
차례
1부 잊음
탕평 19
잊음 20
장마 22
속옷만 한 고양이가 없다 24
백지 26
도자기에게 축하받을 일 27
닭 타기 28
눈사람의 목소리라고 생각할게요 30
키위 32
로켓 어항 34
라디오존데radiosonde 36
리스크 39
오프너 40
2부 식물복지
병어 45
스위치 46
식물복지 48
탕기 영감과 나 50
새의 시간 53
토끼 설명회 56
행여 잊으신 마음은 없습니까? 58
곧 갯벌 60
크리소카디움 62
종이도자기 64
고마리 66
지하수 68
몽두 70
3부 돼지와 비
신작 75
서퍼 76
돼지와 비 78
모탕 80
반창고 82
바람에게 빌려준 옷이 있을 것 같아서 84
당근마켓 86
집을 보러 다닌 경험 88
오래된 고요 90
차경 91
웃비 94
놀이공원 95
4부 서로 등 돌리고 앉아서 누군가는 빵을 굽고
누군가는 빵을 먹고
다이어트 101
서로 등 돌리고 앉아서 누군가는 빵을 굽고 누군가는 빵을 먹고 102
흰 잠 103
기침소리 106
궁합 108
나물비 110
다른 이름으로 저장하기 112
릉영원 117
여치 118
투명 120
인공호수 122
홍학 124
해설 _ 마음의 현상학 127
이재복(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
저자 약력
김 륭
200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2007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시집 『새를 키우고 싶은 개가 있을 겁니다』 등.
kluung@hanmail.net
새를 키우고 싶은 개가 있을 겁니다
김 륭 시집
상상인 기획시선 6 | 2024년 11월 29일 발간 | 정가 12,000원 | 128*205 | 144쪽
ISBN 979-11-93093-77-1(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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